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 민음의 시 314 (양장)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 민음의 시 314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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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아름답게 채워질 가능성으로 가득 비어 있는,
하나도 없고 너무 많은 우리들을 위하여
2019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허주영의 첫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가 민음의 시 314번으로 출간되었다. 허주영 시의 화자들은 원하는 대로 몸을 바꾸거나 원하는 대상과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는, 변신이 가능하고 언어를 초월한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열다섯 소녀일 때도 있고, 소녀였던 적이 없는 누군가일 때도 있다. 동시에 소년이었던 적이 있다고 말하고, 곧바로 그 일이 가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허주영의 ‘나’는 자기 자신으로 우글거리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는 존재다. 비어 있어 변할 수 있고 비어 있어 채워질 수 있는. 허주영의 화자들은 여러 개의 ‘나’를 내세우며 친구들이 모이는 공터로 나간다.

허주영의 투명하고도 알록달록한 화자들은, 어느 공터에서 모두가 모이길 기다린다. “새로운 친구를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마침내 “다들 모였”을 때, ‘나’와 친구들이 하는 놀이는 ‘나’의 존재만큼 다양하다.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공놀이일 때도 있고, 서로를 찾아야 하는 숨바꼭질일 때도 있다. 다만 어떠한 게임을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는, 결국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식하는 시간 속에 있다. 공을 던지는 손을, 꼭꼭 숨어 버린 머리칼을 바라보고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를 읽는 동안 우리는, 공터 같기도 하고 내면 같기도 한 시 속에서 ‘진짜 나’의 조각에 눈을 뗄 수 없는 공놀이를, 혹은 ‘진짜 나’를 숨기고 싶은 숨바꼭질을 이어 간다.

이 헛헛하고 시끌벅적한 공터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출 때, 그들은 잠시 멈춰 텅 빈 채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없어도, 혹은 ‘내’가 여럿이어도 가능했던 ‘우리’의 시간, 놀이의 시간을 말이다. 다가가고 알아보고 만져지고 침입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깐 친구가 되었던 시간. 다른 날 공터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치면 또 다른 ‘나’로 변할 것이기에 공터에서의 ‘나’를 알은척하는 누군가를 경계하거나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서로에게 진입할 것이다. 허주영의 시집을 읽으며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한 독자 역시, 저마다 가장 나다운 여백을 둔 채로 “아름답게 비어 있”어, 그 텅 빈 공간을 활짝 열고 언제든 “서로를 알아” 갈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 간격을 가늠하며

나는 구멍을 바라보다 하마터면 그 안으로 들어갈 뻔했는데,
요즘은 자주 네가 떠오른다 난 널 다시 만난 적도 없는데
아니 네가 죽지 않았다면,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오늘따라」에서

허주영의 시에서 도드라지는 감각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루엣을 더듬는 손의 촉각이다. 일상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을 “정오”에도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하고, “언젠가”의 “계절”에 수많은 ‘나’들 사이의 간격, 모르는 ‘나’와 알 것 같은 ‘너’의 간격, 알았던 ‘너’와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린 ‘너’ 사이의 간격이 “만져질” 것이라 예측한다. 보이지 않는 간격을 더듬어 ‘나’ 혹은 ‘너’와 만나려는 허주영의 “측량”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도구가 되고 단위가 된다. “여름의 드릴 소리”, 해가 지면 생기는 그림자, “발자국”, “맥박의 울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감각은 민첩하고 성실하게 작동한다. 나와 너의 세계에서, 혹은 여러 개로 겹쳐진 나의 세계에서 존재들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간격을 탐색한다. 시인의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간격은 엄연히 존재해서 세계를 채운다. 허주영의 시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다. 여백으로 존재를 발견하는 일. 시인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부분을 본다. 그것이 내가 있는 자리와 네가 있던 자리를 보존하며 채워져 있는 것이라 믿는다.

■ 주인이자 손님으로

주인은 나, 손님은 나. 외각에서 안으로 다시 젓가락에서 포크로 차례를 지키며 질문과 대답을 오갔다.
-「손님과 주인」에서

허주영은 자리 바꾸기에도 능하다. 그의 시에서 변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는 듯 보여도 가장 자주 바뀌는 것은 주인과 손님의 자리다. 시 속 ‘나’들은 집주인의 집을 임대한, 누군가의 죽음이 있는 곳에 꽃을 두는, 낯선 마을의 골목에서 편의점을 발견하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대의 사진을 인화하는 손님이 된다. 어떤 자리는 결코 주인의 역할을 맡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해 분노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역할이 흐릿하여 언제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 기준이자 경계는 역시 ‘나’다. 집이나 도시 같은 ‘나’ 바깥의 자리에서 인물들은 “짧은 여백”의 “세입자”(「저에게 더 잘해 주세요」)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미래의 집」) 가늠한다. 그러나 ‘나’의 안쪽, ‘나’의 역사에서 이 자리 바꾸기는 더 자유롭고 빈번하다. ‘나’는 ‘나’의 탄생과 죽음을 체험하는 동시에 구경하고, 소문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소문의 청자가 된다. 주로 공간의 손님이지만 시간의 주인으로, ‘나’는 ‘나’를 기록하며 살아간다.
저자

