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창비시선 501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창비시선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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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격랑의 복판에서 오롯이 고결한 영혼, 한국 서정시의 거목 도종환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시력 40년의 역작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서 올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도종환의 열두번째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이 창비시선 501번으로 출간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는 “격렬한 희망”(박성우, 추천사)의 시로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 『사월 바다』(창비 2016)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뜻깊은 시집이다. 시인은 3선 국회의원이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현실정치에 투신하는 동안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온 “고뇌의 흔적들”(시인의 말)을 진솔한 언어로 토로한다.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순환하는 계절의 흐름에 실어 섬세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오랜 시간 맑고 투명한 시심을 잃지 않은 시인의 견결한 마음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특히 연륜과 내공이 엿보이는 단형시의 아포리즘은 서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한편 시집의 품격을 높인다.
나와 다른 것을 혐오하는 세태, 거친 분노의 언어가 들끓는 어둠의 시대 정중앙에서 시인은 알베르 까뮈가 말한 ‘정오의 사상’을 소환한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추구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조화, 즉 정오에 다다르게 된다는 사상이다. 정치와 시, 도시와 자연. 절대 맞닿지 않을 듯 보이는 양극에 동시에 발 디딘 채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치며 마음을 정순하게 가다듬어온 시인의 귀한 깨우침이 적확하고 미려한 시편들로 화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조리한 세상을 꾸짖는 그의 노성이 장엄하다. 자연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며 깨우침을 희구하는 기도는 감미롭다. 정신적 내전 상태에 다다른 현대인에게 “순결한 정신주의자의 고뇌”로 읽힐 이 시집은 “마음의 쓴 약”과 “회초리”(안도현, 추천사)가 되어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 깊이 퍼질 것이다.

저자

도종환

저자:도종환
도종환(都鍾煥)시인은청주에서태어났다.시집『고두미마을에서』『접시꽃당신』『지금비록너희곁을떠나지만』『당신은누구십니까』『흔들리며피는꽃』『부드러운직선』『슬픔의뿌리』『해인으로가는길』『세시에서다섯시사이』『사월바다』등이있다.신동엽문학상,정지용문학상,윤동주상,백석문학상,공초문학상,신석정문학상,가톨릭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제1부
깊은밤
쉬는날
정오에서가장먼시간
흐린날
바깥
쌍무지개
노을
낙조(落照)1
낙조2
동행

고요
사의재(四宜齋)
소금
사흘뒤
그의시
풀잎의기도
초저녁별

제2부
예감
구월태풍
공소(公所)
늦게핀꽃도아름답다
가을산길
가을강
가을나무
고마운일2
숲을떠나온지오래되었다
결실
매화나무
촛불네개
대림(待臨)
법고
백색감옥
이단
가난한절
밤바람
사랑

제3부
새해
콩떡
로잔
속유(俗儒)
심고(心告)
오후
폭설
입동
겨울나무
철쭉꽃
이른봄
초봄
편지
고마운일1
어떤꽃나무
꽃나무
라일락
좋은나무

제4부
사림(士林)
출항
도시장미

충돌
무너진신전
그때
연꽃
뜨거운고독
칠월
성탄의밤
겨울산
새집
차를기다리는시간
처서
전세
적요
전야

해설|진은영
시인의말

출판사 서평

정세의소용돌이속에서되새기는역사의가르침

전작과마찬가지로이번시집에도시인과정치인이라는두가지정체성과,거기서비롯되는경험이오롯이담겨있다.“시쓰다말고정치는왜했노?”라는물음에시인은“세상을바꾸고싶었”(「심고(心告)」)다고순정한마음을고백한다.또한역사를통찰하는격조높은비유로우리가곱씹어볼고민거리들을던진다.조선시대사림(士林)의정계진출을돌이켜보자.큰뜻을품은성리학자들이선조치하에서정권을잡았지만이내붕당간의소모적인반목이심화되고,외세의침략까지맞이한조선은심대한위기에처한다.급기야처절한징비(懲毖)의기록을후세에남겨야했던사림의실패를시인은작금의현실에대입한다.“꿈꾸던세상이오리라던믿음”은무너지고“수백년적폐를단몇해에바로잡는게/얼마나지난한일인지”뼈저리게깨닫는다.어째서“나라가그지경이되었는지”(「사림」)피를토하는심정으로묻는다.

이때“오해의화살”에맞고“비난의칼날에베여비통해”(「새해」)할지언정“적개심으로무장한유령들”(「정오에서가장먼시간」)을탓하지않는시적화자의모습은눈길을끈다.그는깊이절망하면서도“성정이남루해지는건오히려제가아닌가”(「속유(俗儒)」)자문하며반성한다.밤하늘의별을올려다보며“내안의어두운나를차분히응시”(「정오에서가장먼시간」)하는장면에는존재의본질을꿰뚫는신령한기운마저서려있다.이가없는참회의어둠속에서길잃은‘나’를이끌어주는것은이치를탐구하고백성의안위를염려하며‘기본’에충실했던옛성현의가르침이다.‘나’는다산정약용,퇴계이황등위대한스승들을떠올리며격물치지(格物致知),이용후생(利用厚生),경세치용(經世致用)과같은유학의정신을읊조리고흔들리는마음의중심을잡는다.번뇌와좌절을딛고역사의교훈과초심을치열하게좇음으로써간곡하고간절하게,정오의도래를주문하는것이다.

