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용어의 탄생 : 과학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을까

과학 용어의 탄생 : 과학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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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그렇게 '과학'이 시작되었다-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는 낭만적인 환상과 과학사의 만남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응할 수 있고 언어는 의사전달이나 사고의 반영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우연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사실인즉 현실 세계는 상당한 정도로 그 집단의 언어습관의 기반 위에 형성이 된다.”
_에드워드 서피어

우리나라를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과거 '오색찬란'하다고 묘사되던 '무지개'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의 'Sept couleurs de l'arc-en-ciel' 개념과 접하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되었다. 무지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한 사람의 사고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지배받는다는 대담한 언어학적 가설은 1,000년 이상 오래전에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또다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이 가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언어학자인 서피어(Edward Sapir)와 그 제자 워프(Benjamin Lee Whorf)가 정리한 서피어-워프 가설은 오늘날에는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언어와 사고의 지배종속 관계나 선후관계가 증명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현대에도 아직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은 채, 언어와 사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어떻게 보면 다소 미적지근한 상태로 남아 있다. 기실 현대의 언어학자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언어의 원형과 사회 문화의 탄생 순간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순간을 관찰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바로 '신조어'와 '번역어'이다.
우리는 지금 일상을 살면서 흔히 '과학적'으로 사고한다. “◯◯는 과학이다”라고 말하고, “물리적으로 그건 불가능해”라고 평한다. '자연'과 '인공'을 구분하고,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현대 문명을 누린다. '공룡'이라고 말할 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비롯한 다들 알법한 비슷한 생물을 떠올린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하며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외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양식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과학적'인 성격을 부여했을까?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과 대화하면서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과학'이 science의 번역어로 정착하기 전, 과학(科學)은 흔히 얘기하는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 즉 과거지학(科擧之學)의 준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교육 기관으로 꼽히는 원산학사의 수업 목록을 보면 '격치(格致)'라는 교과목이 있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온 말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규명하여 앎에 이른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과목이 오늘날로 치면 어떤 과목이었을까? 물론 과학이다. science를 칭하는 교과목이었다. '격치'를 비롯해 이학, 지식, 박학, 학술 등 다양한 단어가 science의 번역어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결국 승리하여 남은 것은 '과학'이지만, 사실 누가 살아남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격치'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과 의미상으로 맞닿아 있음은 명백하다. 더군다나 science의 어원인 라틴어 scientia가 넓은 범위의 '앎', '지식' 따위를 의미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science가 '과학'이 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간에 결국 살아남은 것은 '과학'이었다. 아니, 과학이다. 과학은 지금도 살아남아 우리의 사고 중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언어는 사유의 창”이라는 오랜 아이디어를 믿는다. 비록 언어가 전적으로 우리 사고를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인간 사회는 언어로 묶인다. 우리는 언어를 나눔으로써 진리를 논하고, 과학을 이해하며, 삶을 정의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언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았는지 탐구해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사 전공자로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주된 과학 어휘들의 기원을 탐구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사유의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파되었는지, 그 어휘가 우리의 사고 체계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추적한다. 우리는 부족한 사료와 유구한 시간을 넘어 먼 과거의 어휘를 추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에 과학과 관련된 어휘가 새롭게 탄생하고 번역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은 가능하다. 새로운 어휘가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동아시아의 언어와 문화, 개념이 그 수용체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서구의 과학적 개념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과 마주치면서 발생한 마찰을 관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사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사상이 부딪히면서 작금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진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현장이다.

