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아포칼립스 1 : 백강과 기벌포는 어디인가?

백제 아포칼립스 1 : 백강과 기벌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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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백강 및 기벌포와 주류성의 위치를 찾는 일은 백제사 복원에 중요한 핵심

7세기 동아시아에는 거대한 두 세력의 연합이 형성되었다. 고구려-백제-왜(일본)로 이어지는 남북 방향의 연합 세력과 당(唐)-신라의 동서연합이 그것이다. 이들 서로 다른 양대 세력의 충돌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그중에서도 백강ㆍ기벌포 해전은 당시 동아시아 주도 세력이었던 5국의 ‘십(十) 자 연합’이 각자의 명운을 걸고 치른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었다. 백제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결전이었고, 신라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다.
당과 신라를 상대로 한 백제의 마지막 구국전쟁은 663년 8~9월, 네 차례에 걸쳐 백강 및 기벌포 일대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함께 손잡고 백제를 침공한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다툰 마지막 결전 또한 백강ㆍ기벌포에서 치러졌다. 신라 및 당을 상대로 벌인 백제의 마지막 전장(戰場)이었고, 신라가 당으로부터 대첩을 거둔 결전장 ‘백강(기벌포)’이 충남 당진시 우강면 남원포의 삽교호 일대와 합덕읍 삽교천 하구 지역임을 저자는 한ㆍ중ㆍ일 3국의 사료(史料)와 한국고대어ㆍ지명ㆍ향찰 등을 바탕으로 최초로 정확히 밝혀내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나당군의 백제 침공으로부터 백강해전 및 백제의 멸망 과정을 실제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그간 우리는 격변의 시기였던 7세기 후반, 신라와 당의 백제 침공 전후로부터 백제의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해 이제 비로소 우리는 백제 말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한국 고대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그 시기의 역사 서술 또한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라든가 당시의 동아시아 역사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쓰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

서동인

저자:서동인

저자는오랜세월,우리의역사그중에서도한국고대사를깊이연구해왔다.한국만이아니라중국의고대사에도각별한관심을갖고있는저자는역사전문연구자이자작가로서다음과같은저서들을펴냈다.



『흉노인김씨의나라가야』(2011)

『신안보물선의마지막대항해』(2014)

『조선의거짓말』-대마도,그진실은무엇인가?(2015)

『미완의제국가야』(2017)

『영원한제국가야』(2017)

『병자년남한산성항전일기』(번역서,2018)

백제사최대의비밀,1360년만에풀었다

-『백제아포칼립스1』-백강과기벌포는어디인가?(2023)

-『백제아포칼립스2』-주류성및탄현은어디인가?(2023)

목차

글머리에두는저자의말

1.백강과웅진강,두갈래길로공격한당군의전략

-13만당군소야도로건너오다
-당군,내주(萊州)성산(城山)에서서해건너동진(東進)
-당군좌군은당진백강,우군은부여웅진강으로상륙
-‘당평백제비’에도당군장수좌군과우군으로편성되어있어

2.소정방의우군,사비도성을함락하다

-소정방,7월9일아침오름물때에부여반조원리로상륙
-당군,9일저녁오름물때에상륙작전재개
-부여석성면봉정리일대10리벌판에당군주둔
-금강강바닥깊어백제시대에는고다진이내륙항역할
-백제는당군의웅진강침입을예상하지못했다!
-한·중양국의기록에도웅진강은백강이아니다
-부여세도면~석성면일대백제시대‘웅진강구’

3.역사상세계최대의해전,백강해전

-당과신라의마지막나당전쟁을치른곳도백강·기벌포
-부여석성-세도아래는강이아니라바다

4.백강은어디인가?

-백강과사비하는어떻게다른가?
-중국기록엔금강이모두‘웅진강’으로되어있어
-주류성은북부의성,백강구는서부백강이바다와만나는곳
-백강(白江)에관한종래의여러견해는모두허구
-백강구는당진삽교천하구우강강문리일대!
-기벌포는소부리주및서천지역에없었다

5.백강과기벌포의위치를알려주는증거들

-어원적의미로본기벌포와백강의위치는‘당진’
-삽교천의원래이름은‘삽내’및‘삽살’
-‘동진강=백강’및‘부안기벌포설’도허구
-전북동진강이나만경강은백제의백강이아니다

6.소정방과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

-바다물때로알아본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
-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은7월9일오전9시전후
1)과학적조석표(潮汐表)로보는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
2)토정이지함의조수왕래법으로보는백제의물때
3)사비성함락과의자왕의웅진성피난시각

7.사비도성함락후의여러상황들

-소정방의회군과전쟁포로의자왕일행의당나라압송
-계백의3營과김유신의3道에대한몇가지견해들
-사비성함락직후김춘추의이동로
-백마강과소정방의조룡대(釣龍臺)전설에관한견해

8.신라·당·백제·왜·고구려5국의대결전(大決戰),

-백강해전의비밀코드
-한국과중국·일본3국의백강해전관련자료들
-연대와월일별로다시정리한한·중·일3국자료들
-왜·백제군과나·당군백강에서네차례대규모해전치러
-백강해전패전및주류성항복이후임존성전투
-당군은전통적으로누선과전선(戰船)을동원하였다!
-나당군수군의전술과백제·왜군의패배원인
-왜및백제군,당군의선박규모·무기·전략전술에뒤져
-당군은물때를잘활용해화공전으로승리하였다!

