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고 여름 - 민음의 시 313 (양장)

여름 가고 여름 - 민음의 시 313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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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여름 가고 여름 오는 열대의 나라에서
다음 생을 향해 보낸 그리움의 편지
채인숙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이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시작 활동을 시작한 채인숙은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교포다. 30여 년간 이국의 땅에서 고립된 그의 마음을 달래 준 것은 시에 대한 추억과 시를 향한 열망이었다. 살아가는 땅은 달라졌지만 ‘시’라는 땅에서는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니, 그의 첫 시집은 그의 온 생애와 함께한 시에 대한 고백이자 “8000일을 한 계절 속에서” 살고 있는 열대의 시간 속에 남겨진 “병의 흔적”이기도 하다.

시집에는 이국에서 길어 올린 서사와 감각이 짙게 배어 있다. 아잔 소리가 없어도 시간을 맞춰 기도를 마친 소년,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르는 맨발의 여자들, 부기스의 마지막 해적이 되어 마카사르 항구를 떠난 열아홉 청년, 씨앗 무늬 사롱을 걸친 맨발의 남자, 자와어를 쓰는 이웃집 할머니……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활화산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항구를 가진 나라에서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실패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경건하고 소박한 삶이 시가 되는 순간들을 발견한다.

먼 나라에 살며 다음 생에는 고향을 떠나지도, 사투리를 고치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한 번도 표정을 바꾼 적 없는 여름을 “첩첩산중의 마음”으로 건넌다. 세월 속에서 천천히 나이 들며 사랑을 지속하자 적도의 햇빛도 조금씩 다른 깊이의 색을 보여 준다. 여름이 간 자리에 또다시 여름이 오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분주한 고독”이 깨어나고 “심해의 어둠”이 불을 밝힐 때, 낯선 곳에 불시착한 우리의 가슴에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단어의 빛이 쏟아진다.
저자

채인숙

1971년경남통영군사량도에서태어나삼천포에서성장했다.1999년인도네시아로이주했다.2015년오장환신인문학상에「1945,그리운바타비아」외5편의시가당선되며등단했다.

목차


자서(自序)


디엥고원13
인디언오션15
그리운바타비아16
여름가고여름18
밤의항구20
네덜란드인묘지22
밤의그림자극장24
유파스나무숲의은둔자26
무인도시퀀스28
나무어미30
해변의모스크32
아홉개의힌두사원으로가는숲34
미낭까바우,여자36
언덕위의승방38


다음생의운세43
옛집의언정45
격자무늬창문48
이사50
독작52
냉장고가없는야채가게54
레이디D56
천개의문58
우기의독서60
부조61
그린란드상어62
시니64
금요일66


내가당신의애인이었을때71
눈물73
제이74
까마귀가나는밀밭76
굳바이,시인78
비인80
노산여인숙82
저수지소네트84
사루비아화단86
장마88
북아현89
골목90


198993
습작일기94
사시96
우주허밍98
여름병동100
삼천포102
동대구행103
마지막장마104
배드민턴치는저녁106
죽은시인을위한낭독회108
사량110
메리제인구두112
출국113

작품해설-소유정(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다음생으로보내는전생의노래

채인숙시의주된공간은그가거주하는인도네시아다.데뷔작「1945,그리운바타비아」역시인도네시아자카르타를배경으로쓴시다.이국적인풍경안에서식민지라는공적기억과사랑이라는사적기억이섞이며만들어내는독창적인정조가특수하면서도보편적인모습으로재현된다.구체적인사건으로서는한국인의역사적경험과다르지만그서사의보편성은“바타비아의밤”을특정한시공간에서벗어나게한다.채인숙시의주된공간이갖는특수성은공통된시간의흐름과함께보편성을획득한다.소리를죽여혼자우는자바의물소나깜보자꽃송이,자바의검은돌계단같은이방인들의단어도어느새우리에게익숙한이름이된다.과거와미래로확장되는노래는낯설지만편안하다.