어휘의 패러다임 경쟁을 관찰함으로써
그 어휘가 우리 사고 체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무엇일까? 또 물리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일까? 선문답 같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과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이성과 합리를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共同善)으로 삼은 근대화 과정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것, 주술적인 것보다 과학적인 것,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더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그 '과학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과학의 사전적 정의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과학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서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과학의 본질을 더 정확히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가 무엇을 '과학'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찾아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과학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정의한 것'의 본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과학상의 술어는 우리말로 다 찾아서 적을 수 없고, 다만 서양어 발음 그대로나 한자 발음 그대로 부르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과학 술어란 별것이 아닙니다. 발명한 인명이나 지명을 넣어서 만든 것, 그 물건의 성질과 형상, 동작, 출처, 용도 등을 따라서 만든 것이니, 이같이 그 술어 속에 숨겨진 말의 요소를 살펴보면 우리말이 부족해서 술어를 못 찾을 염려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_이만규, 〈과학 술어와 우리말〉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 용어를 순우리말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던 이만규와 김두봉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묻는다면 과학, 물리, 행성, 공룡과 같은 과학 용어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지만 이들을 두고도 첨예한 패러다임 경쟁이 있었다. 이만규가 말하는 것처럼 과학 용어들 또한 어차피 사람의 손에 의해,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정해진 것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용어는 왜 지금의 형태로 정착되었을까? 이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해당 용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planet을 떠올려보자. 즉시 '행성(行城)'이라는 번역어를 떠올렸다면 한국에서 통용되는 과학 사고 체계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동일한 한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planet의 번역어로 '혹성(惑星)'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일본을 거쳐 여러 과학 용어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혹성'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惑에는 '방황하다', '길을 헤매다' 등의 의미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기보다 '혹하다'의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방황하다'라는 뜻에서 미루어보듯, '혹성'이라는 말 또한 천체가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조어이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행성'과 통하는 데가 있다.
과학 용어가 번역되면서 각 사회에 기존에 존재하던 단어를 수용체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각각의 용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당 용어에 부여하는 본질이다. 즉, 우리 사고의 발로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탐구하는 것은 이러한 경쟁의 과정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서 시작해 메이지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착륙하기까지, 과학 용어들은 부단한 경쟁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이를 통해서 정립되는 것은 단순히 개별 용어의 존재가 아니라,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으며 구축된 현재 우리의 과학적 사고 체계 자체이다.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사유의 틀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유의 틀을 함께 해체하고, 들여다보고자 하는 지적 여정이다.

격치‧궁리‧몬결갈‧사밀‧용왕성‧사충‧공석‧공척…
다른 어휘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각 과학 용어의 경쟁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각 용어는 수많은 대체어와 경쟁해서 살아남았고, 그 과정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또는 단순한 시간적 순서에 따른 선점 효과, 혹은 관제 용어의 채택이라는 다소 불합리해 보이기까지는 결정적 순간이 있기도 했다. 종이 위에 적히는 단어라고 생각하면 지극히 정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경쟁의 과정은 동시에 몹시도 역동적이다. 지금에 와서는 괜한 공상에 불과하겠으나,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이 단어가 살아남았다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중문화 등에서는 '공룡'과 용(dragon)을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dinosaur를 '공룡(恐龍)'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됐을까?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고 있으나 dinosaur의 의미는 영어로 fearfully great, a lizard, 즉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이라는 뜻에 가깝다. 만약 이런 의미를 살렸다면 '공룡' 대신에 '공척(恐蜴)' 혹은 '공석(恐蜥)'이라는 어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도마뱀을 가리키는 한자 '도마뱀 척(蜴)'이나 '도마뱀 석(蜥)' 자에 '두려울 공' 자를 붙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공룡에 대해서 가지는 두려움이나 동경의 감정이 조금은 옅어지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지금 봐서는 그 의미를 쉬이 알아볼 수 없는 스러진 어휘들의 잔재를 들여다보며 과학 용어의 변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과정은 지난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사체를 전시하는 박제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식, 사고의 뿌리를 탐구하는 역동적인 모험이다.

저자

김성근

저자:김성근
대학시절한권의책과맺은인연으로대학원에서과학사·과학철학을전공했다.이후30년간현대문명의뿌리이며우리지성사의가장위대한길잡이가된수많은과학고전을만났다.그고전들이가져다주는희열과감동을더많은이들과나누기위해이책을썼다.현재전남대학교자율전공학부교수로재직중이며,전공은과학사다.
수년연속‘탁월한강의상’‘최우수과목상’을수상한그의강의<과학사의이해>는최근까지도높은경쟁률을기록할만큼여전히인기가높다.학생들은“문과생인데도정말이해하기쉽다”“과학을싫어했는데배울수록재미있는수업”“7학기동안수강한수업중손에꼽는명강의”같은찬사를쏟아내며전공자가아니어도꼭들어봐야할교양수업으로그의강의를꼽는다.
전남대학교에서화학공학을전공한후일본도쿄대학교에서과학기술사로석·박사학위를받았다.도쿄대학교센탄과학기술연구센터와일본학술진흥회에서연구원을지냈고,도쿄오쓰마여자대학교에서강의했다.이후영국케임브리지대학교니덤연구소와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캠퍼스과학기술사연구실에서동서양과학을비교연구했다.《사회속의과학》등을번역했고,근대동서양과학교류에관한수십편의논문을국내외학술지에게재했다.《그림으로읽는서양과학사》를썼다.

