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

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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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겸재의 금강산 그림에는
정치가 들어 있다
『추사코드』(2016년, 2017년도 세종우수교양도서)와 『추사난화』(2018)로 기존 미술사학의 추사 작품 해석에 대해 전복顚覆적 문제제기를 했던 화가 이성현이 겸재 정선의 작품을 다룬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2020)에 이어 겸재의 금강산 그림들을 천착穿鑿하는 책을 내놓았다. 겸재가 그려낸 금강산 그림의 배경과 함의를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화제시는 물론이고 그림 속에 심어놓은 힌트들을 세심히 추적하여 기존 미술사가들이 곡해했거나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낸다.

선비들의 그림은 사의성寫意性을 가장 중요시한다. 옛 선비들은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따로 마련해두기도 했다. 이런 그림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비의 고고한 품격’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기존 해석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비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선비다움이다. 선비는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양심이다. 선비의 품격이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한사코 조선 선비들의 그림을 정치적 행위의 일환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 했다. 표현 대상의 외형이 얼마나 잘 닮게 그려졌느냐를 평가하기보다는, 그 그림 속에 선비의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읽으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비의 그림에 사용된 특유의 조형어법과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한시 및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 고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겸재(1676-1759)의 화명畫名이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신묘년풍악도첩》이 그려지면서부터였다. 그가 서른여섯 되던 해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삼연 김창흡(1653-1722)의 제5차 금강산 여행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그림첩이다.
삼연 김창흡은 누구인가?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호락논쟁湖洛論爭’의 한복판에서 낙론을 이끌었던 노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이다. 그이만큼 금강산 여행을 자주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유는 금강산 자체보다는 그곳에 깃들어 있는 사찰(승려)과 관련이 있었다. 이 책의 1부 “금강산 만이천봉을 모두 부숴버리고 싶지만”에서 볼 수 있듯, 당시 노론은 불교계의 힘을 통제해야 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조정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 인사들이 금강산 불교계를 자극하여 연합 세력을 결성하면 큰 화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정 서산대사가 승병을 조직하도록 하여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살육전쟁(임진왜란)에 뛰어들게 한 후 의승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보상을 약속받고 전란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불교계에 대한 조정과 사대부들의 인식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승병들의 힘을 직접 목격한 조정과 사대부들은 승려들을 깊은 산속으로 몰아넣고 산문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이에 원망이 가득 찬 승려들이 어떤 계기로 정치적 변수가 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백헌 이경석, 번암 채제공, 표암 강세황 등의 금강산 시詩들이 그곳 사찰(승려)을 암유하고 있는 이유이다.
저자

이성현

홍익대학교미술대학에서미술학박사학위를취득한저자는23회의국내외개인전과동아미술상수상작가전을비롯한150여회의단체전그리고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대상을수상한현역화가이다.
30여년간작가이자교육자로활동하면서,지나치게문헌연구중심으로경도된미술이론들을접하며많은문제점과병폐를절감하였다.이에화석화된미술사연구에생기를불어넣을수있는작품중심의연구풍토를환기시키고자,정설로자리매김된기존한국미술사에화두를던지고자한다.
바른미술사는어떻게정립되는가?
이질문에답하기위해화가의눈으로확인한추사의모습과,그에뒤이어겸재를기록하는작업에매진하고있다.
저서로『추사코드』(2016발간,2017세종우수교양도서),『추사난화』(2018),『노론의화가,겸재정선』(2020)이있다.

목차

글을시작하며


1부금강산만이천봉을모두부숴버리고싶지만

〈단발령망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
〈내금강총도內金剛總圖〉
〈만이천금강저萬二千金剛杵〉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의금강산시
번암樊巖채제공蔡濟恭의금강산시
표암豹菴강세황姜世晃의금강산시
비로봉에오르는대가


2부〈금강전도〉

〈금강전도金剛全圖〉에태극太極이
제화시題畵詩로그린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갑인동제甲寅冬題


