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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면서 어느 지역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직도 붉은 황톳길이 상징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전라도 땅, 지역 곳곳에 한 많은 외침이 들리는 충청도 땅, 고향보다는 외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열심히 참여하다 희생당한 경기도의 동학군들, 동학의 불씨가 다시 불붙을 수 있게 해 준 터전이자 한양을 향한 함성의 강원도 땅, 모든 사람이 다 하늘과 같이 위대한 존재라는 자각을 한 신분 초월의 함성이 남아있는 경상도 땅 그리고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하나같이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의 원과 한이 서려 있는 땅이다.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들이 넘치는 지역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쓰러운 지역이 있다면 정읍의 고부와 충북 옥천의 청산이다. 고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첫 함성이 울렸던 장소이고, 청산은 동학농민혁명이 반외세의 기치로 2차 기포가 선언된 지역이다. 청산기포로 알려진 옥천군 청산면의 문바위골은 동학의 최고 지도자 해월 최시형이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모두 일어나 왜군과 싸우라고 총기포령을 내린 지역이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한 지역이다 보니 변변한 기념식, 학술대회도 드물었다. 그날 해월의 총동원령에 따라서 전국의 동학도들은 우리의 적은 탐관오리로 상징되는 조선사회를 넘어서 침략자 일본이라는 점이 명확해졌고 최초의 대일항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서 기념사업회도 생기고 조촐한 기념행사도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청산기포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향후 크게 주목받을 지역이 옥천이다.
고부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1894년 갑오년 1월에 전개된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893년 11월에 준비했던 사발통문의 계획대로 전봉준 장군의 지휘하에 백성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혁명적 의거였다. 학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을 엄벌하고자 고부군의 농민들은 가렴주구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고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부군에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이 꽃피는 대동세상이 되었고 군민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은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특별법 제정 당시 혁명의 시작을 1894년 3월로 명기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과는 무관한 민란의 한 형태가 되어 버렸고 교과서에서마저 사라지고 있다. 분명한 점은 고부봉기가 없었다면 동학농민혁명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도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듯이 고부에서의 의거가 없었다면 갑오년의 자랑스러운 기록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집중하는 학계의 다수설은 혁명의 시작은 고부가 아닌 무장기포이다. 포고문의 내용이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적 성격을 잘 나타내었고 참여자들이 군현을 넘어서 비로소 혁명의 취지가 세워졌다는 점 때문이다.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보건대 무장기포는 나름대로 충분히 동학농민혁명의 첫 발자국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과연 고부에서의 사건없이 무장기포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했다. 1월 10일의 고부봉기는 한 많은 원민들이 우발적으로 일으켰다기보다는 준비된 계획하에 진행된 혁명적 의거였다. 그리고 사발통문의 서명자 모두가 참석함으로써 동학의 조직이 활용되었기에 그것은 봉기가 아니라 기포였다. 따라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는 연계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지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에는 반대한다.
사실 필자의 이러한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에 대한 견해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교과서적이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을 하기 위한 학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서부터 당연히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에는 고부봉기일이 적합하다고 제시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미 학계 다수는 무장기포를 주장하고 있었다. 혁명의 기치를 내건 첫 함성일이 국가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도 타 기념일을 제시하는 학자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프랑스대혁명의 기념일이 7월 14일인 이유와 미국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인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기에 필자는 상식적 지식과 실제 학자들의 주장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 이미 굳어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꾸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더욱이 이미 특별법에 3월부터로 못 박혀 있다 보니 국기기념일 제정에서는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점은 옛 고부지역인 정읍의 이평면에서 역사적 사실과 유적을 지켜오고 계신 보존회 분들과 이평면민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져 가도 조용히 조상들의 업적을 선양하고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하는 그분들을 뵐 때마다 연구자로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가 가진 상식은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구체화되었다. 아무리 학계에 정설이 완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연구 결과로 바뀔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심스러웠다. 역사적 사실이 밝혀짐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실망을 가질 지역과 지역민도 있을 것이고 또 섣불리 기존 학계의 연구성과를 폄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확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료 학자들의 동의와 공감을 끌어내는 일첫 술이었다.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연구의 동학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마침 동학학회를 책임지게 된 입장이 되다 보니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볼 필요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학수 정읍시장님이 동감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과연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은 무관할까 하는 문제 제기에서부터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고부봉기를 재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학술대회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본 책자는 그 성과물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과감하게 “고부봉기가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다”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는 학술대회를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작은 결과물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커야 했다. 모든 연구의 성과물이 객관적 사실로 확증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에 이 결과물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두고 전개되는 논쟁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기조 강연을 맡아주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님께서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연구로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의 상관성을 규명해 주셨다. 왜 동학농민혁명에서 고부봉기가 중요한지를 김 관장님의 글 한 편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원고를 제출해 주셨다. 특히 결론 부분에 특별법의 개정과 교과서 수록 그리고 헌법 전문에 실림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후손들에게 계승되어야 할 당위성을 제시해 주셨다.
