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견시집주 2 (양장본 Hardcover)

황정견시집주 2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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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송시다운 시가 시대, 그 중심에 있던 황정견
송나라는 개국(開國) 왕조인 태조부터 인종조(仁宗朝)를 거치면서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장기간 혼란했던 국면이 정리되어 나라가 안정되었고, 백성들의 생활환경 또한 비교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전대(前代)의 가혹했던 정세가 완화됨에 따라 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고, 안정된 농업의 경제적 기초 위에서 상공업이 번창하고, 번화한 도시가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전대에 비해 상당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 전체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단조로운 것보다 복잡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시대적·사회적 환경은 곧 문학 출현의 배경이고, 문학은 사회생활이 반영된 예술이라고 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유협(劉勰)이 “문학의 변천은 사회 정황에 따르다[文變染乎世情, 興廢繫乎時序]”고 한 것처럼, 사회의 각종 요인은 문학적 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문학 풍조의 변혁을 동반한다. 송초 시체(詩體)의 변천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특히 송대에는 일찍부터 학문이 중시되었다. 이는 주로 군주들의 독서열과 학문 제창으로 하나의 사회적 풍조로 자리 잡게 되어 송대의 중문중학(重文重學)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황정견은 바로 이때 전성기를 구가하여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중국시가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대(唐代)를 뒤이어 등장한 북송의 시인들에게는 당시에서 벗어난 송시만의 특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 있었다. 이러한 숙명은 북송 초 서곤체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북송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송시다운 시가 시대를 풍미하기에 이르렀다. 황정견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저자

황정견

북송(北宋)을대표하는시인

목차

해제
황진시집주서

황정견시집주
산곡시집주
산곡시집주권제사(山谷詩集注卷第四)
1.장문잠이무구에게준작품의말미에‘이미군자를만났으니,어찌기쁘지않으리오([旣見君子云胡不喜])’로운자삼은것을많이보고서받들어화답하다(奉和文潛贈无咎篇末多以見及以旣見君子云胡不喜爲韻)
2.차운하여형돈부에게답하다(次韻答邢惇夫)
3.현동부의추회에화운하다.10수(邢惇夫秋懷.十首)
4.사공정이이범의「추회오수」에화답하면서나를불러함께지었다(謝公定和二范秋懷五首邀予同作)
5.경릉의주부가된사공정을전송하다(送謝公定作竟陵主簿)
6.사공정과영자옹이적원규와손소술의시에대하여논한장운에받들어화답하다(奉答謝公定與榮子邕論狄元規孫少述詩長韻)
7.장숙화를보내며주다(贈送張叔和)
8.하동으로부임하는고자돈을전송하다.3수(送顧子敦赴河東.三首)

산곡시집주권제오(山谷詩集注卷第五)
1.사마문정공만사.4수(司馬文正公挽詞四首)
2.자첨의「무창서산」에차운하다(次韻子瞻武昌西山)
3.자첨의시구가한시대에으뜸인데이에‘정견의시체를모방한다’고하였는데,대개한퇴지가맹교와번종사의시체를장남삼아본받은것과비슷하니글로웃겨보려는것이다.그러나후생이제대로알지못할까봐차운하여실상을말한다.(자첨이양맹용을전송하는시에서“우리집은아미산북쪽으로그대와같은고을이네”라한작품이바로이시의운자이다)(子瞻詩句妙一世,乃云效庭堅體.蓋退之戲效孟郊樊宗師之比,以文滑稽耳.恐後生不解,故次韻道之(子瞻送楊孟容詩云,我家峩眉陰與子同一邦,卽此韻)
4.전여유굉은자첨의사위이다.그재덕이매우아름다워학문에뜻을두었다.그러므로‘도리불언하자성혜’여덟글자로시를지어주었다(柳閎展如子瞻甥也.其才徳甚美,有意於學,故以桃李不言下自成蹊八字,作詩贈之)
5.장난삼아납매를읊다.2수(戲詠蠟梅.二首)
6.납매(蠟梅)
7.장중모에게납매를달라고요청하다(從張仲謀乞蠟梅)
8.가천석이보배로운향기를보내주면서시를지어달라고하기에내가‘화려한창든병사들의호위삼엄한데,연회열린방에맑은향이어렸네[兵衛森畫㦸燕寢凝淸香]’열글자로시를지어보답하였다(賈天錫惠寳薰乞詩,予以兵衛森畫㦸燕寢凝淸香十字,作詩報之)
9.장중모의「과포지사재」에차운하다(次韻張仲謀過酺池寺齋)