9.백강해전에서의패배와주류성함락

-나당군의남벌(南伐)에이은북벌,그리고백강해전과주류성함락
-북방성관할지역에대한총공격이북벌의핵심
-부여풍이복신죽인뒤나당군의북벌시작돼
-부여륭·부여풍·부여용및복신의관계
-전북남원이대방땅으로불리게된사연
-고구려멸망후전쟁포로부여풍과부여륭의영남유배
-바다건너왜(倭)로의망명길에오른백제유민들
-흑치상지·사타상여에의한임존성함락

출판사 서평

‘한국고대사의비밀‘1360년만에풀었다!

백제인들의구국운동중심이었던백강및기벌포와주류성의위치를찾는일은백제사복원에중요한핵심사항이다.백제말기에백제·왜·고구려‘남북’연합군이신라·당‘동서’연합군을상대로최후의결전을벌인백강(白江,=기벌포)해전과‘부흥백제’의왕성이자부흥운동의중심이었던주류성에서의패전은삼국시대를마감하는신호탄이었다.남북및동서두연합의교차점(십자연합)에서발생한대규모충돌은한국고대사의방향을완전히바꿔버렸다.660년나당군에게사비성이함락되고,의자왕과지배층대다수가포로로잡혀간뒤로3년여에걸쳐가열차게진행된백제인들의구국운동은백강해전패배에이어주류성과임존성이함락됨으로써허망하게끝나고말았지만,특히주류성과임존성·가림성(성흥산성)은나라를되살리려는백제인들의구국의지와항전활동을대표하는장소였다.그중에서도주류성과기벌포는백제부흥운동에서그만큼중요한위치를차지한다.그럼에도백제가나당군을상대로해전을벌인기벌포(백강)와주류성이어디인지는지금껏아무도모르고있다.

자료에대한철저한분석과다양한분야의지식,그리고그것을바탕으로한합리적인상상력과추리력이절대적으로필요한분야가고대사이다.한국과중국에전하는기본자료만이라도제대로이해하고,올바르게분석했더라면그간의부끄러운결과는면했을것이다.『구당서』·『신당서』와같은전쟁당사자인당唐의1차사료만이라도제대로들여다보고이해했더라면백강과주류성을적어도충남북부권에서찾으려고노력했을것이다.그런기본적인노력조차없었기에일제강점기에일본인들이이땅에들어와서내세운전북만경강또는동진강백강설이나전북주류성설과같은엉터리가설을진작에청산하지못한것이다.백강(기벌포)과주류성이지금의금강하류로부터전북지역어딘가에있었다는일본인들의주장은허구이다.그들의허무맹랑한주장을맹종하여그안에서허우적거리다보니백강이지금의충남당진시우강면남원포일대이고,주류성이충남세종시전의에있었다는사실을알아내지못한것이다.

저자가백강(기벌포)과주류성의위치를찾기위해충남북및전북지역에서는빼놓은곳이별로없을만큼많은곳을두루답사하였다.하지만그처럼샅샅이뒤지는답사가별도움이안되는일이었음을깨달은것은향찰(鄕札)과지명에대한이해가이루어진뒤였다.기본적인문헌자료를바탕으로우리말과향찰로해독하면기벌포및주류성을쉽게알수있는일이었다.그래서지명과한국고대어,각지역의필요한방언을추가로조사하였다.기호지방의방언가운데상당수가백제어또는그이전마한어일수있다는가정하에그지역방언이신라어와다른점은무엇이며,그것이향찰에어떻게반영되었을까하는것까지탐구하였다.가는곳마다지명에얽힌내력도뒤져야했고,『삼국사기』지리지를비롯하여조선시대의각종지리서도빠트리지않았다.

마지막으로백강및주류성이어디인가하는문제를연구하면서저자가중점을두었던몇가지사항들을정리하여제시해둔다.
▲백제사에서왜백강(기벌포)·주류성이그토록중요한문제인가?
백제가당과신라를상대로한마지막구국전쟁을주류성과임존성에서시작했고,백강(기벌포)해전에서의패전으로백제인들의구국운동(부흥운동)은실패로끝났다.그러므로부흥운동의중심지였던기벌포(백강)및주류성의위치와그곳에서의당시상황을정확히알아야부활을꿈꾼백제인들의항전활동과구국운동이패망에이른과정을선명하게복원할수있다.

