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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렇게 '과학'이 시작되었다-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는 낭만적인 환상과 과학사의 만남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는 낭만적인 환상과 과학사의 만남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응할 수 있고 언어는 의사전달이나 사고의 반영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우연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사실인즉 현실 세계는 상당한 정도로 그 집단의 언어습관의 기반 위에 형성이 된다.”
_에드워드 서피어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과거 '오색찬란'하다고 묘사되던 '무지개'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의 'Sept couleurs de l'arc-en-ciel' 개념과 접하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되었다. 무지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한 사람의 사고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지배받는다는 대담한 언어학적 가설은 1,000년 이상 오래전에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또다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이 가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언어학자인 서피어(Edward Sapir)와 그 제자 워프(Benjamin Lee Whorf)가 정리한 서피어-워프 가설은 오늘날에는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언어와 사고의 지배종속 관계나 선후관계가 증명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현대에도 아직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은 채, 언어와 사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어떻게 보면 다소 미적지근한 상태로 남아 있다. 기실 현대의 언어학자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언어의 원형과 사회 문화의 탄생 순간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순간을 관찰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바로 '신조어'와 '번역어'이다.
우리는 지금 일상을 살면서 흔히 '과학적'으로 사고한다. “◯◯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해”라고 평한다. '자연'과 '인공'을 구분하고,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현대 문명을 누린다. '공룡'이라고 말할 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비롯한 다들 알법한 비슷한 생물을 떠올린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하며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외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양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과학적'인 성격을 부여했을까?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과 대화하면서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과학'이 science의 번역어로 정착하기 전, 과학(科學)은 흔히 얘기하는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 즉 과거지학(科擧之學)의 준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교육 기관으로 꼽히는 원산학사의 수업 목록을 보면 '격치(格致)'라는 교과목이 있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온 말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규명하여 앎에 이른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과목이 오늘날로 치면 어떤 과목이었을까? 물론 과학이다. science를 칭하는 교과목이었다. '격치'를 비롯해 이학, 지식, 박학, 학술 등 다양한 단어가 science의 번역어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결국 승리하여 남은 것은 '과학'이지만, 사실 누가 살아남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격치'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의미상으로 맞닿아 있음은 명백하다. 더군다나 science의 어원인 라틴어 scientia가 넓은 범위의 '앎', '지식' 따위를 의미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science가 '과학'이 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결국 살아남은 것은 '과학'이었다. 아니, 과학이다. 과학은 지금도 살아남아 우리의 사고 중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언어는 사유의 창”이라는 오랜 아이디어를 믿는다. 비록 언어가 전적으로 우리 사고를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인간 사회는 언어로 묶인다. 우리는 언어를 나눔으로써 진리를 논하고, 과학을 이해하며, 삶을 정의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언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았는지 탐구해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사 전공자로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주된 과학 어휘들의 기원을 탐구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사유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는지, 그 어휘가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한다. 우리는 부족한 사료와 유구한 시간을 넘어 먼 과거의 어휘를 추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에 과학과 관련된 어휘가 새롭게 탄생하고 번역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은 가능하다. 새로운 어휘가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의 언어와 문화, 개념이 그 수용체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서구의 과학적 개념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과 마주치면서 발생한 마찰을 관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사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사상이 부딪히면서 작금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진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현장이다.
어휘의 패러다임 경쟁을 관찰함으로써
그 어휘가 우리 사고 체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무엇일까? 또 물리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일까? 선문답 같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과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이성과 합리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共同善)으로 삼은 근대화 과정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것, 주술적인 것보다 과학적인 것,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더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그 '과학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과학의 사전적 정의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과학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과학의 본질을 더 정확히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가 무엇을 '과학'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찾아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과학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정의한 것'의 본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과학상의 술어는 우리말로 다 찾아서 적을 수 없고, 다만 서양어 발음 그대로나 한자 발음 그대로 부르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과학 술어란 별것이 아닙니다. 발명한 인명이나 지명을 넣어서 만든 것, 그 물건의 성질과 형상, 동작, 출처, 용도 등을 따라서 만든 것이니, 이같이 그 술어 속에 숨겨진 말의 요소를 살펴보면 우리말이 부족해서 술어를 못 찾을 염려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_이만규, 〈과학 술어와 우리말〉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 용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던 이만규와 김두봉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묻는다면 과학, 물리, 행성, 공룡과 같은 과학 용어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지만 이들을 두고도 첨예한 패러다임 경쟁이 있었다. 이만규가 말하는 것처럼 과학 용어들 또한 어차피 사람의 손에 의해,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정해진 것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용어는 왜 지금의 형태로 정착되었을까? 이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해당 용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planet을 떠올려보자. 즉시 '행성(行城)'이라는 번역어를 떠올렸다면 한국에서 통용되는 과학 사고 체계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동일한 한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planet의 번역어로 '혹성(惑星)'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일본을 거쳐 여러 과학 용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혹성'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惑에는 '방황하다', '길을 헤매다' 등의 의미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기보다 '혹하다'의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방황하다'라는 뜻에서 미루어보듯, '혹성'이라는 말 또한 천체가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조어이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행성'과 통하는 데가 있다.