목차

추천의말
머리말

01.과학
일본어‘과학科學’은‘분과의학’을의미했다/일본최초의근대철학자니시아마네는science를‘학學’으로번역했다/과학,science의다양한번역어들속에서결국승리하다/‘과학’이처음등장한한국어문헌은1895년유길준의《서유견문》/조선인일본유학생장응진의‘과학’개념/‘과학’이라는어휘가조선사회에대중화되다

02.자연
한자어‘자연自然’의첫출처는노자의《도덕경》/에도시대일본의난학자들은네덜란드어natuur를어떻게번역했나?/19세기에‘자연’이라는한자어는natural이나naturally의번역어로사용되었다/Nature,결국‘자연’을포획하다/한국의전통적‘자연’개념/조선인일본유학생들,‘외적사물의집합’으로서의‘자연’개념을수용하다/‘자연과학’이라는어휘의등장

03.철학
Philosophy를‘철학哲學’으로번역한니시아마네/유학과구별하기위해만든어휘‘철학’/‘철학’이라는번역어에반발한일본지식인들/관제어휘로‘철학’이일본에퍼져나가다/유길준의《서유견문》에나타난‘철학’이라는어휘/철학은과학이상의과학이다/1910년대전후조선에서의신구학문논쟁과‘철학’

04.주관-객관
니시아마네가subjective를차관此觀으로,objective를피관彼觀으로번역하다/니시철학에서주관과객관은왜분리되고말았을까?/니시철학이후의‘주관’과‘객관’/‘객관’이라는신화와과학제국주의/‘주관’과‘객관’은한국에언제들어왔고,어떻게사용되었나?

05.물리학
근대이전에동아시아에서사용된‘물리物理’는‘사물의도리나이치’를뜻했다/‘궁리’라는전대미문의괴사怪事/니시아마네의물리개념/니시아마네의《백학연환》과‘격물학’/메이지정부의과학제도화와‘물리학’이라는어휘/1883년‘물리학역어회’가설립되다/자연과학으로서의‘물리’개념은한국에어떻게수용되었나?/물리학을우리말어휘‘몬결갈’로바꾸자고주장했던김두봉

06.기술
기술은과학과어떻게만나게되었나?/Technology의어원/전통동아시아의‘기술’개념/니시아마네의‘기술’과‘예술’/메이지신정부와근대적산업기술의도입/근대일본어사전에서technology의번역어/산업기술을의미했던유길준의‘기술’개념/한국어사전에보이는technology와art의번역어들/공예,공업,기술,예술의구분

07.과학기술
1940년대일본의전시동원체제하에서등장한‘과학기술’이라는어휘/한국에서먼저등장한‘과학기술’이라는어휘/해방이후한국에서‘과학기술’이라는어휘

08.원자
시즈키다다오의‘속자’와‘진공’/원자를기氣로재해석하다/근대이전의동아시아인들은‘원자’와‘진공’을어떻게번역했나?/최소입자를‘분자’라고번역한19세기일본난학자들/‘원자’라는어휘는누가언제만들었을까?/한국에서‘원자’와‘진공’은언제부터사용되었을까?

09.중력
시즈키의‘구력’은곧중력을의미했다/‘구력’을‘중력’과‘인력’으로바꿔쓰다/메이지시대의‘중력’과‘만유인력’개념/‘중력’은한국에어떻게등장했나?

10.화학
‘화학’이라는어휘는중국에서처음출현했다/‘사밀’이라는일본제번역어의반격/‘화학’이라는중국제어휘가일본에전해지다/니시아마네의‘화학’/끈질기게살아남은어휘‘사밀’/‘화학’은언제어떻게한국에유입되었을까?

