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자격을 얻어 - 문학과지성 시인선 557

빛의 자격을 얻어 - 문학과지성 시인선 557

$12.00
Description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 그곳에 살고 있었다”
빛의 자격으로 내 안의 진창을 비추는 이혜미의 홀로그래피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물의 세계, 그 속을 유영하며 물 무늬를 시로 새겨온 이혜미의 세번째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 이후 5년 만의 신간이다. 시인은 이전 시집에서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에 몰두하며 두 세계가 마치 썰물과 밀물처럼 경계를 넘나들어 서로에게 흘러드는 사건에 주목했다. 이 책에서 이혜미의 시는 “더 이상 어떤 관계의 맥락 안에서가 아닌 홀로의 완전함을 지닌 것으로” 나아간다.
‘나’의 안에는 차마 입 밖으로 발화되지 못한 말들이 울창한 나무처럼 자라나 아프게 남아 있다. 너무나 길게 자란 내 안의 숲들을 화자는 더 이상 제 안에 두지 않기로 한다.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어 삼켜왔던 말의 가지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홀로그래피」) 깨달음에서 온다. “깨진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빛과 조우할 때” 마주하는 것은 눈이 부실 만큼 반짝이는 이혜미의 시, “백지 위의 홀로그래피”(소유정)이다.
저자

이혜미

1988년경기안양에서태어나건국대학교국어국문학과를졸업하고고려대학교국어국문학과대학원박사과정을수료했다.2006년중앙신인문학상으로등단했다.시집『보라의바깥』『뜻밖의바닐라』『빛의자격을얻어』,에세이집(이하공저)『시인,목소리』『촛불의노래를들어라』『당신의사물들』『어쩌다당신이좋아서』등이있다.

목차

0
원경/재의골짜기/로스트볼/새벽과색깔들의꿈/밤식빵의저녁/빛멍/시간의세가지형태/웨이터/물칸/자귀나무그늘에찔려/시나몬에대해서라면/도형의중심/사라진입술과두개의이야기

1
삭흔/슈가포인트/홀로그래피/숲의검은뼈/롬곡/멀어지는포도/붉은그네/여행하는열매/매직아이/사라지는동화/드림캐처/살구/머무는물과나무의겨울/회전숲

00
종이를만지는사람/당분간달콤/물에비친나무는깨지기쉽습니다/인그로운/목련그믐/하이람/검은사과/약속을내일로미루어도되겠습니까/순간의모서리/디자이너/로아/겨울의목차/깊어지는문/눈빛이액체라면

01
귀가열리는나무/리플레이/우리는아마도이런산책을/물의비밀들/생몰/닫힌문너머에서/난파선위를걷는/겨울가지처럼/정글짐/감염/다족의밤/블랙베이비/타오르는바퀴/01

해설생장기生長記·소유정

출판사 서평

발화되지못한말들이내안에숲을이루고
내면으로파고드는여행을시도하는화자

나는당신이내버렸던과실,창백하게타들어가던달의씨앗,단단한씨앗에갇혀맴돌던

[……]

가지에서부터다시시작하고싶었어아마도먼나라에서훔쳐온것말라가는뿌리를휘저어당신에게서멀어질거야희고외로운열매를맺겠지오래전함께스쳐지나갔던풀숲에서

나는거꾸로자라는식물,더러운물속에머리를담그고낯선구석이될거야우주의품에서조금씩삭아가는이작고얼룩진행성처럼

―「로스트볼」부분

이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소유정은발화하지못하고“그저말을삼”킴으로써내부에쌓인말들을‘씨앗’이라고말하며,이혜미의직전시집『뜻밖의바닐라』에는그씨앗들이잠재되어있었다고말한다.“창백하게타들어가던”씨앗이었던나는이번시집에서“위독한가지”(「겨울가지처럼」)로자라난다.“마음이내쳐진곳마다”돋아나는“날카로운파편”처럼,“잎사귀의무늬로떠오르던상처”(「시간의세가지형태」)처럼가지를뻗고,“희고외로운열매를”맺는다.
그런데시인은계속해서자신의내면에서커가는식물을“거꾸로자라는식물”“거꾸로서있는나무”(「머무는물과나무의겨울」)라칭한다.이뒤집힌식물의이미지는수면위에비친나무,거울처럼반사된나무를바라보는것에가까워보인다.여기서다시한번이혜미의시에서그간서로에게스며드는액체,혹은화자의세계를대변하는사물로서의액체가얼마나중요한소재였는지떠올리게된다.“안으로흘러들어/기어이”(「겨울가지처럼」)고인물이내안에온몸가득한멍으로남아있다.나무가뿌리내린“더러운물속”,그물에비친나무는화자의아픔,이는내면의병증이반사된모습이자시적화자의자화상이라고도할수있을것이다.