허주영

1990년서울출생.2019년《시인수첩》으로등단하여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자서(自序)

1부
웃고있는빵13
돌잡이의비디오14
과일나무는과일을먹고자라고16
B컷의커버18
낯선여름과그해여름20
개에게물렸지요22
수축과이완24
유머와나26
귀환의시간들28
낮잠의순환30
이시대키드의사랑32

2부
소녀와남자애37
도시의세계38
골프와냉면40
낙과42
주인의산책44
거리의정전46
배경으로48
수소문50
초행길52
숨바꼭질54
오늘의운세56
여름을잊지않는법58
미래의집60

3부
저에게더잘해주세요65
생명연장의꿈66
내가맞습니까?68
몰아쉬는언덕70
손님과주인72
어깨를열어두는법74
동그란심박수76
일과일과일78
개의호흡법80
빈집83
사건의조직86
흑백의시대88
밤과음악사이90

4부
여름밤의론리95
길의약속98
빈센트반지하100
고양이를키우는사람102
닭과대야104
겨울4쿼터106
나무위의집108
개의꼬리를밟다110
쓰레기를버리는일112
오늘따라114
언제나그렇듯이116
잡동사니의매혹118
정오의무늬120
어떤자세는2인용122

작품해설김유림(시인)125
산문조립식가구141

출판사 서평

간격을가늠하며

나는구멍을바라보다하마터면그안으로들어갈뻔했는데,
요즘은자주네가떠오른다난널다시만난적도없는데
아니네가죽지않았다면,만나지않을수있었을텐데
-「오늘따라」에서

허주영의시에서도드라지는감각중하나는보이지않는존재의실루엣을더듬는손의촉각이다.일상의시선에는보이지않을“정오”에도“커다랗게”구멍이뚫린것을발견하고,“언젠가”의“계절”에수많은‘나’들사이의간격,모르는‘나’와알것같은‘너’의간격,알았던‘너’와알지못하게되어버린‘너’사이의간격이“만져질”것이라예측한다.보이지않는간격을더듬어‘나’혹은‘너’와만나려는허주영의“측량”에는세상의온갖것이도구가되고단위가된다.“여름의드릴소리”,해가지면생기는그림자,“발자국”,“맥박의울림”등이그것이다.이러한시인의감각은민첩하고성실하게작동한다.나와너의세계에서,혹은여러개로겹쳐진나의세계에서존재들이가까워지고멀어지는간격을탐색한다.시인의“손바닥”으로느껴지는,눈에보이지않는그간격은엄연히존재해서세계를채운다.허주영의시가하는일은그런것이다.여백으로존재를발견하는일.시인은텅빈것처럼보이는세계의부분을본다.그것이내가있는자리와네가있던자리를보존하며채워져있는것이라믿는다.

주인이자손님으로

주인은나,손님은나.외각에서안으로다시젓가락에서포크로차례를지키며질문과대답을오갔다.
-「손님과주인」에서

허주영은자리바꾸기에도능하다.그의시에서변하지않은채로가만히있는듯보여도가장자주바뀌는것은주인과손님의자리다.시속‘나’들은집주인의집을임대한,누군가의죽음이있는곳에꽃을두는,낯선마을의골목에서편의점을발견하는,내가태어나지않았던시대의사진을인화하는손님이된다.어떤자리는결코주인의역할을맡을수없음을깨닫게해분노하기도하지만,또다른자리에서는주인과손님의역할이흐릿하여언제든이쪽에서저쪽으로건너갈수있음을확인한다.그기준이자경계는역시‘나’다.집이나도시같은‘나’바깥의자리에서인물들은“짧은여백”의“세입자”(「저에게더잘해주세요」)로,“여기서살아남을수있을지”(「미래의집」)가늠한다.그러나‘나’의안쪽,‘나’의역사에서이자리바꾸기는더자유롭고빈번하다.‘나’는‘나’의탄생과죽음을체험하는동시에구경하고,소문의주인이되는동시에소문의청자가된다.주로공간의손님이지만시간의주인으로,‘나’는‘나’를기록하며살아간다.

책속에서

내문장이아름다운건비어있기때문이라고

나의탄생은전적으로당신의기록에의지한다
어린나는지금의나만큼물질이라서
나와당신의사이는,나와나의시간이된다
---「돌잡이의비디오」중에서

공놀이를하자고해놓고
그애는배드민턴을들고온다

나는축구화를신고서있는데
발등위로쏟아내는라켓
휘두르면죄다다른소리가났다
---「수축과이완」중에서

한번에한명씩나는나를낳는다
나를낳느라엄마를낳지못한다
태어나고싶어우는엄마
날낳았다고우기는엄마주장하는엄마발을구르는엄마
엄마는나를낳는나를목격한다
그렇게도작은웅크림들
---「수소문」중에서

다들모였다고하지만내가없잖아

촛불을모두켜기도전에케이크모서리를한움큼쥐었다몇개의어금니자국이버터크림위에미끄덩맴돌았다넘어가겠지기념이그랬던것처럼먹자꾸나,그래도생일이잖아잠깐의어둠과심지의냄새를기억한다
---「숨바꼭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