11.진화
일본어‘진화’가최초로등장한것은1878년《학예지림》/‘천연’이라는번역어를선택한중국의엔푸/19세기후반일본을휩쓴사회진화론/동아시아근대를뒤흔든어휘‘자연도태’와‘적자생존’/한국에서‘진화’라는어휘

12.전기
한자어‘전기’는중국에서만들어졌다/일본에서네덜란드어elektriciteit는처음에‘그릇’의의미였다/‘전기’라는중국제어휘의일본수입/‘콘센트’라는국적불명의어휘/한국에수입된어휘‘전기’/1887년3월6일경복궁건청궁에전등이점화되다

13.공룡
1842년리처드오언이만든어휘‘dinosaur’/‘공룡’이라는어휘를최초로만든요코야마마타지로/한국인들은언제부터‘공룡’을알게되었을까?

14.행성
한국에서는행성,일본에서는혹성으로부르는이유는?/해왕성은자칫하면‘용왕성’으로불릴뻔했다/한국에서‘행성’은어떻게살아남게되었을까?

15.지동설
‘지동설’이라는어휘의첫출처를찾아서/‘지동설’이라는어휘를처음사용한요시오난코/중국에서의지동설/한국에서‘지동설’이라는어휘

16.속도
아리스토텔레스의《자연학》과‘속도’/‘Speed’와‘velocity’의구분은19세기에이루어졌다/‘운동량’과‘힘’의번역어들/‘속도’라는번역어를처음만든니시아마네/중국에서는velocity를어떻게번역했을까?/한국어문헌에등장한‘속력’과‘속도’

17.신경
중국인들이접한서양의학과‘신경’/신이다니는길=‘신경’이라는어휘를최초로만든스기타겐파쿠/일본에서메이지전후의‘신경’이라는어휘의확산/중국의서양인선교사들이만든어휘‘뇌경’/구한말한국의사전들에서nerve는주로‘힘줄’로번역되었다/‘신경’이라는어휘가등장한최초의한국문헌은《한성순보》

맺음말
주석

출판사 서평

science가‘과학’이되기까지,nature가‘자연’이되기까지
지금우리가‘과학적사고’를할수있게만든
17개과학용어의파란만장한탄생과모험
과학과사상,사고의흐름을거슬러탐구하는지적여정

그렇게‘과학’이시작되었다-
언어가사고를만든다는낭만적인환상과과학사의만남

“사람이언어를사용하지않고본질적으로현실에적응할수있고언어는의사전달이나사고의반영의특정한문제를해결해주는우연한수단이라고생각하는것은환상이다.사실인즉현실세계는상당한정도로그집단의언어습관의기반위에형성이된다.”
_에드워드서피어