아울러 조광환, 성강현, 조극훈, 김영진, 성주현, 조성운, 조성환 교수님들의 논문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 개별 논문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귀한 연구들이다. 사발통문과 고부봉기의 상관성에서부터 과연 고부봉기가 아닌 고부기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오류의 지적과 향후의 고부봉기가 제대로 선양되기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교수님들의 소중한 연구 결과물들이다. 마지막 장은 성지윤 박사가 고부봉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주어 단행본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 단행본이 고부봉기에 대한 진지한 연구의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이후 전개될 학술적 논쟁과 주장에는 언제든지 당당하게 대응할 것이며, 이때는 더욱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자료에 기반한 논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 향후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으로 이번에도 단행본 출간에는 동학학회와 의기투합 된 고부봉기기념사업회의 이희청 이사장님의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전의 갑오동학농민혁명 유적보존회의 김정길, 서현중, 박종신 이사장님의 뒤를 이어 책임을 맡고 계신 이희청 이사장님의 헌신적인 노력에 늘 감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혁명의 도시의 책임자임을 자부하고 계시는 이학수 시장님의 결단과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과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읍시청의 한결같은 공직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어려운 출판업계의 상황을 잘 알기에 이번에도 기꺼이 단행본 출간을 결정해 주신 도서출판 선인의 윤관백 대표님과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리며 역시 동학학회의 임원진 여러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임들이 계셨기에 우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고부봉기가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었음이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들이 넘치는 지역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쓰러운 지역이 있다면 정읍의 고부와 충북 옥천의 청산이다. 고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첫 함성이 울렸던 장소이고, 청산은 동학농민혁명이 반외세의 기치로 2차 기포가 선언된 지역이다. 청산기포로 알려진 옥천군 청산면의 문바위골은 동학의 최고 지도자 해월 최시형이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모두 일어나 왜군과 싸우라고 총기포령을 내린 지역이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한 지역이다 보니 변변한 기념식, 학술대회도 드물었다. 그날 해월의 총동원령에 따라서 전국의 동학도들은 우리의 적은 탐관오리로 상징되는 조선사회를 넘어서 침략자 일본이라는 점이 명확해졌고 최초의 대일항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서 기념사업회도 생기고 조촐한 기념행사도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청산기포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향후 크게 주목받을 지역이 옥천이다.
고부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1894년 갑오년 1월에 전개된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893년 11월에 준비했던 사발통문의 계획대로 전봉준 장군의 지휘하에 백성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혁명적 의거였다. 학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을 엄벌하고자 고부군의 농민들은 가렴주구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고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부군에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이 꽃피는 대동세상이 되었고 군민들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은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특별법 제정 당시 혁명의 시작을 1894년 3월로 명기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과는 무관한 민란의 한 형태가 되어 버렸고 교과서에서마저 사라지고 있다. 분명한 점은 고부봉기가 없었다면 동학농민혁명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도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듯이 고부에서의 의거가 없었다면 갑오년의 자랑스러운 기록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집중하는 학계의 다수설은 혁명의 시작은 고부가 아닌 무장기포이다. 포고문의 내용이 동학농민혁명의 반봉건적 성격을 잘 나타내었고 참여자들이 군현을 넘어서 비로소 혁명의 취지가 세워졌다는 점 때문이다.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보건대 무장기포는 나름대로 충분히 동학농민혁명의 첫 발자국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과연 고부에서의 사건없이 무장기포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했다. 1월 10일의 고부봉기는 한 많은 원민들이 우발적으로 일으켰다기보다는 준비된 계획하에 진행된 혁명적 의거였다. 그리고 사발통문의 서명자 모두가 참석함으로써 동학의 조직이 활용되었기에 그것은 봉기가 아니라 기포였다. 따라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는 연계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지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에는 반대한다.
