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안중근 : 안중근 의사와 여순형무소 간수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 이야기

내 마음의 안중근 : 안중근 의사와 여순형무소 간수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 이야기

$17.00
Description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와 간수 치바 토시치의 우정비화
한민족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 대룍침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나라의 쇠망을 통감하여 의병을 일으킨 구국의 영웅 대한의병군 참모중장 안중근에 의해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다.
당시 여순 관동도독부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서, 안중근의 의거 소식을 듣고 분노와 증오를 느꼈던 치바 토시치가 수감과 재판, 사형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시종일관 동양 평화를 깨트린 일본의 침략과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 의사의 인격에 감동, 처형 당일 받은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간직하여 평생 향을 사르며 안 의사의 명복을 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전후 한국이 처한 국제적 국내적 배경과 상황을 상세히 말하고 있다.
비록 일본 헌병이었지만 만부득이한 의거를 결행한 조선 젊은이의 당당한 행동은 한 일본 간수를 감동시키고 평생을 모시게 만든다.

저자

사이토타이켄

저자:사이토타이켄
1935년미야기현구리하라군칸나리쵸서만사에서출생.센다이일고,도호쿠대학문학부불문과졸.아사이신문기자를거쳐1990년부터현재까지미야자기현와카야나기쵸의조동종(曹洞宗)대림사(大林寺)주지.
1909년10월안중근은일본의원흉이토히로부미를하얼빈역에서사살하였다.사형판결을받은안중근은처형직전옥중에서보살펴준간수치바토시치에게감사의뜻으로<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이란글을써주었다.
치바토시치는이유묵을제단에걸어두고평생향을사르며안중근의명복을기원하였다.그리고유묵을소중히모시라는치바의유언에따라,유묵은소중히간직돼왔다.
70년후인1979년안중근탄신100주년을맞아유묵을한국에반환하였다.그것을계기로이유묵이새겨진<안의사와치바의기념비>가한일양국의우호를기념하기위해치바가잠든대림사에건립되었다.그리고대림사주지인저자가중심이되어한일양국의많은사람들이두고인의심정을회상하며<한일두나라의영원한평화>가있기를바라는추도식이매년가을마다이어지고있다.
그것은또한진정한한일우호관계의소중함을바라는치바씨의마음을통해역사를엄숙히묻고바르게하고자하는많은사람들의답이기도하다.

역자:이송은
동덕여자대학교무역학과졸업.일본어능력시험1급합격.㈜엔터스코리아에서번역가로활동중.
영상번역으로일요스페셜「통한의증언-북송선」「나고야의태양선동열」등과추적60분「한일어업협정파기그이후」외다수가있고단행본번역으로는「한의학대백과사전」「인간은왜섹스를하는가?「환상세계3」「마법사전」등이있다.

목차


연보
기원의날들
어린시절
불타는대륙
일본의원훈,이토히로부미쓰러지다
두사람의만남
빗속의처형식
조국으로돌아간유묵
저자후기
증보판을내며
역자후기

출판사 서평


독립운동가안중근의사와간수치바토시치의우정비화
한민족의주권을빼앗은일본대륙침공의상징이토히로부미를,나라의쇠망을통감하여의병을일으킨구국의영웅대한의병군참모중장안중근에의해1909년10월하얼빈역에서저격하였다.
당시여순관동도독부육군헌병상등병으로서,안중근의의거소식을듣고분노와증오를느꼈던치바토시치가수감과재판,사형에이르기까지당당하게시종일관동양평화를깨트린일본의침략과의거의정당성을주장한안의사의인격에감동,처형당일받은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간직하여평생향을사르며안의사의명복을빌게되기까지의과정을이책은이야기하고있다.또한안중근의사가이토히로부미를저격한전후한국이처한국제적국내적배경과상황을상세히말하고있다.
비록일본헌병이었지만만부득이한의거를결행한조선젊은이의당당한행동은한일본간수를감동시키고평생을모시게만든다.

-이토히로부미를응징한안중근을여순형무소에서만나한평생공양한일본헌병여순형무소간수치바토시치이야기
-우리에게공개되지않은역사의진실을밝힌책!
-아사히신문,산케이신문,각종방송및언론매체에절찬되었던바로그책!

이책은1909년10월26일9시30분경하얼빈역에서안중근이이토히로부미를저격한사건이있은지일주일뒤인11월3일이후부터재판을받고처형되기까지5개월간여순형무소에안중근이수감되었을때간수였던치바토시치와의이야기를쓴넌픽션이다.안중근의사가이토를저격하기까지의상황과재판과정,한국의독립운동과1910년전후국제적국내적상황도상세하게이책에서는적고있다.

당시일본헌병이었던치바토시치의나이는24세였다.그는11월3일이후마지막날까지안중근의곁에서가장많은시간을보낸이였다.검찰관의취조과정과재판과정을지켜본것은물론형무소에서도간수로서같이지냈다.그러는사이에남몰래안중근을존경하게된치바는마음깊은곳에서‘안중근을잃는것은안타까운일이다.분명한국의미래를위해한몫할인물인데……’라고아쉬워했다.그리고안중근이처형된3년뒤인1913년3월20일기츠보와결혼했다.당시치바의나이는28세,기츠보는21세였다.그후요노츠네소학교출신자로서는최고의지휘인헌병특무조장까지진급했으나뜻한바가있어군에서퇴역하고한국통감부경찰관으로전직한뒤,마지막임지인연해주와가까운한국북부의함경도에서경부보로퇴관했다.1921년4월고향으로돌아온그는아내와생가근처에집을마련하고여생을보냈다.

치바는남은여생을보내면서안중근을위해남몰래참회의불공을올렸다.여순형무소에서안중근이써준글씨인‘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대림사에모시고향을피웠다.그런그의행동은당시의일본인으로서는도저히이해할수없는일이었다.그러나치바는안중근을위해불공을드리는것을하루의일과로삼았다.죽음을앞둔치바는아내에게안중근의유묵을잘보존할것과안중근이영락정토로갈수있도록끊임없이불공을드려달라는유언을남겼다.

치바의아내기츠보도죽고나자치바의친족들은그의뜻을이어안중근의유묵을70년간소중히보관해왔다.서울에서안중근의사탄신백주년기념식이거행된다는것을전해들은치바의유족들은,한국의발전을기원하면서1979년늦가을에유묵을안중근의고국에반환하였다.그리고2년후인1981년3월26일미야기현구리하라군에있는대림사에는비석이세워졌다.이비석에는안중근과치바의우정을기념하고아울러불행했던한일병합35년간의일제의탄압지배에대한속죄가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