우리나라를위시한동아시아에서과거‘오색찬란’하다고묘사되던‘무지개’는기독교사상의영향을받은서구의‘Septcouleursdel'arc-en-ciel’개념과접하면서‘일곱빛깔무지개’가되었다.무지개패러다임의전환이다.한사람의사고가그사람이사용하는언어에지배받는다는대담한언어학적가설은1,000년이상오래전에탄생하여오늘날까지은연중에또다시우리의사고를‘지배’하고있다.관련하여많은논쟁이있었으나이가설을주장한대표적인언어학자인서피어(EdwardSapir)와그제자워프(BenjaminLeeWhorf)가정리한서피어-워프가설은오늘날에는전면적으로받아들여지지는않고있다.언어와사고의지배종속관계나선후관계가증명가능한성질의것이아니라는것때문이다.그러나이가설은현대에도아직완전히부정되지는않은채,언어와사고가서로영향을주고받는다는,어떻게보면다소미적지근한상태로남아있다.기실현대의언어학자가과거를거슬러올라가언어의원형과사회문화의탄생순간을관찰하는것은불가능하다.그러나그순간을관찰할수있는언어가있다.바로‘신조어’와‘번역어’이다.
우리는지금일상을살면서흔히‘과학적’으로사고한다.“??는과학이다”라고말하고,“물리적으로그건불가능해”라고평한다.‘자연’과‘인공’을구분하고,‘과학기술’을통해만들어진현대문명을누린다.‘공룡’이라고말할때티라노사우루스렉스를비롯한다들알법한비슷한생물을떠올린다.‘수금지화목토천해(명)’하며태양계행성의순서를외운다.그런데이러한행동양식은언제부터시작된것일까?언제부터우리는‘과학’이라는단어에‘과학적’인성격을부여했을까?만약우리가조선시대사람과대화하면서‘과학’이라는단어를사용한다면그는같은단어를전혀다르게해석할것이다.‘과학’이science의번역어로정착하기전,과학(科學)은흔히얘기하는과거시험을위한학문,즉과거지학(科擧之學)의준말이었기때문이다.우리나라최초의과학교육기관으로꼽히는원산학사의수업목록을보면‘격치(格致)’라는교과목이있다.이는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온말로,“모든사물의이치를끝까지규명하여앎에이른다”라는뜻을담고있다.이과목이오늘날로치면어떤과목이었을까?물론과학이다.science를칭하는교과목이었다.‘격치’를비롯해이학,지식,박학,학술등다양한단어가science의번역어자리를두고경쟁했다.결국승리하여남은것은‘과학’이지만,사실누가살아남더라도이상하지는않았을것이다.앞서살펴본‘격치’의의미가오늘날우리가말하는‘과학’과의미상으로맞닿아있음은명백하다.더군다나science의어원인라틴어scientia가넓은범위의‘앎’,‘지식’따위를의미했다는것을고려하면오히려science가‘과학’이되었다는것에의문을제기할법도하다.
그러나어찌됐든간에결국살아남은것은‘과학’이었다.아니,과학이다.과학은지금도살아남아우리의사고중많은부분에큰영향을미치고있다.저자는“언어는사유의창”이라는오랜아이디어를믿는다.비록언어가전적으로우리사고를지배하지는않는다고하더라도,우리의생각은언어를통해구체화되고,인간사회는언어로묶인다.우리는언어를나눔으로써진리를논하고,과학을이해하며,삶을정의한다.그러나그토록중요한언어가어떤과정을거쳐서지금의형태로자리잡았는지탐구해본이는그리많지않을것이다.저자는과학사전공자로서우리가현재사용하는주된과학어휘들의기원을탐구한다.우리가‘물려받은’사유의틀이어떻게만들어지고전파되었는지,그어휘가우리의사고체계와세계관을형성하는데어떤영향을미쳤는지추적한다.우리는부족한사료와유구한시간을넘어먼과거의어휘를추적할수는없다.그러나근대에과학과관련된어휘가새롭게탄생하고번역되는과정을살피는것은가능하다.새로운어휘가번역되어들어오면서동아시아의언어와문화,개념이그수용체로활용될수밖에없었음을생각할때,이는서구의과학적개념이동아시아의전통적인사상과마주치면서발생한마찰을관찰하는일이기도하다.그리고이는헤겔이말하는변증법적사유에서이야기하는것과같이,서로다른사상이부딪히면서작금의사고체계가만들어진새로운탄생의과정이기도했다.우리가지금이책에서들여다보고자하는것은바로그현장이다.

어휘의패러다임경쟁을관찰함으로써
그어휘가우리사고체계에서작동하는방식을이해할수있다

과학은무엇일까?또물리란무엇이고,철학은무엇일까?선문답같지만이런질문을받았을때명확하게즉답할수있는사람은그렇게많지않을것이다.우리는일상에서흔히‘과학적’인용어들을사용한다.어떻게보면이는이성과합리를우리사회가추구해야할공동선(共同善)으로삼은근대화과정의결실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감정적인것보다이성적인것,주술적인것보다과학적인것,주관적인것보다객관적인것.그렇다면실제로우리가‘더좋은것’이라고간주하고있는그‘과학적’이라는건무엇일까?과학의사전적정의는쉽게찾아볼수있고,과학적인것이란무엇인지사례를들어서얘기할수도있지만,그보다과학의본질을더정확히탐구할수있는방법이있다.바로우리가무엇을‘과학’이라고말하기시작했는지원점으로돌아가찾아보는것이다.어쩌면이것은과학의본질이라기보다는우리가‘과학이라고정의한것’의본질이라고도말할수있을지도모른다.