3부시인의눈화가의손

만폭동萬瀑洞
명경대明鏡臺
불정대佛頂臺
백천교百川橋


겸재정선의그림선생

글을마치며

도판목록

출판사 서평

시인의눈,화가의손…그리고겸재의그림선생

겸재를삼연의금강산여행길에동행하도록천거해준사람은사천이병연(1671-1751)이었다.그와겸재는‘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시와그림을바꿔보며교유함’관계로불린다.그러나‘볼간看’은‘시간을두고변화를살핌’이란의미를내포하고있는글자로,‘시화환상간’은‘두사람이시와그림을교환하며서로의작품세계가변화하는과정을살펴봄’이란뜻에가깝다.그런데두사람이서로의작품이변화해가는과정을살펴보며교유하였다는것이무슨의미가될까?두사람은왜서로의작품이변화하는과정을살펴볼필요가있었을까?두사람이하나의주제를시와그림으로표현하며한목소리를내는,이른바‘시중유화詩中有畵화중유시畵中有詩’의효과를얻고자했기때문이다.
앞서‘금강산만이처봉을모두부숴버리고싶다’는삼연김창흡의생각을사천이병연은겸재의《신묘년풍악도첩》속〈단발령망금강산〉을통해바꾸게하였다.즉,삼연이당시파악하고있던금강산불교계에대한정보가불완전하다는것을사천이비유하였고,이를삼연이받아들인것이다.말하자면쌍방의정치적생각과행위를겸재의그림을통해주고받았던셈이다.

사천은제시題詩「관정원백무중화비로봉觀鄭元伯無中畵毗盧峯」이란시에서,겸재의호방한성격과천재성을아끼는마음을보이는한편,그를‘낭중무화필囊中無畫筆’이라하였다.‘낭중무화필’이란‘주머니속에그림그리는붓이없다’는뜻이아니라‘주머니속에그림을담아낼화의畫意가없다’는뜻이다.왜그랬을까?사천은금강산이아무리눈을떼지못할만큼절경이라해도감흥에취해풍경을옮기는것은선비의그림이아니라고하였으나,겸재가이를무시하고가슴을뛰게하는절경을옮기기에바빴기때문이다.사천은선비의그림을보고자겸재를금강산여행길에동행케했던것인데,겸재가이런기대를저버리고쟁이의그림을그리고있으니방자하다는말까지한다.
사천의이제시題詩에서는겸재가그린금강산그림을선비의그림으로변모시키기위해어떻게수정하도록했는지구체적사례를들어주고있다.교만하게누워움직이려하지않는그림비로봉의모습은허락할수없으니,당당한비로봉의위용을떨어뜨려(낮춰)다시그리라고했다는부분이다((367쪽그림참조).

미술사가들은겸재와사천이‘시화환상간’을하며서로의작품세계에영향을끼쳤다고한다.이는두사람이노년에접어들무렵의일이었고,무엇보다이것이가능했던것은겸재가선비의그림을그릴수있도록사천이이끌어주었기때문이다.물론선비의그림에는선비그림만의어법이있으니,겸재가사천의지도를기꺼이받아들인것은부끄러운일이아니라오히려아름다운우정으로볼수도있다.그러나겸재가함부로붓을놀린다며‘방자하다’하고,자신에게선비의그림을그릴수있도록지도편달을부탁하더라는말을남겼다는것은자신이겸재를선비화가로만들어낸사람이라고공공연히떠벌린격이니,이를우정이라볼수있을지의문이다.그보다는사제師弟간의언사에가깝지않을까?
사천이겸재에게선비의그림을가르친주된이유는노론의정치적메시지를은밀히전하기위한수단으로쓰고자했기때문이었고,겸재또한이를알면서사천의지도를받아들인것이다.

겸재정선의진경산수화는거의대부분사천이병연의제화시와함께하고있다.누구보다겸재를가까운거리에서지켜보며함께했던당대최고의시인이겸재의진경산수화에대하여언급한가장믿을만한기록인만큼,겸재의산수화를보기위해서는사천의제화시를읽을필요가있다.그러나겸재의진경산수화와함께하는사천의제화시를해석한기존의해석들은하나같이풍경묘사일색이다.이런까닭에겸재의진경산수화또한실경을바탕으로한개성적작품그이상도그이하도아닌것이되어버렸다.비유는일반적인말과글을초월적언어로바꿔주는힘이있으며,이는예부터문예작품이비유와함께하고있는이유이기도하다.겸재의금강산그림들을어떤각도에서봐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