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백제가없었다니...
(무령왕묘소를왜한반도공주에숨겼을까?)
‘백제는없었다’,‘한반도에백제가없었다’니말이되는얘긴가?
우리가학교에서배워서익히알고있던백제가사실이아니란말인가?
책을열면첫장부터백제의도읍지라고믿고있는풍납토성,몽촌토성,공산성,부여사비성에서‘왕궁의주춧돌’하나발견할수없다니충격그자체다.
저자는‘왕궁의주춧돌’말고도10여가지실증(*)사례를들어백제가한반도에분명히존재하지않았음을증명하고있다.그리고중국땅에서백제의여섯(6)도성을찾아가는길이흥미진진하다.
국사학계는상고사부문에서오랫동안논쟁이되거나풀지못한난제(**)가많이있다.이에대해,저자는베틀에앉아가로세로의역사적사실과문헌사와지명과지리적특성을엮어옷감을짜내듯손쉽게풀어내고있다.
그중에는‘백제성왕이<남부여>로국호를바꾼이유’를찾아내었고,‘고구려광개토왕이한반도를경유하지않고왜를정벌한코스’를밝혀주어우리를놀라게한다.
올해는무령왕릉발굴50주년을맞아‘무령왕의해’라는각종기념행사가있는해이기도하다.이책은‘무령왕묘소를한반도공주에숨긴이유’를소상히밝혀주어국사학계의뜨거운감자가아니라앞으로국사연구방향의이정표를제시하는계기가될것으로보인다.
<첨부1>*10여가지실증(*)사례
필자가‘백제는한반도에없었다’는주장에앞서고정관념에젖어있는독자들에게오히려질문을던지고있다.(책59-61쪽에서)
?세계사에서주춧돌이없는궁궐을들어보았는가?고구려나신라의왕성에는있는데,백제왕성이라하는풍납토성,몽촌토성,웅진공산성,부여사비성에는주춧돌이없다.어떻게생각하는가?
?신라의스님자장(慈藏)율사가640년에창건했다는공주(웅진)마곡사(麻谷寺)는‘한국사’로본다면백제땅에있다.백제멸망20년전일이다.당시신라(선덕여왕)와백제(무왕)는전쟁중이었다.적지에서가능한일인가?
?이보다앞서권좌에서물러난(575)신라진흥(왕)이전북고창선운사를창건했을때백제는위덕왕때이다.만약그곳이백제땅이라면위덕왕이부왕(성왕)을죽인진흥을그대로둘수있을까?
?한국사에서말하는한반도의서남부백제땅,김제호남평야에‘벽골지(碧骨池)’를건설한나라는신라(흘해이사금)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벽골지’관련기사가없다.벽골지가있는호남평야를백제땅이라할수있나?
?공주송산리무령왕릉지석에새겨진토지매입권(土地買入卷)을어떻게설명해야하나?한국사에서말하는웅진성(공산성)에서1-2킬로미터정도밖에안되는왕의영역인데,돈을주고묘터를마련한다는것이말이되는가?
?무령왕릉보다100년후에조성되었다는부여(사비성)능산리고분군을백제의왕릉으로보고있는데아치형천정이아니고평평한횡혈식석실이다.기술이갑자기후퇴한까닭이무엇인가?백제땅이맞는것일까?
?최근(2018)전북완주군에서가야시대제철유적과유물이발견되었다.유적지중비봉면은익산군미륵사지와백제왕궁설까지거론되는금마면과붙어있는곳이다.과연실제적상황이라면가능한일인가?그런데실증이다.
?경기하남시이성산성(二聖山城)발굴결과백제유물이출토되지않았다.이는무엇을말하는가?백제가존재하지않았다는것아닌가?
?금동대향로가부여능산리절터에서발견되었다고해서백제유물로볼수있는가?발견된곳이공방터라하는데‘공방터’근거가뭔가?거기다가‘백제금동대향로’라는명칭을붙였다고해서백제유물이되는가?‘금동대향로’를가지고백제의한반도존재를말할수없다고본다.
?『삼국사기』와『남제서』에나온백제와북위와의전쟁기록을보면한반도에백제가존재하지않았음이더욱뚜렷하다.첫째북위의기병수십만에맞서는백제의군대가얼마나많아야하며,어떻게바다를건너갔을까?둘째북위는기병을주축으로신속하게공격해오는데,3차례침공에대비하여백제군사가신속하게바다를건너갈수있었을까?셋째침공에대비하려면6년(484-490)동안동성왕이한반도웅진성과조정을비워둬야하는데,그동안군대유지비는어떻게충당했을까?