“흔히들과학상의술어는우리말로다찾아서적을수없고,다만서양어발음그대로나한자발음그대로부르는수밖에없다고여기는듯합니다.그러나과학술어란별것이아닙니다.발명한인명이나지명을넣어서만든것,그물건의성질과형상,동작,출처,용도등을따라서만든것이니,이같이그술어속에숨겨진말의요소를살펴보면우리말이부족해서술어를못찾을염려는전혀없는것입니다,”
_이만규,〈과학술어와우리말〉

저자는이책에서과학용어를순우리말로대체하는시도를했던이만규와김두봉의사례를이야기한다.지금현대인들에게묻는다면과학,물리,행성,공룡과같은과학용어가‘그렇게’정해져있다고관성적으로받아들이는경우가대부분일것이지만이들을두고도첨예한패러다임경쟁이있었다.이만규가말하는것처럼과학용어들또한어차피사람의손에의해,사람의편의를위해서정해진것일뿐,절대적인기준은없었던것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과학용어는왜지금의형태로정착되었을까?이과정을탐구함으로써해당용어의본질을들여다볼수있는것이다.
가령planet을떠올려보자.즉시‘행성(行城)’이라는번역어를떠올렸다면한국에서통용되는과학사고체계를충실히따르고있는셈이다.동일한한자문화권임에도불구하고일본에서는planet의번역어로‘혹성(惑星)’이라는단어를사용한다.반면일본을거쳐여러과학용어를받아들였음에도불구하고우리나라에서는‘혹성’이라는단어를거의사용하지않는다.일본에서사용하는惑에는‘방황하다’,‘길을헤매다’등의의미가있으나,우리나라에서는그런의미로사용하기보다‘혹하다’의용법으로사용하는것이대부분이기때문이라고도한다.하지만이‘방황하다’라는뜻에서미루어보듯,‘혹성’이라는말또한천체가한군데머물러있지않고움직인다는의미를담아만들어진조어이다.어원을따지고보면‘행성’과통하는데가있다.
과학용어가번역되면서각사회에기존에존재하던단어를수용체로사용하는과정에서조율이이루어진다.이과정을거슬러올라가면각각의용어가만들어지는과정에는저마다나름의이유가있고,까닭이있다.바로그것이우리가해당용어에부여하는본질이다.즉,우리사고의발로이다.저자가이책에서탐구하는것은이러한경쟁의과정이다.17세기과학혁명기에서시작해메이지일본을거쳐한반도에착륙하기까지,과학용어들은부단한경쟁을겪으며지금의모습으로탄생했다.이를통해서정립되는것은단순히개별용어의존재가아니라,과학적패러다임의변화를겪으며구축된현재우리의과학적사고체계자체이다.지금우리가공유하고있는사유의틀이다.이책은그러한사유의틀을함께해체하고,들여다보고자하는지적여정이다.

격치·궁리·몬결갈·사밀·용왕성·사충·공석·공척…
다른어휘가살아남았다면우리는어떤방식으로사고하고있었을까?

저자가이책에서소개하는각과학용어의경쟁과정은결코순조롭지만은않았다.각용어는수많은대체어와경쟁해서살아남았고,그과정은필연이아니라우연또는단순한시간적순서에따른선점효과,혹은관제용어의채택이라는다소불합리해보이기까지는결정적순간이있기도했다.종이위에적히는단어라고생각하면지극히정적이지만,그럼에도이경쟁의과정은동시에몹시도역동적이다.지금에와서는괜한공상에불과하겠으나,이책을읽으면서“만약이단어가살아남았다면-”을생각하게되는것은너무도자연스러운일이다.
과학적으로따지면아무런근거가없음에도불구하고지금대중문화등에서는‘공룡’과용(dragon)을연관지어설명하는경우가종종있다.그런데만약우리가dinosaur를‘공룡(恐龍)’이라고번역하지않았더라도그렇게됐을까?자세한내용은저자가책에서소개하고있으나dinosaur의의미는영어로fearfullygreat,alizard,즉‘무서울정도로,큰도마뱀’이라는뜻에가깝다.만약이런의미를살렸다면‘공룡’대신에‘공척(恐?)’혹은‘공석(恐?)’이라는어휘가살아남았을가능성이크다.도마뱀을가리키는한자‘도마뱀척(?)’이나‘도마뱀석(?)’자에‘두려울공’자를붙인것이다.만약그렇게되었다면지금우리가공룡에대해서가지는두려움이나동경의감정이조금은옅어지지않았을까?
저자는이책에서지금봐서는그의미를쉬이알아볼수없는스러진어휘들의잔재를들여다보며과학용어의변천을거슬러올라간다.그과정은지난하지만결코지루하지는않다.이는단순히언어의사체를전시하는박제가아니라우리가공유하고있는인식,사고의뿌리를탐구하는역동적인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