과학 용어가 번역되면서 각 사회에 기존에 존재하던 단어를 수용체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각각의 용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당 용어에 부여하는 본질이다. 즉, 우리 사고의 발로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것은 이러한 경쟁의 과정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서 시작해 메이지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착륙하기까지, 과학 용어들은 부단한 경쟁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이를 통해서 정립되는 것은 단순히 개별 용어의 존재가 아니라,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며 구축된 현재 우리의 과학적 사고 체계 자체이다.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사유의 틀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유의 틀을 함께 해체하고, 들여다보고자 하는 지적 여정이다.
격치‧궁리‧몬결갈‧사밀‧용왕성‧사충‧공석‧공척…
다른 어휘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각 과학 용어의 경쟁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각 용어는 수많은 대체어와 경쟁해서 살아남았고, 그 과정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또는 단순한 시간적 순서에 따른 선점 효과, 혹은 관제 용어의 채택이라는 다소 불합리해 보이기까지는 결정적 순간이 있기도 했다. 종이 위에 적히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지극히 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경쟁의 과정은 동시에 몹시도 역동적이다. 지금에 와서는 괜한 공상에 불과하겠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이 단어가 살아남았다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중문화 등에서는 '공룡'과 용(dragon)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dinosaur를 '공룡(恐龍)'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됐을까?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으나 dinosaur의 의미는 영어로 fearfully great, a lizard, 즉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이라는 뜻에 가깝다. 만약 이런 의미를 살렸다면 '공룡' 대신에 '공척(恐蜴)' 혹은 '공석(恐蜥)'이라는 어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도마뱀을 가리키는 한자 '도마뱀 척(蜴)'이나 '도마뱀 석(蜥)' 자에 '두려울 공' 자를 붙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공룡에 대해서 가지는 두려움이나 동경의 감정이 조금은 옅어지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지금 봐서는 그 의미를 쉬이 알아볼 수 없는 스러진 어휘들의 잔재를 들여다보며 과학 용어의 변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과정은 지난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사체를 전시하는 박제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 사고의 뿌리를 탐구하는 역동적인 모험이다.
_에드워드 서피어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과거 '오색찬란'하다고 묘사되던 '무지개'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의 'Sept couleurs de l'arc-en-ciel' 개념과 접하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되었다. 무지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한 사람의 사고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지배받는다는 대담한 언어학적 가설은 1,000년 이상 오래전에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또다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이 가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언어학자인 서피어(Edward Sapir)와 그 제자 워프(Benjamin Lee Whorf)가 정리한 서피어-워프 가설은 오늘날에는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언어와 사고의 지배종속 관계나 선후관계가 증명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현대에도 아직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은 채, 언어와 사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어떻게 보면 다소 미적지근한 상태로 남아 있다. 기실 현대의 언어학자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언어의 원형과 사회 문화의 탄생 순간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순간을 관찰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바로 '신조어'와 '번역어'이다.
우리는 지금 일상을 살면서 흔히 '과학적'으로 사고한다. “◯◯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해”라고 평한다. '자연'과 '인공'을 구분하고,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현대 문명을 누린다. '공룡'이라고 말할 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비롯한 다들 알법한 비슷한 생물을 떠올린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하며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외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양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과학적'인 성격을 부여했을까?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과 대화하면서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과학'이 science의 번역어로 정착하기 전, 과학(科學)은 흔히 얘기하는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 즉 과거지학(科擧之學)의 준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교육 기관으로 꼽히는 원산학사의 수업 목록을 보면 '격치(格致)'라는 교과목이 있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온 말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규명하여 앎에 이른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과목이 오늘날로 치면 어떤 과목이었을까? 물론 과학이다. science를 칭하는 교과목이었다. '격치'를 비롯해 이학, 지식, 박학, 학술 등 다양한 단어가 science의 번역어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결국 승리하여 남은 것은 '과학'이지만, 사실 누가 살아남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격치'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의미상으로 맞닿아 있음은 명백하다. 더군다나 science의 어원인 라틴어 scientia가 넓은 범위의 '앎', '지식' 따위를 의미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science가 '과학'이 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결국 살아남은 것은 '과학'이었다. 아니, 과학이다. 과학은 지금도 살아남아 우리의 사고 중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언어는 사유의 창”이라는 오랜 아이디어를 믿는다. 비록 언어가 전적으로 우리 사고를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인간 사회는 언어로 묶인다. 우리는 언어를 나눔으로써 진리를 논하고, 과학을 이해하며, 삶을 정의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언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았는지 탐구해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사 전공자로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주된 과학 어휘들의 기원을 탐구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사유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는지, 그 어휘가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한다. 우리는 부족한 사료와 유구한 시간을 넘어 먼 과거의 어휘를 추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에 과학과 관련된 어휘가 새롭게 탄생하고 번역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은 가능하다. 새로운 어휘가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의 언어와 문화, 개념이 그 수용체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서구의 과학적 개념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과 마주치면서 발생한 마찰을 관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사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사상이 부딪히면서 작금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진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현장이다.