스스로의힘으로나의우주를뒤집었을때
말들이쏟아지고비로소시작된‘나’의이야기

심장을보려눈을감았어.부레의안쪽이피투성이시선들로차오를때까지.어항을쓰고눈물을흘리면롬곡,뒤집힌우주가안으로쏟아져내렸어.

행성의눈시울아래로투명하게부푸는물방울처럼,빛을질식하게만드는마음의물주머니처럼.흐르는것이흘리는자를헤매게한다면어떤액체들은숨은길이되어낯선지도를그리겠지.

[……]

우주를딛고일어서는힘으로
발끝이둥,떠올랐어

―「롬곡」부분

내면에비친나무를계속해서응시하던화자는이제“자신안의망령을찾아떠나는여행속의여행”(「홀로그래피」)을끝내기로한다.내안에갇힌채울창한숲을이뤘지만나의밖으로발화되지못한나뭇가지들을밖으로끌어내기로한것이다.다행히수면에비친나무를깨뜨리는방법은꽤간단하다.작은물결을일으키는것만으로도물위에반사된것들은흩어지기때문이다.이혜미시가그간중요하게다뤄왔던안팎을뒤집는행위가바로이지점에서수행된다.화자는과감하게자신의세계를뒤집고“뒤집힌우주가”흘러나오도록한다.이혜미의시에서이러한전복이그간“타자와의교감과결합을추구하는시도”(오형엽)로사용되었다면,이번에는‘너’없이‘나’홀로나의세계를뒤집어보는행위로나아간다.
그가자리하고있는세계의위아래를바꾸고안에만머무르고있던말들,“고인진창”이나의입밖으로흘러나온다.고여있던물을흐르게하면나는눈물을흘릴만큼아플수도있겠지만,액체들은새로운길을찾아“낯선지도를”그릴것이다.굳게닫혔던마음의문이열리고내안의것들이새어나온다.마지막으로,“몸의가장어두운뒷면”나의“닫힌눈꺼풀”(「닫힌문너머에서」)을뜬다.빛의자격을얻은화자의시선은“아직흘러나오지못한말들을비출것이다.눈이부실만큼반짝이는말들을시인은더이상삼키지않고,감추지않고내보일것이다”(소유정).관계속에서가아닌홀로의모습으로우주를딛고둥,떠오를시간이다.

-

시집속으로

썰물지는파도에발을씻으며먼곳을버리기로했다.사람은빛에물들고색에멍들지.너는닿을수없는섬을바라보는사람처럼미간을좁히는구나.

수평선은누군가쓰다펼쳐둔일기장같아.빛이닿아뒷면의글자들이얼핏비쳐보이듯,환한꿈을꺼내밤을비추면숨겨두었던약속들이흘러나와낯선생이문득겹쳐온다고.
―「원경」부분

서로를헤집던눈빛이부서져휘날릴때네가선물한골짜기에누워깊숙한윤곽을얻는다먼곳에서그을음을퍼다가쏟아놓고떠난사람,흉한마음을모아둔유곡으로들어서면검은꽃과삭은과일들이가득했지

어스름을뒤집어여명을꺼내면가라앉는골짜기마다환한어둠들이차올랐다그건너무나아름다워깨어져야만안심이되는유리잔같았지
―「재의골짜기」부분


돌이켜보아도무례한빛이었다.최선을다해빛에얻어맞고비틀거리며돌아오는길이었다.응고되지않는말들,왜찬란한자리마다구석들이생겨나는가.너무깊은고백은테두리가불안한웅덩이를남기고.넘치는빛들이누르고가는진한발자국들을따라.황홀하게굴절하는눈길의영토를따라.지나치게아름다운일들을공들여겪으니홀로돋은흑점의시간이길구나.환한것에도상처입는다.빛날수록깊숙이찔릴수있다.작은반짝임에도멍들어무수한윤곽과반점을얻을때,무심코들이닥친휘황한자리였다.눈을감아도푸르게떠오르는잔영속이었다.
―「빛멍」전문

사랑하는헛것들.빛의자격을얻어잠시의굴절을겪을때,반짝인다는말은그저각도와연관된믿음에불과해집니다.우리는같은비밀을향해취한눈을부비며나아갈수있을테지요.두눈이마주치면생겨나는무한의통로속으로.이미깊숙해져있는생각의소용돌이를찾아.떠올린다는말에들어있는일렁임을다해서.
―「홀로그래피」부분

썰물처럼마음이빠져나간곳에
깨진유리들이반짝이며수북해질때

떠올리고
떠올랐지

입술의반경을미리겪는줄도모르고
움켜쥔그넷줄이핏빛으로번져가는것도모르고
―「붉은그네」부분

깊숙이흐려져본사람만이
아름다운입체를가질수있다고

잠겨드는페이지를걸으며
처음보는무늬를짐작하는

서로의눈속을걷던시간이었다

―「매직아이」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