숙녀의 기분 (박상수 시집)

숙녀의 기분 (박상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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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앙큼하고 가벼운 희극적 언어들로 반영한 숙녀들의 멘탈!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 제41권 『숙녀의 기분』. 2000년 《동서문학》에 시, 2004년 《현대문학》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한 박상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다른 사물과 인간 군상에 둘러싸여 있는 숙녀들이 겪는 세계 경험의 표면이자 이면을 살펴본다.

저자가 숙녀라고 묘사하는 세대의 본질적 곤경들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한 단계 계단을 오르긴 했으나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아이와 어른 사이, 소외 계층도 특권 계층도 아닌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 하는 안락과 혼란 사이에서 숙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굴욕 플레이 속에 담긴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좀 아는 사이’, ‘쉽게 질리는 스타일’, ‘장미십자회 중창단의 여름’, ‘빛이 우리를 인도할까요’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여름의 에테르

길고 긴 계절의 편지를 쓰고 계단을 내려갔을 때였지, 코끼리 열차를 타고 온다는 라운지 밴드는 졸다가 가버렸고 담쟁이덩굴만 골목에 가득했어 난 여름의 마음을 담아 목각인형을 풀어주었지 트로피컬 양산을 귀에 꽃고 잠자리 안경을 씌워주었어

떠돌이 악사를 찾아가, 산악 전차를 타고 다시 여행을 시작해

하늘나라 미술관에선 하트 모양의 펀치를 직고 있었지 라일락의 마지막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어, 사람들은 어떻게 여름을 살아갈까 마음이 지워질 때까지 얼마나 더 꽃잎을 모아야 할까

아무것도 미운 건 없었어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지워야 할 이야기가 많아서 나는 또 대문을 닫겠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만난 적 없는 눈망울과 이 여름의 공기와, 에테르의, 부서져 흩어지는 에테르의 바다.
저자

박상수

저자:박상수
1974년서울에서태어나명지대학교문예창작학과를졸업하고같은대학원에서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2000년『동서문학』에시,2004년『현대문학』에평론이당선되어등단했다.시집으로『후르츠캔디버스』,평론집으로『귀족예절론』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교생,실습
기숙사커플
좀아는사이
24시간열람실
파트타임
학생식당
팀플레이
월급날
로맨티시즘
소울메이트
걸토크
2부
낙관주의적학풍
파트타임
나의여학생부
조별과제
쉽게질리는스타일
사춘기
잘아는사이
합격수기
장미십자회중창단의여름
나의첫번째남자친구
청춘
3부
호러
시상식모드
편입생
애원
구직활동을하러교회에갔어요
오픈테스트
6인실
기대
절교선언
닌나난나
여름의에테르
4부
정반합
빛이우리를인도할까요
교환일기
보험
친자확인검사
자신
진실게임
같이놀아요
숙녀의기분
해설
숙녀라는이름의굴욕플레이어
함돈균(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가지마세요우릴구해주세요

만국기가펄럭이는계주에서흰색바통을놓쳐버린것처럼
진한당밀차가캐러멜색으로마룻바닥위를흠뻑적셔나갈때

운동장스무바퀴를뛴다음의
사향냄새감도는
가슴을두개나가지고서.
-「교생,실습」부분

서시에서우리는숙녀로진입하려는이들을만날수있다.“운동장스무바퀴를뛴다음의/사향냄새감도는/가슴을두개나가지고”있는숙녀직전의그들은메이크업이나향수따위로자신을꾸미지않는다.‘교생선생님’의경험만으로도인생이바뀔수있을것같다고생각하는여린감수성을지닌그들은“만국기가펄럭이는계주에서흰색바통을놓쳐버린것”같은곤경과상실감속에서비로소숙녀의세계로진입한다.

좀가,냄새나니까좀가

내침대에들어가서는자는척하고있구나그렇게도입지말라는늘어난면티를입고서,굴욕플레이가더는싫어서너를만났지스쿨버스에서캐리어올려줄사람이없어서너를만났어일주일전부터너에게들려주고싶었던이야기,기어이마구해버렸다넌이불밑에서번민광처럼중얼거렸지

내가시험떨어졌다고이러는거니?

