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을 시작한다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0

내 사랑을 시작한다 - 문학과지성 시인선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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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사랑이라 쓰고 꺼내 먹는 노래로 가요”

유연하게 경계 위를 흘러 넘어가
그 너머에 닿는 힘센 사랑의 노래
★ 이린아 첫 시집 출간 ★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린아의 첫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 「돌의 문서」로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이야기”라는 평을 들으며 데뷔한 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이린아는 뮤지컬 배우, 재즈 보컬리스트, 작곡가 등으로도 활동 중이다. 여러 분야를 폭넓게 오가며 활약하는 시인을 닮아 다채로이 빛나는 69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한데 묶었다.

‘경계境界’라는 표현은 흔히 무언가를 구분 짓는 금이나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연상시키지만, 이린아의 시 세계에서 이는 면과 면이 맞닿아 생기는 따뜻하고 물렁한 선이다. 시인은 경계를 통해 ‘나’의 바깥에 ‘너’가 있음을, 나아가 ‘너’와 연결될 수 있음을 감각한다. 그리고 경계 너머의 그를 위해 손을 내미는 마음으로 “사랑이라 쓰고 꺼내 먹는 노래”(「불안의 사생활」)를 부른다. 바람을 타고 너울대는 노래에게는 경계도 소용이 없다. 이 힘센 사랑의 노래는 무대와 객석 간의 경계도, 기쁨과 슬픔 간의 경계도, 사람과 사람 간의 경계도 가뿐하게 흐리며 울려 퍼진다.
시를 쓰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모두 경계를 무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그러므로 이린아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이 어떻게 물어보아도” “그렇게 대답할 것”(「귀신같은, 귀신같은」)이다. ‘사랑을 시작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첫 시집을 품에 안고서,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랑의 시인 이린아가 당신에게로 간다. 당신과 흔흔히 연결되기 위해.

정확히는 특정한 ‘상태’에 가까울 사랑은 ‘나’가 경계 너머 ‘너’에게로 건너가고 연결되는 감각을 뜻할 것이다. 이 에로스는 ‘나’와 타자, 종간의 경계도 넘어서는 힘이다. [……] 고통과 자기부정을 넘어서는 에로스는 이린아의 시 세계에서 더 많은 존재와 연결되는 힘으로 확장된다.
-김보경, 해설 「에로스의 시학」에서
저자

이린아

시인이린아는2018년『조선일보』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방안에숨겨놓은타인
노을
숨기는옷
최초의공연
동물원
양동이
겹겹이의방식
작은풀들은미끄러지며자란다
언니의새벽
엄마의지붕
물웅덩이를발음하려다
서니사이드업Sunny-sideup
귀신같은,귀신같은
아홉개의채널과엄마의보자기
욕조

2부이구역은이제중성이야
비가오기전춤을추는새
엄마는날지못하고
주사위
텀블위드Tumbleweed
언니의거위
잘린귀
헌터타임HunterTime
무릎에서민들레가자라면
꼬리언어
생식
바스락거리는셈법
12시와울음
산책
그림책
도그바이트DogBite
별안간의팬케이크
올드패션드러브Old-FashionedLove
처음입은인간
2인용요람
쉽게열리는무릎
불안의사생활
신월
여름공연

3부혼자마를줄도아는걸요
비치러버BeachLover
폐어肺魚
버드세이버BirdSaver
분장실
엄마의엄마에게
필라테스언니

그림에가까이가지마세요
일렉트리컬프로미스ElectricalPromise
타임키핑Timekeeping
거짓말
구애,구애
당신의집
원더랜드페르소나WonderlandPersona
영장류처럼긴팔을사랑해
뒤집힌파라솔

4부나는복숭아를좋아해요
나비정원
돌의문서
뺨맞은관계들
벌룬의저주
언니의노래
꽃없는열매
아픈공기
풍선부는사람
수레무대
항아리마을
불면증
오렌지섹션OrangeSection
절취선
코끼리
그룸Groom
복숭아

해설
에로스의시학김보경

출판사 서평

무대를누비는생生의퍼포머

우리는불가능을담보로공연을계획했다.

무대는벌판이어도좋고지평선이어도,간이정류장또는당근밭이어도좋았다.중간에무산된다해도우리의목표는사실,거기까지였음을주제로공연을했다.빈의자가있는데면어디라도좋았다.
―「여름공연」부분

시적언어로자신의세계를펼쳐보이는시인이자독특하고아름다운선율로좌중을압도하는음악인인이린아는그야말로‘퍼포머performer’다.이번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김보경은이에주목하여“이린아의시에서무대는삶자체의은유”이며그무대위의배역은“외적강제로주어진것이아니라‘나’의존재증명을위한필연적인일”임을짚는다.수다한가면을바꿔써가며무수한페르소나를선보이되결코‘진짜’얼굴은잃지않는,유려한퍼포머이린아의공연이무대위에펼쳐진다.
이때무대의형태는아무러하여도상관없다.누군가앉았다갈빈의자만있다면,관객의자리만마련되어있다면그것으로충분할뿐관객의유무또한상관없다.“노래를부르는사람은언제나기다리는역할”(「언니의노래」)이고,“관객이없는가수가되거나/음역을갖지못한악기의/연주자”(「양동이」)가될지도모른다는각오도하고있으니까.그러나이토록결연한태도로정성껏꾸린무대에매료되지않을이가어디있으랴.독자라는이름의관객들은곧천천히객석을채워나간다.

한껏끌어안은기억으로단단해진몸
빗줄기아래서도이어지는완전한춤

나는인간이자신의신체능력을정할수있다고믿어요.이건선천적인것들에대한잔인한비평은아니에요.내가말하려는건,정말로,자기몸에어떻게받아들일지어떤것도자기몸에어떻게받아들일지모두자기자신만결정할수있다는거예요.
―「비가오기전춤을추는새」부분

이린아에게시는“붕붕거리던노래가다빠진그때까지도여전히남아있던것”(2018년『조선일보』신춘문예시부문당선소감)이다.노랫소리가사그라진뒤에도무대위에여전히남겨지는것은,마지막까지“배역을벗어나선안”(「최초의공연」)되는것은‘몸’일터.이린아의시는곧몸의시이기도하다.
우리몸은“1층을단단하게안정”시켜야하는“집”(「필라테스언니」)이어서,무너지지않으려면끊임없이경험이라는재료를골고루쌓고다져나가며손보아야한다.보드랍고연한경험만으로세워진집은오래버틸수없기에,다루기까다롭고위험한재료라고해서내던질수는없다.결국중요한것은이재료를적극적으로주무르는방식인‘기억’이며,“나의몸에어떻게”좋고나쁜경험들을“기억할지결정하지않으면안된다”(「비가오기전춤을추는새」).이에“정말로잊을수있다면,/네상처를포기할수있”(‘시인의말’)느냐는시인의물음은의미심장하게다가온다.
편식하지않고“기억하기좋은”단맛도“기억하기싫은”(「별안간의팬케이크」)쓴맛도전부삼켜단단해진몸으로,시인은노래가다빠져나간뒤에도무대를떠나지않고춤을춘다.이몸짓은“비가오든말든마음껏”(「비가오기전춤을추는새」)계속된다.“아프지않으면,/빗방울은으스러지는고통이되고말”(「아픈공기」)테지만,시인은이미상처마저껴안았으므로괜찮다.소리높여노래부르고,노래가끝난뒤에도끝까지춤추는것.이것이삶이라는무대를향한이린아의사랑이다.이제,또한번이린아의사랑을시작한다.

시인의말

정말로잊을수있다면,
네상처를포기할수있니?

2023년9월
이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