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역에서

빙하역에서

$12.28
Type: 현대시
SKU: 9791193093948
Categories: ALL BOOKS
Description
이광소의 시집 『빙하역에서』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해부이며, 동시에 자신을 지우려는 혹은 다시 쓰려는 언어적 실천이다. 이 시편들에서 시인은 세속적 삶에 대한 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거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순수’라는 신화적 공간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얼굴’이라는 반복되는 이미지는 이 모든 시적 궤도의 핵심에 있으며, 이는 곧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존재론적 결단에 대한 은유이다.
시집의 여러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얼굴’은 정체성과 관계의 고리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무게와 타인의 시선, 사회적 재단의 도구이기도 하다. 「얼굴을 지운다」에서 시인은 “돼지 입에다 지폐를 물리는 자들”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지우고자 한다. ‘모가지’만 소비되는 세계에서 ‘몸통’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려는 몸부림, 그 결기는 탈사회적 선언에 가깝다. 이러한 얼굴의 해체는 「얼굴 없는 춤」에서도 이어진다. 하회탈춤의 탈은 계급과 억압, 위선을 풍자하는 도구이며, 동시에 ‘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한 위장이다. 시인은 이 탈의 무표정한 웃음 너머에서, ‘자기’란 이름의 사회적 덧칠을 의심하고, 그 해체의 필요를 역설한다. 여기서 얼굴은 정체성의 표지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강요된 ‘가면’이며, 이것의 ‘지움’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 시집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순수로의 지향’이다. 순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이미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는 본래성의 신화다. 표제시 「빙하역에서」와 또 다른 시 「빙하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시인은 “결빙 상태로 살아가는” 세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체만 사는 곳”을 그리워하며, “불에 녹지 않는 나라”에서의 삶을 꿈꾼다. 이 ‘빙하’는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모든 세속적 욕망과 권력, 폭력,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존재의 원형이다. 시인은 현실의 더러운 열기를 피해 빙하역에 도착하길 소망하며, 거기서 “얼음 같은 사람들”, “불에 타지 않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는 곧 현실 도피라기보다는, 진정한 자기 회복을 위한 순수성과의 만남이다.
이러한 순수의 세계를 위해 시인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실천한다. 「해체론」이라는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아직도 번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의 고백은, 문학의 형식과 존재의 껍질을 동시에 벗겨내야 한다는 자각이다. 나비가 되기 위한 애벌레의 ‘해체’는 단순한 성장의 비유를 넘어, 고정관념과 전통, 자기동일성까지도 해체해야 하는 급진적 실천으로 확장된다.
『빙하역에서』라는 이 시집 전체는 얼굴을 지우되, 응시를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의 선언이다. 사회적 얼굴, 세속적 자아, 욕망의 상징으로서의 나를 벗어던지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영토를 향해 나아가는 이 시집의 시편들은 탈주의 시학이며 동시에, 해체 이후를 꿈꾸는 창조의 언어다. “빙하역도/북극곰도/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는 「빙하역에서」의 마지막 구절처럼, 이 시집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근원과 다시 연결되기를 희망하는 예언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