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법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5

시작법 - 문학과지성 시인선 605

$12.00
Description
“그렇게 쓰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어요”

공간의 가장 안쪽에서
집요한 시선으로만 포착되는
현실과 환상의 어름
약동하는 물음표로 가득한 너른 틈의 설계자
차호지 첫 시집 출간

2021년 제2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차호지의 첫 시집 『시작법』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05번으로 출간되었다. 총 4부로 나뉘어 묶인 51편의 시에는 “좁은 공간에서 혹은 한정된 시야로 혹은 제한된 관계 안에서 특정한 장면을 만들어내거나 사유를 확장해나가는”(심사평) 시인만의 개성적인 작법이 뚜렷하게 투영되어 있다.
차호지의 시에서 편편이 등장하는 공간은 사면의 벽과 천장과 바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상자’(「설계자」)나 ‘방’(「소음」)과 같은 육면체의 형태는 물론 ‘열차’(「열차」), ‘천변’(「저글링」), ‘공중’(「공중」)까지 아우른다. 둘레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이러한 공간들이 전면적으로 막혀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까닭은 시 속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놓일 장소를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꾸린 공간은 “창문이 완전히 없”는 경우가 “좀처럼 없”(「바퀴의 왕」)기에 바깥의 공기가 선선히 들어올 수 있고,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도 “바람은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아쿠아플라넷에서」)가고는 하며, 환상은 그 바람을 타고 현실 속으로 자유롭게 틈입한다.
이때 벽을 상상하며 직접 세우는 일은 폐쇄를 더 견고하게 할 뿐인가? 아니면 세워진 벽을 언제든 부정하고 허물 수 있다는 점에서 잠정적인 탈출과 맞닿아 있는가? 시 속 설계자들이 그들이 직조한 공간을 좀체 벗어나지 않기에 이러한 의문은 특히 커진다. 공간의 바깥을 “밟는다고 해서 갑자기 어딘가로 떨어지지는 않을”(「산책」) 테지만, 이들은 폐쇄된 공간 안쪽에 들어앉아 충실하게 잔류한다.
확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러한 머묾이 정해진 질서를 충실하게 감각함으로써 그것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치열한 태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완전한 허공에 붕 떠서 살아갈 수는 없다. “점점 더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라도, “더는 올라갈 높은 건물이 없어 가장 높은 건물 위에서 제자리 뛰기 하”여도 그곳에조차 천장이 있다. 그러므로 머리에 닿는 것이 천국이 아닌 천장임을 알면서도, “엉엉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파도 “천장에 머리를 자꾸만 부딪”(「공중」)치는 일은 유의미한 시도로 읽힌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아쿠아플라넷에서」)는 법이다.
저자

차호지

저자:차호지
2021년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시작법|안내|캉기|모험|g|시놉시스|대화|면적|사랑하는사람|설계자|바퀴의왕|박멸|창문
2부
그시절|도망자|소음|이사|역할|녹음기사|돌|경도|공중|가마|두통|단체
3부
순서|2인실|의인법|카운터포인트|사랑|끝|여기서부터는다른작품입니다|모빌|그네|아쿠아플라넷에서|열차|제자리|목소리
4부
봄|오토|저글링|연행|스노볼|커튼|시차|어두운밤나는적막한집을나섰다|긴외침이후에|매듭|산책|어디야?|신작
해설
이후의이야기홍성희

출판사 서평

“멈추지않고움직이는형상에는
눈길이가게마련이었다”
-시작,법(始作,法):움직임에몰두하며시작하기

열차는만석이고창가에는서로모르는사람들이나란히한방향으로앉아있다.사람들은거의창밖을보고있다.바깥을보는것이좋아서라기보다움직이는것에시선을빼앗겼기때문이다.[……]열차가순환한다면나는시간이가는줄도모르고움직이는바깥풍경을보다가아까와비슷한풍경을발견하고그제야이곳이아까보았던풍경과같은지지도로부터확인하여그것의맞고틀림을가늠하는놀이에온하루를다썼을지도모른다.열차가정차하고다시출발할때마다천장에서무수히발소리가들렸다.플랫폼에서보았던얼굴들은아무리기억하려고해도다시기억나지않았다.떠나가는사람들을보며열차에앉아있으면나도다시움직이는기분이들었다.
-「열차」부분

공간안팎의움직임을분주하게좇는시선이함께하기에,단순하고담백한문장으로사방이에워져있음에도차호지의시는결코정적이지않다.마치“움직이는아기새모양모빌이그리는원모양에마음을빼앗겨서줄곧움직이는아기새모양모빌을보고있을수밖에없”(모빌)는것처럼,저글링을하는누군가가공을놓쳤을때“아까그자세로가만히멈춰있는그”대신“세개의공이어디로향하는지쳐다보게”(「저글링」)되는것처럼,움직임에는이목을잡아끄는힘이있고시인은기꺼이“움직이는것에시선을빼앗”(「열차」)긴다.움직임마다바싹따라붙는특유의눈길은얼핏고요한듯보이는일상의장면에묘한긴장감을조성한다.