잃어버린재의서사

열대에부는찬바람은따뜻한느낌일까차가운느낌일까.언젠가이국에서맞았던훈풍은그때그감각을잊을수없는유일한바람이다.따뜻하지도차갑지도않았던그바람은바람그자체였다.그저움직임만이느껴졌다는점에서순수한바람이기도했다.시집을펼치면독자들이가장먼저만나게되는시「디엥고원」은“열대에찬바람이분다”는문장으로시작한다.이문장은순식간에우리를한계절이되풀이되는열대의섬나라로이동시킨다.뜨거워졌다차가워지기를반복하는내면을품은사람들은바깥을에워싼지독한‘한결같음’을어떻게견딜까.그때시인의눈에들어오는건“가장단순한기도”를올리는사람들의모습이다.“땅의뜨거움과/하늘의차가움을견디”기위해화산재를밟으며사라진사원을오르는여자들.더바라지않는경지만이다다를수있는초월의상태속에서인내와정화의상징이자지금은잃어버린재의서사가무심코일어선다.그들의이야기는순수한바람같고또지독하게한결같다.

그리움의동사

시집에는동일한상황이반복되는왕복운동에관한표현이자주등장한다.“밤이오고밤이갔다”거나“여름이오고여름이갔다”는식,또는“파도가가고파도가온다”와같은왕복운동에는떠나는행위와돌아오는행위의반복이각인되어있다.그리움은이토록오고가는동사의모습을취한다.시는병의흔적이기도하지만그리움을달래는치유의기록이기도하다.속절없이여름이반복되는계절과무관하게내면은덜컹거리며오고갈때“습기의무기”가무거워지면마음엔스콜처럼시가쏟아졌다.시집의후반부는시로안부를전하고시로안부를물었던시간들에대한회상으로가득하다.이상한식물과수상한동물들의나라에서출발한시원적그리움이열대에부는찬바람에섞여우리에게날아든다.어떻게울어야할지알수없을때마다습작한시의형체로,그칠수없는존재의형식으로.

책속에서

납작하게익어가는열매를따먹으며
우리는이도시에서늙어가겠지만

꽃은제심장을어디에감추어두고지려나

여름가고여름온다
---「여름가고여름」중에서

아홉개의힌두사원이있는산길을
신의등허리를타고오른다

나를놓치지말아다오
사람들은외롭지않겠다고사원을지었던거란다
두려운것은신이아니라외로움이거든
---「아홉개의힌두사원으로가는숲」중에서

잊혀진다는건
세월이주는모멸을견디는것이었지만

이제는기도조차모국어로하지않는다고

떠나온나라의폐사지를걸어나오듯
당신은낡은휠체어바퀴를매만지며
천천히사원을빠져나간다

저녁아잔소리가
거친이마주름을따라흐른다

오늘은금요일
---「금요일」중에서

안녕,하는말은비행기를닮았어요
날렵하고매끄러운금속같아요

언제부턴가사랑하는사람들이방방곡곡병실에누워
작별의인사를합니다

그러나내가없는동안에도
사랑을멈추지말아요
---「출국」중에서

추천사

채인숙의시를읽으면서왠지모르게가슴한쪽이흔들리는순간들이있었다.이별의술상에서불렀던노래처럼.생을관통해그리워했던사람에게끝내못참고쓴편지처럼.그러나불태워버린편지처럼.채인숙의시에는재가되어버린서사가있다.현대시가잊고있었던재의서사가열대의나라에서날을세우고있었던것이다.고통속에서부른노래만이고통을담을수있는법.미분되어날아가버리는시들이득세한세상에쌓이고쌓여서도달한슬픔을읽는아련한시간이있었다.
-허연(시인)

바람결에적은편지와같고,자리를지키며고요히바라보는나무같고,제속을보이지않지만길을열어주는바다같은몸으로.여름을건너우리에게닿은이시들은이제더이상“누구에게도읽히지않는시”가아니기에굳이“희망”을노래하지않아도될것같다.언제나혼자였을시이나이제는독자의손에함께인시이므로,“주목나무아래”에서“혼자낭독”하던목소리에하나둘보태어지는목소리를기대해도좋겠다.
-소유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