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scription
기뻐하는 법 슬퍼하는 법 사랑하는 대상과 말 통하는 법
“세 번의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하며 지낸 3년의 시간은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그러나 힘겨운 투병을 하고 있던 나에게 남편의 책 읽는 소리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자주 입원하는 병원에서도 커튼을 닫고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책을 읽었다.” 그땐 실감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3자가 보니 모든 게 기적이다. 같이 방을 쓰는 사람이 조용히 잠 좀 잡시다, 라고 하지 않는 것도, TV를 켜지 않는 것도 하나님 가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진화한다면 지략적인 부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부문일 것이다. 그만큼 진화해야 할 여지가 있다. 기뻐하는 법, 슬퍼하는 법, 감사하는 법, 사랑하는 것들과 말을 통하는 법, 행복을 느끼는 법 등등. 화자는 이 부문에 특화된 사람이다. 타고났다.
인간 진화의 방향은 우울하기 쉽게가 아니라 행복하기 쉽게여야 한다. 작가는 혼자 가만두면 지루해하지 않고 행복해질 사람이다. 진화족(進化族)임에 틀림없다. 그 진화족이 후회를 한다. 라깡이 말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고. 가장 이성적이라던 독일 민족이 어떻게 열렬한 나치당원이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릭 프롬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선언 이후 결정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 곧 본인이 되면서 그 책무를 감당할 수 없어 판단의 주체를 예전 신의 자리에 국가를 세운 것이라 했다. 모든 결정과 판단을 신에 맡기고 오직 믿기만 했던 중세가 얼마나 좋았던가! 하고 그때로 돌아갔던 것이다.
항상 웃으며 행복한 척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내 마음이 유리그릇이었나보다. 돌이켜보면 그 그릇조차도 내가 만든 것이다. 성인군자도 아니면서 다 짊어지려고 했던 오만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유리그릇.
-「유리그릇」 중에서
“다 짊어지려 했던” 걸 오만과 비겁함이라 했다. 이 말만 가지고 토론해도 하룻밤은 새워야 할 것이다. 자신을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이라 한 것도 이 작가의 내공의 깊고 단단함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나름 처방전이다.
이제 기쁨도 슬픔도 힘겨움도 나누면서 살아야겠다. 혼자서 짊어지겠다고 하는 위선에서 벗어나야겠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또 후회할지 모르지만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자책보다는 위로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유리그릇」 중에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와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한다.
비록 유리그릇이지만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잘 버텨준 나의 그릇에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에게 도전장을 던져보려 한다. 마음의 유리그릇을 미련없이 깨뜨리겠다고. 내 몸이 강화유리처럼 단단해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유리그릇」 중에서
행여 깨질까 조심조심하며 지켜온 유리그릇을 이젠 부러 깨부수겠다는 새로운 다짐에 필자는 깜짝 놀란다. 그게 오만과 비겁이라 말할 때 그건 언젠가 스스로 깨부수고 넘어야 할 장벽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부가 이 정도의 역경을 겪었으니, 역경은 이제 그만! 일 것 같았다. 한 개인이 겪은 고난은 쿼터제여서 일정량 이상은 겪지 않게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공정하지. 그럴 리가 있나? 하느님이 공정하다고 어디 쓰여있기라도 하나? 공정이란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찾아낸 인간사회 규약이다. 하느님은 패던 놈만 패는 분 아니던가? 이런 부당함을 인간이 보다보다 더는 볼 수 없어서 찾아낸 규약이 공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광풍이 수그러들면서 정작 중증 환자들이 늘어가던 때, 화자는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았다. 우린 코로나가 끝물이고, 워낙 신경을 쓰는 상황이라 큰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구급차로 실려 간 대학병원에서 결국은 환자의 모든 의무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던 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고,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며, 하루에 한 번씩 병실 간호사의 브리핑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 부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했다.
호모사피엔스가 진화한다면 지략적인 부문이 아니라 감성적인 부문일 것이다. 그만큼 진화해야 할 여지가 있다. 기뻐하는 법, 슬퍼하는 법, 감사하는 법, 사랑하는 것들과 말을 통하는 법, 행복을 느끼는 법 등등. 화자는 이 부문에 특화된 사람이다. 타고났다.
인간 진화의 방향은 우울하기 쉽게가 아니라 행복하기 쉽게여야 한다. 작가는 혼자 가만두면 지루해하지 않고 행복해질 사람이다. 진화족(進化族)임에 틀림없다. 그 진화족이 후회를 한다. 라깡이 말했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고. 가장 이성적이라던 독일 민족이 어떻게 열렬한 나치당원이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릭 프롬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선언 이후 결정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인간 곧 본인이 되면서 그 책무를 감당할 수 없어 판단의 주체를 예전 신의 자리에 국가를 세운 것이라 했다. 모든 결정과 판단을 신에 맡기고 오직 믿기만 했던 중세가 얼마나 좋았던가! 하고 그때로 돌아갔던 것이다.
항상 웃으며 행복한 척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내 마음이 유리그릇이었나보다. 돌이켜보면 그 그릇조차도 내가 만든 것이다. 성인군자도 아니면서 다 짊어지려고 했던 오만과 비겁함으로 얼룩진 유리그릇.
-「유리그릇」 중에서
“다 짊어지려 했던” 걸 오만과 비겁함이라 했다. 이 말만 가지고 토론해도 하룻밤은 새워야 할 것이다. 자신을 쉽게 깨지는 유리그릇이라 한 것도 이 작가의 내공의 깊고 단단함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나름 처방전이다.
이제 기쁨도 슬픔도 힘겨움도 나누면서 살아야겠다. 혼자서 짊어지겠다고 하는 위선에서 벗어나야겠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또 후회할지 모르지만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자책보다는 위로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유리그릇」 중에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위로와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한다.
비록 유리그릇이지만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잘 버텨준 나의 그릇에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에게 도전장을 던져보려 한다. 마음의 유리그릇을 미련없이 깨뜨리겠다고. 내 몸이 강화유리처럼 단단해질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유리그릇」 중에서
행여 깨질까 조심조심하며 지켜온 유리그릇을 이젠 부러 깨부수겠다는 새로운 다짐에 필자는 깜짝 놀란다. 그게 오만과 비겁이라 말할 때 그건 언젠가 스스로 깨부수고 넘어야 할 장벽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부가 이 정도의 역경을 겪었으니, 역경은 이제 그만! 일 것 같았다. 한 개인이 겪은 고난은 쿼터제여서 일정량 이상은 겪지 않게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공정하지. 그럴 리가 있나? 하느님이 공정하다고 어디 쓰여있기라도 하나? 공정이란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찾아낸 인간사회 규약이다. 하느님은 패던 놈만 패는 분 아니던가? 이런 부당함을 인간이 보다보다 더는 볼 수 없어서 찾아낸 규약이 공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광풍이 수그러들면서 정작 중증 환자들이 늘어가던 때, 화자는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았다. 우린 코로나가 끝물이고, 워낙 신경을 쓰는 상황이라 큰일 없이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구급차로 실려 간 대학병원에서 결국은 환자의 모든 의무기록을 가지고 있는,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던 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고,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며, 하루에 한 번씩 병실 간호사의 브리핑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들 부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