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밭 걷기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안희연 시집)

$12.00
Description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굉장한 것
빛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겠다는 의지와 다짐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안희연 신작 시집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슬픔도 결핍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섬세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안희연 시인, 그의 네번째 시집 『당근밭 걷기』가 문학동네시인선 214번으로 출간되었다.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안희연은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와 이어진 두 권의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현대문학, 2019)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을 통해 동료들에게 “한 손에는 미학, 한 손에는 깊이를 포획”(시인 이원)하고자 하는 시인이며, “깨달음의 우화와도 같은” 시편들을 통해 “기어이 어떤 연약한 강인함에 가닿는다”(시인 이제니)는 미더운 평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여름 언덕’에서 내려와 ‘당근밭’을 걸으며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신비와 여분의 희망을 건져올리려 애쓴 시인의 지난 4년을 담고 있다.
저자

안희연

저자:안희연
2012년창비신인시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너의슬픔이끼어들때』『밤이라고부르는것들속에는』『여름언덕에서배운것』이있다.신동엽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굳은모양을보면
밤가위/발광체/간섭/갈망/코트룸/격불(擊拂)/예언/터트리기/썰물/소등구간/청음실/당근밭걷기/긍휼의뜻

2부비를맞을땐비를맞아야지
밤의석조전/떨기나무아래/글라이더/나의시드볼트/립살리스레인/토끼굴/초령목/자귀/가는잎향유/율마/변화하는새의형태/하나의새를공유하는사람들/청귤/밀물

3부너는나의가장무른부분
본섬/단차/진앙/토끼연주/북극진동/기록기/겨울의행방을물으신다면/망각은산책한다/북치는소년/확대경/파동과경로/정거장에서의대화/구스베리구스베리익어가네/부록씨삶으로데려오기/점등구간

4부느리게오는아침을맞아요
각인/조각공원/물색/물결의시작/수진의기억/관제탑과는연락이끊긴지오래되었고/호재/둘레석/독안에/야광운/반건조살구/청혼/파랑/미결/동률/굉장한삶

해설|슬픔의모양과사랑의모양_이재원(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가위는가로지르는도구다.가위는하나였던세계를둘로나누고영원한밤의골짜기를만들고한사람을절벽에세워두고목소리를듣게한다.발아래,당신의발아래내가있으니그냥돌아가지말아요.

절벽을떠나지못하는사람에게도가위는있다.그는밤가위로밤을깎는다.밤의껍질은보기보다단단하다.밤으로부터밤을구하려면밤도감수해야한다.피부가사라지는고통을.그래도조각나지는않는다.밤가위는밤의둘레를천천히걸어하나의접시에당도한다.당신앞에생밤의시간이열릴때까지.

당신발밑으로이유없이새한마리가떨어진다면제가보낸슬픔인줄아세요.저는아직절벽을떠나지않았습니다.
_「밤가위」전문

서시자리에놓인이작품은안희연시인이이번시집에서주목하고있는것을잘보여준다.“영원한밤의골짜기”속“절벽”에세워진다해도,“생밤의시간이열릴때까지”천천히나아가보겠다는태도.낮과밤을가로질러세계를이등분할만큼의위력은없어도“피부가사라지는고통을”감수할의지와각오로손에들린가위를써보겠다는간절함이엿보인다.그런화자의눈에들어온것은‘돌’이다.“어디서굴러온돌일까.쥐어보니온기가남아있다.”처음엔“가엾은돌”이라생각했다.하나였으니까.그러나곧이어굴러온또다른돌.“거듭해서말해져야하는이야기가있다면”이돌들은“간곡한돌”이된다.점차“무거운돌”이되었다가“무서운돌”이되기도하고,“굉음을내며무너져내”릴만큼쏟아지는돌은“모르는돌”이자“무한한돌”.이쯤되면“틀림없이이유가있을것이다”.“돌의의지”(이상「발광체」)를들여다보는것,시인이해야할일이다.
그러기위해안희연의화자는“돌을태운다”(「간섭」).『당근밭걷기』의1부는이렇듯삶과세계에적극적으로질문을던지고들여다보려는,몸과마음을다하려는태도가두드러진다.“굳은모양을보면/어떻게슬퍼했는지가보인다/어떻게참아냈는지가”(같은시).그러므로“매일의디테일로맞서는/최선의사람”(「썰물」)은“여기서부터저기까지가모두나의땅이라했”을때“그게뭐든무해한것”을심고자한다.“눈을감았다뜨면,무언가자라기시작하고”‘나’는“기르는사람이된다”.그‘당근밭’에는이제“비로소시작되는긴이야기”가생겨나리라(이상「당근밭걷기」).
지난시집‘시인의말’에서안희연은“나는평생이런노래밖에는부르지못할것이고,이제나는그것이조금도슬프지않다”고말했다.이번시집에이어진“담대한척고백해놓고/조금은슬펐”다는혼잣말,“단박에알아”본,“너”라는존재는그러므로더귀하다.“백지앞에서마음이한없이캄캄해질때/너는등뒤에집채만한나무그림자를매달고나타나/나의이야기를들어”준다.