▲왜일본인들은백강(기벌포)·주류성을전북지역에서찾으려했는가?
일본인들은중국과한국의관련기록을제대로들여다보지않은채,막연한추측에서이문제에접근하였다.정확한자료와증거를제쳐두고단순한상상만으로전북지역에서백강·주류성을찾으려했던것이다.그런데도어찌된일인지우리의연구자들은일본인들의역사인식을추종하여스스로발목에족쇄를채우고말았다.1백여년전일본인들이세운가설을그대로이어가려애쓰는이들이지금도있다.무엇보다도한·중·일삼국의관련자료를제대로들여다보지않은것이큰문제였다.백강을지금의금강하구로부터전북서부권(김제·부안)의만경강이나동진강으로,주류성은부안~정읍등의전북지역에있을것이라는일본인들의주장은근거가없는허구다.연구자로서기본자질이부족한자들이남의나라에들어와온통혼란을불렀다.그럼에도그에대한근본적인의문조차제기하지않고맹목적으로그들의견해를추종한국내연구자들이있었다.

▲당군과신라군은어디로먼저들어왔는가?
중국기록에당군은덕물도(덕적도)로들어온것으로되어있다.그러나실제로는소야도가당군의첫주둔지였다.거기서당군은어디를최초의공략지점으로삼았는가하는점이중요하다.간단히정리하면당군은소야도에서좌군과우군두진영으로나누어좌군은당진으로,우군은웅진강(금강)하구의부여로들어갔다.따라서당군과신라군의침입초기전장은①당진백강②웅진강하구③황산벌세군데에형성되었다.웅진강으로들어간우군은세도면반조원리에상륙했다가그맞은편으로옮겨가서석성면봉정리일대를주둔지로삼았다.같은날비슷한시각에황산벌로들어간김유신의신라군은계백군대와싸우느라10일까지황산벌에묶여있어야했다.신라및당연합군은7월12일에야가까운부여석성면지역에서사비도성을향해진군하였다.

▲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은언제일까?
소정방과그가거느린우군은660년7월9일(음력)아침조금의오름물때(들물)에맞춰금강(웅진강)으로거슬러올라왔다.그날아침바닷물이불어나는이른시간에반조원리및고다진으로상륙하였다.그러므로군산항조석표를기준으로바다물때를계산하면당군이상륙한시간을정확히계산해낼수있다.그에따르면소정방의상륙시간은7월9일오전9시~10시전후였다.그리고그날저녁(오후6~7시이후)무렵,두번째오름물때에맞춰건너편석성면봉정리일대로상륙을재개하였다.이렇게해서소정방과당군은신라군과의약속대로7월9~10일(무쉬물때)사비성남쪽20리지점으로부터30리사이의10리범위에집결하였다.

▲기벌포(백강)를추적하는데가장중요한열쇠는향찰과고대어였다.
향찰및지명과한국고대어(백제어)로써기벌포(백강)의위치를분석해냈다.한국고대어가한자지명으로바뀌어가는과정에주목하여기벌포는현재의삽교호내수면인당진시우강면부장리남원포임을밝혔다.남원포옆강문리가옛백강구(白江口)였고,거기서상류로합덕읍구만리일대까지가기벌포및백강의범위였을것으로추정하였다.그리고백강은지금의삽교천이었다.이런것들을해독하는데가장중요한열쇠는한국고대어와향찰이었다.

▲주류성(周留城)은전성(全城),‘백제인이두루머무는성’을의미
주류성(周留城)을향찰로풀면전성(全城),전기(全)그리고한자본래의뜻으로는‘백제인이두루머무는성’이다.주류성이바로부흥백제의수도에있던성이었다.예산임존성과마찬가지로주류성(운주산성)은최후의항전성으로그곳엔부흥백제국의왕부여풍의군지휘부가상주하였을것이다.그간에는향찰연구가부족했으므로지명에얽혀있는암호를해독하지못하였다.저자는현재의운주산성(충남세종시전동면)을주류성으로확정하였다.다만부여풍과부흥운동지도자들은운주산성입구의미곡리일대나지금의전의읍읍성을포함한평지어딘가에거주하였을것이다.

▲한·중의일차사료를주의깊게보지않은게문제였다.
당시임존성은서부의중심이었고,주류성은북부에있는부흥백제의왕성이었다.해당지역들을서부와북부로설명한한·중의기록을잘살펴보았더라면전북지방에서백강과주류성을찾는무지한일은없었을것이다.물론백제부흥을위한구국운동을벌이기전에는북부의중심은오히려목천이나지금의청주지방이었을것이다.그러나당시의조건에서부흥운동에가장적합한요충이주류성이었으므로목천과주류성을최후의저지선으로택했을것이다.나아가『삼국사기』문무왕답설인귀서의“남방이평정되고나니군대를돌려북쪽을쳤다”(南方已定回軍北伐)는내용과‘북부주류성’이란기록을정확히이해했더라면최소한사비시대백제북방지역으로서웅진방령(=북방성방령)의관할지인북부에서주류성을찾는시도는하였을것이다.그러나아무도그것을파악하지못했고그런시도자체가없었다.그것이바로아무도관련기사를제대로읽지도않았고주목하지도않았다는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