⑪이에대한답변이궁색하자북위가바다건너공격해왔다고주장하는데,첫째남조를공략해야할북위가바다건너백제를공격한다면전력을분산,약화시키는결과를가져오게되는데북위에서그렇게도할일없었는가?둘째북위가유목국가로서전통적으로수군에약한데,보병이면몰라도말과동승해야하는기병수십만을바다건너이동한다는것은거의불가능한일이다.백제가중국땅에있으면이와같은질문을할필요가없어진다.
<첨부2>**국사학계는상고사에서오랫동안논쟁이되거나풀지못한난제(**)가많이있다.
광복(1945)이후그동안우리역사학계가풀지못했던문제들을손쉽게풀어내고있다.
(1)마한을정복한백제의왕이근초고왕이아니고온조왕조에기록되었다하여『삼국사기』기록의진위를거론하는문제에대하여,
(2)『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이위례성선정요건중서해(西海)즉대해(大海)와남망옥택(南望沃澤)의해석상의문제에대하여,
(3)온조왕13년(BC6)에왕이‘백제동쪽에낙랑이있고북쪽에말갈이있다(國家東有樂浪北有靺鞨)’라고말한위치와배열문제에대하여,
(4)온조왕의‘한산천도’와근초고왕의‘한산천도’가같은곳인지,다른곳인지에대한논란에대하여,
(5)<백제본기>책계왕(9대)원년(286)에쌓았다는아차성(阿且城)이서울의동북부에있는아차산성(峨嵯山城)이라는국사학계의견해에대하여,
(6)근초고왕의패강전투와‘낙랑태수’작위에대한해석상의문제에대하여,
(7)『일본서기』에나오는신공황후의행적에대해일본의사가와국내사학자들이한반도의경상도중남부에서찾는문제에대하여,
(8)백제근초고왕(13대)과동성왕(24대)때,전투지위치에대하여,
(9)『남제서』<동남이열전>백제조에나오는북위(北魏)의위로가기병수십만명을내어백제를공격(490)하였을때,동성왕이승리할수있었나하는의문과전술적으로가능했다는요인분석에대하여,
(10)<신라본기>,<고구려본기>,<백제본기>3곳모두에나오는견아성(犬牙城)의위치와고구려와신라가살수(대릉하)언덕에서싸웠다는기록의의문점해소에대하여,
(11)현대사학자중에는동성왕시해사건과관련,반란자백가(?加)의투항과처형과정을보며무령왕의배후설,즉‘왕위찬탈설’을제기하는학자가있는데이에반해‘왕권수호설’입증에대하여,
(12)<백제본기>무령왕21년(521)12월양나라고조(高祖)가무령왕에게보낸조서중에‘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과‘수번해외(守藩海外)’의재해석으로월주백제의위치확정에대하여,
(13)무령왕릉지석해석의논란과묘소를한반도공주에숨긴이유에대하여,
(14)성왕이백제라는국호를버리고남부여(南扶餘)로개칭한이유에대하여,
(15)『삼국사기』제37권잡지(雜志)에인용한『북사』와『통전』과『구당서』에서‘백제’와‘신라’의위치관계가사서에따라뒤바뀌는이유에대하여,
(16)『구당서』가기록한백제의2성(城)즉동성(東城)과서성(西城)에대하여,
(17)계백장군이사비성을지키지않고,황산벌전투에임하게된상황에대하여,
(18)요즘에도중국에백제향등백제흔적이남아있게된이유에대하여,
(19)하남시‘이성산성’발굴결과논란과‘백제춘궁동설’에대하여,
(20)『삼국사기』제46권,열전제6최치원전(傳)에나오는‘고구려와백제는전성기에강한군사가백만이어서남으로는오(吳)·월(越)의나라를침공하였고,북으로는유주(幽州)와연(燕)·제(齊)·노(魯)나라를휘어잡아중국의커다란좀(위협)이되었다.’는장계(狀啓)의진정성여부에대하여,
(21)<광개토왕비문>의‘영락6년(396)에태왕이몸소수군을이끌고왜적과(백)잔국을토벌했다’는기록의진위여부와당시수륙양면작전내역에대하여,
(22)광개토왕이왜(倭)를정벌하는남행은한반도에서일본열도가아니라중국동해안을따라회계산(會稽山,콰이자산)이있는월주땅까지이다.
(23)따라서일본스에마쓰의‘임나일본부설’과일본의조선침략을정당화하는‘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은한반도와무관한일이다.
(24)강소성양저우의고민사(高旻寺)를고구려가세웠는지의의문과당시려(麗)·제(濟)·라(羅)·수(隨)가중국동부지역에서공존했다는납득할수없는사실에대하여가능할수있었던이유를밝히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