밀도높은관찰은풍경의디테일을선명하게만들어찰나의사소한미동에도생경한느낌을불어넣고,이에시인은“움직이고움직이는것들이움직이고있으면왜저건움직이고있을까”(「바퀴의왕」)자문한다.“이제다썼고더는쓸게없다고생각하는때에”도사물들은“꼭다시움찔거”(커튼)리기에이물음은끝날수없고,움직임이계속되는이상“사물이사물이었던시대”(「돌」)는저물게되며,“말을하면”“움직이는사람이”(「제자리」)되게마련이므로시인은외부의움직임에몰두하는관찰자의자리에서나아가스스로시적움직임의주체가된다.차호지의시쓰기는여기서시작한다.

“이해를하는데는시간이필요하고
시간이아주많을때그말은떠오른다”
-시,작법(詩,作法):틈새에서질문하며쓰기

나는빠르게움직이고있다.예를들면여기있는문장을읽을때눈동자가움직이는속도.다음,다음으로.
[……]
나는천천히말하려고노력한다.

시간은움직이고나는나도모르게그것을쫓고있다.그건이미내생각이아니었던것같지만소리가귀에들려오고걷는나의뒤쪽에서앞서걷는사람의말을듣고있었다.그의등을보면서

모르겠어?
[……]
나는열린문을닫으면서거울을본다.보고싶지않아도거기에거울이있다.나는거울에없었는데잠시후에생겨났다.

등을돌려서등을보지는못하는데도

어째서그런일들이일어나는걸까?
-「시차」부분

세계를끈덕지게관찰하는일,그리고이것으로시를쓰는일사이에는필연적으로시차가발생한다.응시의앞에는그보다선행하는움직임이,창작의앞에는그보다선행하는골몰이있다.누군가의말을듣고“나중이되어서야”“그런말을했었구나하고뒤늦게그랬었구나생각하”(「산책」)는것처럼,어떤순간을통과하고나서야그순간을글자로옮겨적을수있다.차호지는이러한사실을잘이해하고있을뿐만아니라이시차를작법의도구로활용한다.

시차를인지하고씀으로써더한껏벌어지는시간과시간사이의틈은또다른틈에대한인식으로흐른다.꽉닫혀있는듯한공간에도언제나문이있음을,그리고문은무언가가드나들수있도록하는틈임을새삼스럽게환기한다.그렇게시인은시적공간의가장안쪽에있으면서도바깥의이야기를지금여기로힘껏끌어오며,그갈피마다끼어드는의문을문너머의독자와공유한다.당신의좌표는현실과환상으로부터얼마나떨어져있는가?당신은어디에위치해있는가?

끊임없이질문하며쓰는일은결국안과밖이맞닿아생기는어름을어루만져보는행위이고,이는곧틈새의폭을가늠하며수많은가능성의공간을설계하도록이끄는원동력이된다.이번시집의해설을맡은문학평론가홍성희가짚고있듯“말의힘은말자체가아니라말과말사이에놓여있”고,“이야기가무언가를움직이게한다면그힘은그것이그려낸닫힌세계의내용만이아니라하나의이야기와다른하나의이야기,또다른하나의이야기가만들어지는가운데동시에만들어지는‘사이’들에있을것이다”.

[……]자꾸문이열리는소리가들렸다.어디야?묻는소리가또들렸다.나는안쪽에있었다.그사람은바깥에있었다.너는어디야?나는목소리를내보았다.답은없었다.나는닫혀있는문을보았다.그러고보니문은드나들수있게만들어진것이었다.가까이가자문이조금열려있었고거기서찬바람이들어오고있었다.나는문을다시완전히닫았다.닫았다가열었다가해보았다.
-「어디야?」부분

시인의말

어디를찾아가고있었다
바다위의섬
작은섬

생각을계속하고싶었는데
화면은밝고
시끄럽고

빈집이하나있었다
떠난지오랜
미래의집

2024년6월
차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