사실 필자의 이러한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에 대한 견해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교과서적이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을 하기 위한 학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서부터 당연히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에는 고부봉기일이 적합하다고 제시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미 학계 다수는 무장기포를 주장하고 있었다. 혁명의 기치를 내건 첫 함성일이 국가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도 타 기념일을 제시하는 학자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프랑스대혁명의 기념일이 7월 14일인 이유와 미국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인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기에 필자는 상식적 지식과 실제 학자들의 주장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 이미 굳어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꾸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더욱이 이미 특별법에 3월부터로 못 박혀 있다 보니 국기기념일 제정에서는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점은 옛 고부지역인 정읍의 이평면에서 역사적 사실과 유적을 지켜오고 계신 보존회 분들과 이평면민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져 가도 조용히 조상들의 업적을 선양하고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하는 그분들을 뵐 때마다 연구자로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가 가진 상식은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구체화되었다. 아무리 학계에 정설이 완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연구 결과로 바뀔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심스러웠다. 역사적 사실이 밝혀짐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실망을 가질 지역과 지역민도 있을 것이고 또 섣불리 기존 학계의 연구성과를 폄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확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료 학자들의 동의와 공감을 끌어내는 일첫 술이었다. 잘못된 편견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연구의 동학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마침 동학학회를 책임지게 된 입장이 되다 보니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볼 필요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학수 정읍시장님이 동감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과연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은 무관할까 하는 문제 제기에서부터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고부봉기를 재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학술대회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본 책자는 그 성과물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과감하게 “고부봉기가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다”라는 제목을 정한 이유는 학술대회를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작은 결과물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커야 했다. 모든 연구의 성과물이 객관적 사실로 확증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에 이 결과물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두고 전개되는 논쟁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기조 강연을 맡아주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님께서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연구로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의 상관성을 규명해 주셨다. 왜 동학농민혁명에서 고부봉기가 중요한지를 김 관장님의 글 한 편만으로도 충분하다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원고를 제출해 주셨다. 특히 결론 부분에 특별법의 개정과 교과서 수록 그리고 헌법 전문에 실림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후손들에게 계승되어야 할 당위성을 제시해 주셨다.
아울러 조광환, 성강현, 조극훈, 김영진, 성주현, 조성운, 조성환 교수님들의 논문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 개별 논문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귀한 연구들이다. 사발통문과 고부봉기의 상관성에서부터 과연 고부봉기가 아닌 고부기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분석과 재해석을 통한 오류의 지적과 향후의 고부봉기가 제대로 선양되기 위한 노력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교수님들의 소중한 연구 결과물들이다. 마지막 장은 성지윤 박사가 고부봉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주어 단행본의 의미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 단행본이 고부봉기에 대한 진지한 연구의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이후 전개될 학술적 논쟁과 주장에는 언제든지 당당하게 대응할 것이며, 이때는 더욱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자료에 기반한 논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 향후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으로 이번에도 단행본 출간에는 동학학회와 의기투합 된 고부봉기기념사업회의 이희청 이사장님의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전의 갑오동학농민혁명 유적보존회의 김정길, 서현중, 박종신 이사장님의 뒤를 이어 책임을 맡고 계신 이희청 이사장님의 헌신적인 노력에 늘 감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혁명의 도시의 책임자임을 자부하고 계시는 이학수 시장님의 결단과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과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정읍시청의 한결같은 공직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어려운 출판업계의 상황을 잘 알기에 이번에도 기꺼이 단행본 출간을 결정해 주신 도서출판 선인의 윤관백 대표님과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리며 역시 동학학회의 임원진 여러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임들이 계셨기에 우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고부봉기가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었음이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고부봉기가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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