산곡시집주권제육(山谷詩集注卷第六)
1.상보가14운의「정묘설」을보여주기에삼가같은운을써서지었다(常父惠示丁卯雪十四韻謹同韻賦之)
2.눈을읊어서광평공에게바치다【송영조이다】(詠雪奉呈廣平公【宋盈祖】)
3.송무종이감천방에세살면서눈내린뒤에감회를읊은시에차운하다(次韻宋懋宗僦居甘泉坊雪後書懷)
4.자첨이자유와상보의「억관중고사」에화운한시에화답하다(和答子瞻和子由常父憶館中故事)
5.쌍정차를자첨에게보내다(雙井茶送子瞻)
6.자첨에게화운하여답하다(和答子瞻)
7.자첨이자하와구명으로희롱하기에에오라지다시희롱으로답하다(子瞻以子夏丘明見戱聊復戯答)
8.성안에서차를끓이다가자첨이그리워앞의운자를써서짓다(省中烹茶懷子瞻用前韻)
9.쌍정차를공상보에게보내다(以雙井茶送孔常父)
10.상보의답시에“차끓일때녹주가번거로울것이다[煎㸃徑須煩綠珠]”는구가있는데,다시차운하면서희롱하며답하다(常父答詩有煎㸃徑須煩綠珠之句復次韻戯答)
11.장난스레공의보에게올리다(戲呈孔毅父)
12.사업황종선이혜산의샘물을보내준것에사례하다【종선의이름은‘강(降)’이다.다른이름은‘은(隱)’이다】(謝黃從善司業寄惠山泉【從善名䧏,一名隱】)
13.유경문이하상에서보낸시에차운하여화답하다(次韻奉酬劉景文河上見寄)
14.여러사람들이「도미시」에창화하는것을보고나도곧바로차운하여장난스레읊었다(見諸人唱和酴醿詩輒次韻戲詠)
15.진구가진무기가머물던서원을지나가다가내가지은시구를보고지은시에차운하다(次韻秦覯過陳無己書院觀鄙句之作)
16.진류저자의은자【서문을함께싣다】(陳留市隱【并序】)
17.조보지와장뢰가진구의오언에화답하기에나도또한그시에차운하였다(晁張和答秦覯五言予亦次韻)
18.유회숙의조하의푸른돌벼루를읊다(劉晦叔洮河綠石硏)
19.단차와조주녹석벼루를무구와문잠이주고받다(以團茶洮州綠石硯贈無咎文潛)
20.왕중지가조주의숫돌과도장재료인황옥을보내주어사례하다【중지의이름은흠신이다】(謝王仲至惠洮州礪石黃玉印材【仲至名欽臣】)
21.문잠이왕사인과함께기원(淇園)에서노닐며지은시에차운하다【왕사인의이름은역이며자는재원이다】(次韻文潛同遊王舍人園【王舍人名棫,字才元】)
22.도헌에누워【원주에서“조무구를위해서지었다”라고했다】(臥陶軒【元注云,爲晁無咎作】)
23.조이도의시에차운하여보내다【이도의이름은열지로제북사람이다】(次韻寄晁以道【以道名說之,濟北人】)
24.이도의운자에차운하여자이와자묵에게보내다【정평,정사다.두범씨는문정공의후손이다】(次以道韻寄范子夷子黙【正平正思.二范,蓋文正公諸孫】)
25.승려경선이방문하였기에시를지어법왕항선사에게보내다(僧景宣相訪寄法王航禪師)
26.자첨이하북도운고자돈은전송하며지은시에차운하다.2수(次韻子瞻送顧子敦河北都運.二首)
27.자효사의자돈을전별하는자리에서공경보와함께짓다(慈孝寺餞子敦席上奉同孔經父八韻)
28.급사장창언의「희우」에차운하다(次韻張昌言給事喜雨)