한번더떨어져서다섯번채워,그다음엔어디국토대장정같은데라도갔다와거기가면울면서어른이된대

그러지말랬지그런마이너스사고방식
-「기숙사커플」부분

선배,나는어디로가고있는걸까요?약속에한시간이나늦었는데너는오늘스타일이좋구나너의그토트백이맘에들어머리뒤에서빛이난다는너희교수님에게물어보지그러니말해주고싶지만찻잔받침대에조금씩밀크티를따라마시며,어른흉내를내는중이니까

넌조금더제멋대로걸어도되는거야

우린얕보이는게싫어서고개를끄덕이는게아닐까,너는갈수록허리가반듯하게펴져서나는너에게푸들가발을씌워주고홈베이킹용장갑으로어루만져주고싶어

(중략)

고마워요선배,라니,감정이너무많아서져버린다도대체왜나같은선배에게!이젠제발그만고개를끄덕이자,머리야다시하면될테고나만의비밀블로그엔후배는그렇게아프지않은것인지도모른다,라고써놓으면될테고

하지만고개라도끄덕이지않으면

당장나는할게없어진다.
-「좀아는사이」부분

일부러한여자애만노려봤지걔가언제화장실에가는지알고싶었어내가세번이나갔다올동안걔는……비범했다나보다세살은어려보였고,말도안돼,스타크래프트밴에서갓내려선스타일이라면

나한테는답이없는거지
-「24시간열람실」부분

그러나숙녀의세계로진입했다고해서달라지는것은없다.“굴욕플레이가더는싫어서”애인을만들기도하지만,계속해서취업시험에서떨어지는애인을봐야하는심정은더하다.오히려“그렇게도입지말라는면티”와가까이가기도싫은‘냄새’가비참한현실을더욱확인시켜줄뿐이다.게다가어른이되기위해서는시험에다시한번더떨어지고“국토대장정같은데라도갔다와”야한다.실패로얼룩진굴욕을극복하고눈물을흘리는성장통을겪어야어른이될수있는현실에서“찻잔받침대에조금씩밀크티를따라마시며,어른흉내를내”보기도하지만,“얕보이기싫어서고개를끄덕이”는행동을그만두고싶어도이내“고개라고끄덕이지않으면//당장나는할게없어”지는현실을자조할수밖에없는숙녀들.아니,그들은어쩌면숙녀가되고자하는,숙녀를선망하는자들에가까울지모른다.화장실도안가고공부하면서,어려보이는외모에,“스타크래프트밴에서내려선스타일”을한진짜숙녀를그저바라보며“나한테는답이없는”것을확인하는하는것이그들의역할이기때문이다.

이시집의숙녀들은‘실패한숙녀들’이다.이들은여성잡지의표지를장식하는‘보그걸(VogueGirl)’이되는것은턱도없고,잡지의우아한독자들이자소비자들인‘레이디’가되는일에조차실패했으니말이다.설령그녀들이조금먼장래가된다고한들,‘청담동며느리’가될수있겠는가.어떻게이야기하든간에이희극적풍경에는우리시대의진실이라고할만한우스꽝스러운면이내재해있다.하지만만일여기에진정한희극성이존재한다면아마도이것은숙녀들의‘기분’때문이아니라(사실이기분은우울하고착잡하다),이기분이환기하는풍경의이면때문일것이다.
-함돈균,해설「숙녀라는이름의굴욜플레이어」중에서

이시집에서는숙녀가되고자하는그들의굴욕플레이는결코무겁거나어둡지않고희극적으로담아내고있다.독자들은마치<개그콘서트>의우스꽝스러운한장면을이시집에서만나게될지도모른다.
이렇게이들의이야기에웃을수있는것은우리가그숙녀의기분을알기때문이다.그들의굴욕플레이에대한경험이우리에게도있기때문이다.이번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함돈균이“이건그냥우리시대의‘쌩얼’이다”라고한이유가여기에있다.
책장을넘기며앙큼발랄한숙녀들의모습과우스꽝스러운좌절의순간들을확인하며웃다보면,어느덧씁쓸한현실에입맛을다시게된다.그러나기분은언제나사라지고바뀌는것.굴욕의나날이지만그럼에도숙녀들은주문을외운다.“큐티큐티큐트샤라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