그때알았네
한사람을구하는일은
한사람안에포개진두사람을구하는일이라는거
_「긍휼의뜻」에서

“걸고쓰느라부서진마음알아봐주는/단한사람”을생각하는것,“서로의목격자가되어주”는것이“우리의임무”라는것을깨달은안희연의화자는이제“서글픔농담”을하고도“싱긋웃”을수있다.(이상「긍휼의뜻」)
2부에는‘식물-화자’가인상적인시편들이묶여있다.“내가볼때/너도보았겠지”(「자귀」)로요약할수있을,‘인물’과‘식물-비인간존재’의관계맺기.

안희연의이번시집에서‘시선’은그것의한계에도불구하고존재와의교류를가능하게하는중요한방법으로제시된다.(…)이시들이마주보려는곳에는사람만이아니라,자신의살아있음을말할수없어서저절로망각된존재들이있다.이들과마주보기위해서는눈앞의존재를나를바라볼수있는자로,즉눈을가진자로받아들여야한다.그를주체로받아들일때그역시나를바라보는순간이,일방적시선의한계가사라지는잠깐의시간이찾아온다.이때비대칭적이던인간-비인간사이의관계는대등하게재설정되고,그로부터‘존재’는새롭게경험된다.분리된줄알았지만실은이어져있다는발견속에서,삶은‘함께있음’의감각으로다시경험되는것이다._이재원,해설에서

폭포처럼,빗줄기처럼쏟아지는모양새를하고는“위아래가뒤바뀐삶도있다고/뻗치고헝클어지는게일이라고”그러면서“당신안에도나있지요?”(「립살리스레인」)‘나’에게말을거는행잉플랜트가있고,“그의잠을지키는일”에몰두하고“슬픔이작동하는회로를아는사이/나는그것을가족이라부”(「율마」)르는식물이있다.‘식물-화자’는기다릴줄안다.“한존재를안다고말하기까지/매일매일건너왔고//건너왔다는건/두번다시는이전으로돌아갈수없다는뜻”이라는것을알기때문이다.이제“잎이떨어지는순간마다”‘나’의귀도아파온다(「자귀」).‘식물-화자’와‘나’는통상의위치를뒤바꾸어소통하며“멀리서보기만할생각이었는데겪고있”음을깨닫는다.
죽음과상실의시편들로채워진3부‘너는나의가장무른부분’은물론가슴아프다.“우주의균형을맞추는저울은/너를덜어내고무엇을얻었을까”(「진앙」)따져묻고싶다.“한사람을떠나보내는우주의마지막인사였음을/그때는알지못했”(「북극진동」)던스스로를원망하기도하고,“자꾸그렇게자신을잊으려하지말”(「기록기」)라고,깨어나라고애원하기도한다.그렇지만‘나’는앞선2부의“죽지마살아있어줘”라는“조약돌같은말”(「자귀」)을손에쥔채“검정의세부를새롭게색칠해보기로한다//깨진마음을/여기산처럼쌓아두고”(「파동과경로」).“나를이곳에보낸숲의정령을상상하며걸을때면/그어떤방지턱도부드럽게넘었”(「점등구간」)음을기억하며.
그렇게마주한4부‘느리게오는아침을맞아요’에는안희연의절박하면서도단단한마음이고스란히담겼다.눈물방울에서느껴지는반짝임같은시편들.출간전편집자와의인터뷰에서그는“삶은굉장하다고,상상이상의반짝임과일렁임으로가득하다고,그러니반드시살아있어달라고.우리는누구나존재의초과와부족을경험할수밖에없고그여파는무척거셀테지만,그럼에도그중압감에매몰되지말고생의감각,생의의지를일깨우고싶다는염원이그어느때보다강했던시기였”다고강조해말했다.

내안에든것이누구의심장인지는몰라도
삶은내가그안에속해있기를원한다
내가있어서시작되는이야기를듣고싶어한다
_「물결의시작」에서

“절대로,도무지,결단코,기어이,마침내,결국……/그런말들은다독여재우고”(「야광운」)“깨버리면그만일독이더라도/연두를밀어올리려는발걸음”(「독안에」)이되겠다는다짐.포기하는것도나빠지는것도쉽겠지만그렇게하지않겠다는,삶속에,‘독안에’있겠다는‘나’의다짐이우리에게겸허한마음을갖게한다.삶은알수없는것투성이고그중엔힘겹고가혹한것도많다.다정하고좋은것은거의다잊힌게아닐까싶은순간들이우리를흔들어놓는다.안희연은‘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손을이끌어빛쪽으로간다.‘우리/나-너’와우리안의그것을모두구하러함께가자고말하며.

신비로워,딱따구리의부리
쌀을세는단위가하필‘톨’인이유
잔물결이라는말

솥안에무엇이들었는지는모른다
다만신기를신비로바꿔말하는연습을하며솥을지킨다
떠나지않는사람이된다는것
내겐그것이중요하다
_「굉장한삶」에서

안희연시인과의미니인터뷰

1.4년만의신작시집입니다.저에게이번시집은‘빛쪽으로가기’‘구하기’‘포기하지않기’‘계속걷기’를다짐하는시집으로읽혔는데요,시들을정리하며어떤생각을많이하셨을지궁금합니다.