산곡시집주권제칠(山谷詩集注卷第七)
1.이덕소가서성으로돌아가는것을전송하다(送李徳素歸舒城)
2.이백시가한간의삼마도를모사한것을읊어서자유소철(蘇轍)의시에차운하여이백시에게편지삼아보내고겸하여이덕소에게보내다(詠李伯時摹韓幹三馬次蘇子由韻簡伯時兼寄李德素)
3.자첨소식이자유소철의「한간의삼마도를보고서이백시가천마를그린것을논함」에화답한것에차운하여짓다(次韻子瞻和子由觀韓幹馬因論伯時畫天馬)
4.차운하여왕신중에답하다(次韻答王眘中)
5.자첨소식이작년봄에이영을시립했고자유소철이가을과겨울사이에이어서조정으로들어갔는데각자의소회를시로쓴것에나또한차운하다.4수(子瞻去歳春侍立邇英子由秋冬間相繼入侍作詩各述所懷予亦次韻.四首)
6.재차차운하다.4수(再次韻.四首)
7.자첨소식의「곽희가산을그린것에쓰다」에차운하다(次韻子瞻題郭熙畫山)
8.곽희의산수화부채에쓰다(題郭熙山水扇)
9.혜숭의그림부채에쓰다(題惠崇畫扇)
10.정방의화집에쓰다.5수(題鄭防畫夾五首)
11.열마리참새가날벌레를잡는그림부채에장난삼아쓰다(戲題十雀捕飛蟲畫扇)
12.공작그림에쓰다(題畫孔雀)
13.잠자는오리(睡鴨)
14.작은오리(小鴨)
15.유장군의기러기를노래하다.2수(題劉將軍鴈.二首)
16.유장군의거위를노래하다(題劉將軍鵝)
17.조이도의기러기그림에쓰다(題晁以道雪鴈圖)
18.자첨소식이粥자의운으로쓴「허물없이여가의대나무그림을얻어그것에쓰다」에차운하여人자운으로장난삼아놀리며대나무를읊다(次韻子瞻題無咎所得與可竹二首粥字韻戲嘲無咎人字韻詠竹)
19.문잠이휴가가서나오지않은것을읊은시에차운하다.2수(次韻文潜休沐不出.二首)
20.소식의운을받들어지어정국에게부치다(奉同子瞻韻寄定國)
21.왕정국이양주에서보낸시의운을빌어짓다(次韻王定國揚州見寄)
22.지난해「과광릉치조춘」시를지어“봄바람이십리의주렴을걷게한것은,마치두목의삼생인듯하네.작약가지끝에작은꽃망울피고,양주의풍물은이와같은데귀밑머리는실을이루었네”라고하였는데,이번봄에회남에서온사람이양주의일을이야기하기에재미삼아이전시의운으로시를지어정국에게부치다.2수(徃歳“過廣陵値早春”嘗作詩云,“春風十里珠簾卷,髣髴三生杜牧之.紅藥梢頭初繭栗,揚州風物鬢成絲”今春有自淮南來者道揚州事,戲以前韻/寄王定國.二首)
23.전목보의「고려의송선을주자」시를차운하다(次韻錢穆父贈松扇)
24.문잠장뢰의「전목보가고려의송선을보내준데대해사례하는시」에재미삼아화답하다(戲和文潜謝穆父松扇戲和文潜謝穆父松扇)
25.정굉중이고려의화선을보내준데대해사례하다.2수(謝鄭閎中惠高麗畫扇.二首)