혼탁한세상을정화하고어지러운마음을추스르는시

이번시집곳곳에담긴아름다운자연물은감상의대상보다반성의매개체이자삶의지향에가깝다.시인은온갖모욕과증오가난무하는도시에서부대끼느라피폐해진심신을자연에의탁하여“죽음과영원한삶의이치밝게꿰뚫어보는/깊은지혜”(「이단」)를얻는다.예컨대“나무가득꽃피워놓고/교만하지않는백매화”(「꽃나무」)를보며절제와겸허의미덕을배우고,“자신에게오는모든순간순간을/받아들일줄”(「가을나무」)아는나무의미덕에서자연의섭리에따르는삶의경건함을깨닫는다.시적화자가자연으로부터느끼는감정은숭고함에가깝다.그에비한다면인간의마음은한없이초라하지만,그초라함마저숨기지않고털어놓음으로써시인은독자들에게공감의자리를내어놓는다.“혼탁한물”과“퀴퀴한냄새에휩싸인”가로수를바라보며자신또한“도시로불려나와산지오래되었”(「도시장미」)다고말하는담담한문장이씁쓸하게읽히는까닭이다.그러나흙먼지덮어쓴가로수라한들나무가아닐수는없다.시인도마찬가지다.세속의때가자욱한곳에거한들가슴에자연을품은이상시인은시인이아닐수가없다.그렇기에이무겁고“사나운운명을있는그대로받아들이자”(「사의재(四宜齋)」)다짐한다.거센태풍과노도에맞서는이인생이라는항해가“치열하고절박한생의시간으로축적”(「출항」)되리라믿고몇번이고다시출항을결심한다.역경앞에서삶의의지를더욱굳건히하는묵묵한자세에서우리는도종환시의심원한내력을확인할수있다.

불의의시대를함께건너는따스한동행

전쟁같은삶을살면서도시인은“세속의길과/구도의길이크게다르지않다”(「풀잎의기도」)는믿음을간직하며온유함을잃지않는다.‘부드러운직선’처럼섬세한감성과올곧은선비정신을동시에가꾼다.“제비꽃애기똥풀같은꽃만보아도마음이순해지고”,“잘하는것보다못하는게더많고/세상에는나보다훌륭한사람이많다는걸”명심하며,늘몸을숙여세상의낮은곳에온기를나눈다.고달프고외로운이들에게“하루를잘살아내는일이/가장큰복수”(「숲을떠나온지오래되었다」)라고진정어린위로를건네기도한다.이번시집을통해시인이그늘진인생의골목길에밝힌“사랑과연민의초”(「대림(待臨)」)옆에나란히서보자.사계절이무상하듯자정의암흑도언젠가걷히기마련이다.가녀린촛불하나도언젠가“칠흑같은세상”(「전야」)을밝힐무수한촛불이되고끝끝내정오의햇살로세상을비출것이다.

시인의말

“너는왜거기있는가?”
사월의꽃들이묻습니다.
대답을준비하는동안모여든생각들이꽃잎처럼흩날리며떨어져쌓입니다.

지금우리는‘정오에서가장먼시간’에와있습니다.
정오는밝고환한시간입니다.생명을가진것들이가장왕성하게살아움직이는시간입니다.사람과사람,사람과세상,사람과자연이푸르고따뜻하게공생하는시간입니다.알베르까뮈는정오를균형잡힌시간이라했습니다.지금우리의내면은균형이깨진채극단으로가있습니다.세상도극단으로치닫고있습니다.우리의내면이외화된게세상이라고한다면어둡고,거칠고,사나운세상은우리가만든것입니다.성찰없는용기,절제없는언어,영혼없는정치는전쟁같은일상을살아가게합니다.

“가을물같이차고맑은문장은흙먼지에물들지않는다(秋水文章不染塵)”라는말이있습니다.흙먼지몰아치는하루하루를살면서티끌과먼지에물들지않고산다는건쉬운일이아닙니다.세상은오탁악세(五濁惡世)나다름없고내면은갈수록황폐해지는데시의정신,시대정신을견지하는일은어려운일입니다.그나마시와만나는시간은영성을회복하는시간이었습니다.간절해지는시간,고요와균형을회복하는시간,거진이진(居塵離塵)하는시간이었습니다.시의위의(威儀)를지키며품격을잃지않는시,가슴에따뜻하게다가가는시,가을물같이차고맑아정갈하게마음을씻어주는문장,서로에게위로가되고작은힘이되어주는언어가되고싶었습니다.

“너는왜거기있는가?”
오월의나무들도묻습니다.
대답을하지못하고있는동안쌓인고뇌의흔적들을우선시로먼저내어놓습니다.부족하고부족한데가많은저를데리고이순간까지함께와주신분,여기까지동행해주신고마운분들께머리숙여깊이절합니다.고맙습니다.

2024년4월
도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