여름언덕에서내려와이제어디로가야하나눈앞이캄캄했습니다.몰두했던한세계로부터빠져나와다시태어난기분이들었는데,그다음행선지를모르겠더라고요.그래도일단걸었습니다.목적지를상정하기보다는‘걷기’자체에집중하면서요.그렇게4년이흘렀습니다.무감해지지않으려고애쓰며,계절이남긴것들을한다발로묶고나니오늘이네요.꽃없는꽃다발을들고어둠속에서있는기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이번시집에수록된시를쓰는동안너무많은사람들을잃었어요.스스로삶을져버린경우가많았고요.그래서저로서는무척절박했던것같아요.삶은굉장하다고,상상이상의반짝임과일렁임으로가득하다고,그러니반드시살아있어달라고.우리는누구나존재의초과와부족을경험할수밖에없고그여파는무척거셀테지만,그럼에도그중압감에매몰되지말고생의감각,생의의지를일깨우고싶다는염원이그어느때보다강했던시기였어요.그러려면제가단단해져야했습니다.밧줄을잡아당기려면악력을키워야했어요.한사람은어떻게두사람인가.너를구하는일이왜나를구하는일인가.이문장들을부적처럼붙들고있었습니다.

2.제목인‘당근밭걷기’가인상적입니다.이제목을고른이유와,이제목이어떻게읽히기를바라시는지궁금합니다.

여름언덕지나이제는당근밭을걷는다는,이전시집과의연결성이우선좋았습니다.읽었을때공간이열리는제목이라는게좋았어요.왜하필당근이냐묻는다면,만일당신영혼의채소(?)가푸성귀라면,‘푸성귀밭걷기’로고쳐읽어도무관하다는말씀을드리고싶어요.그말인즉,중요한건당근이아니라이세계가애정을가지고길러낸것이있다는사실이에요.소유했는지도모르는땅이당신에게있다는것,그곳에서무언가자라고있다는것,피가돌고있다는것……그것을실감할때가삶의인력이강하게작용할때가아닐까생각합니다.
물론,제게는꼭당근이어야할이유가있었어요.흙묻은당근을보면마음이슬프면서도좋아요.색도매력적이고,무르지않고단단하다는점도닮고싶죠.자라느라얼마나어두웠을까.나의식탁에도착하기까지몇겹의시간을건너왔을까.당근이지닌우주적기운을느낄때면이루말할수없이뭉클해집니다.제가얼마나커다란흐름속에자리해있는지를깨닫게돼요.

3.시속에여러식물과열매가등장합니다.돌과새,물과불도눈에띄고요.작가님의마음을흔드는존재들에대해들려주세요.

생명을지닌모든것은애틋합니다.내가볼때,나를보는것들이있어요.내가보려하지않아도계속나를지켜봐주는것들이요.제게는특히나무나돌이그런존재로인식됩니다.나무나돌은공장에서찍어낼수없잖아요.비슷한모양은있을수있어도똑같은모양은하나도없죠.죽은것처럼보여도살아있고,말없이도말하고,이목구비없이도표정을지을줄알죠.그런점이저를계속상상으로이끄는것같아요.
특히시집2부에식물시편들을연달아배치하면서하나의큰흐름이만들어지기를바랐는데요,가끔은인간이주지못하는위로를나무나돌이줄때가있다는생각을합니다.그것들은제안에서물결을만듭니다.계속시를쓰게만들어요.

4.수록작중유독마음에남는시가있으실까요?그이유도들려주세요.

시집마지막에자리한「굉장한삶」이라는시를꼽고싶네요.시집제목으로도고려했을만큼마음이가는시입니다.시에등장하는‘신기’와‘신비’는언뜻보기에비슷한단어같지만생각해보면무척달라요.무언가를신기하다고말할때는팔짱을끼고멀찌감치서있지만무언가를신비롭다고말할때는상체를기울여그안을들여다보게됩니다.삶은신기한걸까요,신비한걸까요?저는우리가삶을향해상체를기울여봤으면좋겠어요.거기뭐가있는지봐야죠.생각보다굉장한것이숨어있을지도모르니까.

5.이시집을읽을독자들께인사한말씀부탁드려요.

제가썼지만,이제부터의시는제것이아니에요.바통을넘깁니다.제가계속써내려가는이유는저기저반대편에서,제시를만나러와줄당신삶의구체성과진실성을믿기때문입니다.각자의속도로각자의궤도를떠돌던우리가어느순간포개진다면,그건모두시의일.그것보세요,당신과내가시의복판에서만났잖아요.이보다굉장한일이어디있겠어요?

시인의말

나는너의왼팔을가져다엉터리한의사처럼진맥을짚는다.나는이소리가세상에서가장슬픈것같아.이소리는후시녹음도할수없거든.그러니까계속걷자.당근의비밀을함께듣자.펼쳐진것과펼쳐질것들사이에서,물잔을건네는마음으로.

2024년6월
안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