출판사 서평

후대까지영향을미친황정견의시론

황정견은시를지을때시의표현을다지고시법을엄격히지켜한마디한글자도가벼이쓰지않았다.황정견은수많은대가들을본받으려고했지만,그중에서도두보(杜甫)를가장존중했다.황정견은두보시의예술적인성취나사회시(社會詩)같은내용측면에서의계승보다는,엄정한시율과교묘(巧妙)한표현등시의형식적측면을본받으려했다.황정견시론의요점을정리하면대략다음과같다.
첫째,시의조구법(造句法)으로서의환골법(換骨法)과탈태법(奪胎法)이다.이에대해황정견은“시의의미는무궁한데사람의재주는한계가있다.한계가있는재주로무궁한의미를좇으려고하니,비록도잠과두보라고하더라도공교롭기어렵다.원시의의미를바꾸지않고그시어를짓는것을환골법이라고하고,원시의의미를본떠서형용하는것을탈태법이라고한다[詩意無窮,而人才有限.以有限之才,追無窮之意,雖淵明少陵,不得工也.不易其意而造其語,謂之換骨法.規摹其意而形容之,謂之奪胎法]”(『시인옥설(詩人玉屑)』)라고한바있다.이로보건대,황정견이언급한환골법은의경을유사하게하면서어휘만조금바꾼것을일컫고,탈태법은의경을변형하여사용하는방법이라고할수있다.
둘째,진부한표현이나속된말을배척하고특이한말과기이한표현을추구했다.구체적으로는술어를중심으로평이한글자를기이하게단련(鍛鍊)시켰고조자(助字)의사용에힘을특히기울였으며,매우궁벽하고어려운글자를사용했고기이한풍격을형성하기위해전대(前代)시에서잘쓰지않던비속(非俗)한표현을시어로구사하여참신한의경을만들어내곤했다.
셋째,전고(典故)의정밀한사용을추구했다.이는황정견시론의“한글자도유래가없는것은없다[無一字無來處]”와연관된다.강서시파는독서를중시했는데,이것은구법의차원에서전대시의장점을수용하기위한것이지만,이는전고의교묘(巧妙)한활용이라는결과로표현되기도했다.그러면서전인의전고를그대로답습하지않고자신의의도에맞게변용했다.
이와같은황정견의창작법에대해부정적평가도적지않다.그러나이러한부정적평가는황정견시의파급력에대한반증이기도하다.황정견을중심으로한강서시파가당대(當代)는물론후대및조선의문인들에도적지않은영향을미쳤기때문이다.

황정견의시를세밀히소개하다

황정견은현존하는가장공신력있는중화서국(中華書局)본에따르면총1,916수의시작품을남겼다.북경(北京)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2007년에출간한전5책의『황정견시집주』에는총1,260제(題)1,916수(首)의시작품이수록되어있다.황정견작품의구절및시어(詩語)하나하나가갖는전례와창작배경그리고구절의의미및전체적인의미를상세하게주석을통해소개해,황정견작품의세밀한이해를돕고있다.이책에서는『황정견시집주』에소개된모든주석을꼼꼼하게번역하였으며,주석의내용을시의자구(字句)해석에최대한반영하고자노력하였다.그러나황정견시가워낙난해하여,경우에따라서는주석이시본문과어떤연계성이있는지조차이해가되지않는부분도있었다.이러한경우에도연결관계를최대한찾아시본문번역에녹여내고자노력하였다.
황정견에대한연구는지금까지꾸준히진행되어왔다.그러나아직까지황정견시작품에대한전체적인번역이이루어지지않았기에,구체적인실상의일면만을위주로하거나혹은피상적으로연구가진행되었다는점에서아쉬움이남는다.이에상세한주석을통해작품에대한이해를돕는『황정견시집주』에대한완역은,부족하나마후학들에게황정견시를이해하기위한초석을다지는역할을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