어휘의 패러다임 경쟁을 관찰함으로써
그 어휘가 우리 사고 체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무엇일까? 또 물리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일까? 선문답 같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과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이성과 합리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共同善)으로 삼은 근대화 과정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것, 주술적인 것보다 과학적인 것,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더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그 '과학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과학의 사전적 정의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과학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과학의 본질을 더 정확히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가 무엇을 '과학'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찾아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과학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정의한 것'의 본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과학상의 술어는 우리말로 다 찾아서 적을 수 없고, 다만 서양어 발음 그대로나 한자 발음 그대로 부르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과학 술어란 별것이 아닙니다. 발명한 인명이나 지명을 넣어서 만든 것, 그 물건의 성질과 형상, 동작, 출처, 용도 등을 따라서 만든 것이니, 이같이 그 술어 속에 숨겨진 말의 요소를 살펴보면 우리말이 부족해서 술어를 못 찾을 염려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_이만규, 〈과학 술어와 우리말〉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 용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던 이만규와 김두봉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묻는다면 과학, 물리, 행성, 공룡과 같은 과학 용어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지만 이들을 두고도 첨예한 패러다임 경쟁이 있었다. 이만규가 말하는 것처럼 과학 용어들 또한 어차피 사람의 손에 의해,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정해진 것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용어는 왜 지금의 형태로 정착되었을까? 이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해당 용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planet을 떠올려보자. 즉시 '행성(行城)'이라는 번역어를 떠올렸다면 한국에서 통용되는 과학 사고 체계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동일한 한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planet의 번역어로 '혹성(惑星)'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일본을 거쳐 여러 과학 용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혹성'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惑에는 '방황하다', '길을 헤매다' 등의 의미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기보다 '혹하다'의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방황하다'라는 뜻에서 미루어보듯, '혹성'이라는 말 또한 천체가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조어이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행성'과 통하는 데가 있다.
과학 용어가 번역되면서 각 사회에 기존에 존재하던 단어를 수용체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각각의 용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당 용어에 부여하는 본질이다. 즉, 우리 사고의 발로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것은 이러한 경쟁의 과정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서 시작해 메이지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착륙하기까지, 과학 용어들은 부단한 경쟁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이를 통해서 정립되는 것은 단순히 개별 용어의 존재가 아니라,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며 구축된 현재 우리의 과학적 사고 체계 자체이다.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사유의 틀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유의 틀을 함께 해체하고, 들여다보고자 하는 지적 여정이다.
격치‧궁리‧몬결갈‧사밀‧용왕성‧사충‧공석‧공척…
다른 어휘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각 과학 용어의 경쟁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각 용어는 수많은 대체어와 경쟁해서 살아남았고, 그 과정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또는 단순한 시간적 순서에 따른 선점 효과, 혹은 관제 용어의 채택이라는 다소 불합리해 보이기까지는 결정적 순간이 있기도 했다. 종이 위에 적히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지극히 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경쟁의 과정은 동시에 몹시도 역동적이다. 지금에 와서는 괜한 공상에 불과하겠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이 단어가 살아남았다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중문화 등에서는 '공룡'과 용(dragon)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dinosaur를 '공룡(恐龍)'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됐을까?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으나 dinosaur의 의미는 영어로 fearfully great, a lizard, 즉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이라는 뜻에 가깝다. 만약 이런 의미를 살렸다면 '공룡' 대신에 '공척(恐蜴)' 혹은 '공석(恐蜥)'이라는 어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도마뱀을 가리키는 한자 '도마뱀 척(蜴)'이나 '도마뱀 석(蜥)' 자에 '두려울 공' 자를 붙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공룡에 대해서 가지는 두려움이나 동경의 감정이 조금은 옅어지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지금 봐서는 그 의미를 쉬이 알아볼 수 없는 스러진 어휘들의 잔재를 들여다보며 과학 용어의 변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과정은 지난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사체를 전시하는 박제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 사고의 뿌리를 탐구하는 역동적인 모험이다.


과학 용어의 탄생 : 과학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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