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 민음의 시 323 (양장)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 민음의 시 323 (양장)

$12.00
Description
강은교 신작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강은교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생의 말년을 가리키는 말로 노년기 대신 ‘노을기’라는 말을 쓰고 싶어진다. 생의 노을이 지는 시간, “강물 위로 서서히 가라앉”는 해처럼 가만히 낮아지는 시간, “검은 몸부림”을 뒤에 남기고 사라지는, 그러면서 또 살아지는 시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을기에 이르러 황혼의 조명 아래 환히 드러나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그 가볍고도 무거운 생의 진경을 담아낸다.

『풀잎』 , 『허무집』 등의 시집을 통해 허무의 심연과 윤회적 가치관을 노래한 시인이 근래 천착해 온 테마는 ‘당고마기고모’다. ‘당고마기’는 ‘바리공주’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 신화다. 당고마기 서사의 핵심에는 잉태와 출산이 있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수난을 겪은 여성이 신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신화 등 다양한 서사들이 당고마기를 중심으로 전승된다. 앞선 시집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시집에도 당고마기고모가 등장한다. 신화적 인물에 더해 혈연 기반의 호칭이 더해져 ‘당고마기고모’는 유장하고 장대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강은교만의 거리가 된다.

당고마기고모에게서 계승된 우리의 고통, 우리의 고통으로 연장된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는 ‘깨진 아름다움’이 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노을기의 아름다움은 미래도, 환상도, 다 깨진 뒤에 알게 되는 누추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에는 서글픈 가운데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대범하고도 담대한 사랑의 미학이 있다.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드넒은 여기 사랑하올 것들” 모두가 손안에 부서진 채 반짝일 때, 강은교의 언어는 깊은 허무의 공동체에 구전되는 사랑의 언어가 된다.
저자

강은교

저자:강은교
1968년월간《사상계》신인문학상에시「순례자의잠」외2편이당선되어등단했다.시집『허무집』,『빈자일기』,『소리집』,『우리가물이되어』,『바리연가집』등이있고산문집『그물사이로』,『추억제』,『젊은시인에게보내는편지』등이있다.한국문학작가상,구상문학상본상을수상했다.동아대학교인문과학대학문예창작학과명예교수로지내고있다.

목차


자서(自序)

1부운조의,현(絃)을위한파르티타
내가팔을뻗치면13
꽃을끌고14
용서15
붉은달빛16
저하늘의피리소리가17
너를잃으니18
교목(喬木)19
부활20
가야금21
자갈길22
애란잔디23
가장기-인소리24
무수한내가25
선물26
너의길28
저녁식탁29
벽30
붕대31
아무데도32
사랑하는사람은33
계단34
그작은주점35

2부당고마기고모의여행노래
당고마기고모의굽낮은구두39
하늘색가위42
환상가게44
샛골목안우체국48
당고마기고모는살짝절름거리네50
당고마기고모의흉터53
고모의자줏빛,낡은가방54
찻집,‘1968년가을’56
초록빛식탁59
당고마기고모네싱크대62
짜다만붉은털실64
당고마기고모네창밑67
이옥봉의집68
너무너무안락한의자71
슈퍼마켓을나오는고모74
빗속에혼자앉아있는당고마기고모76
고모의기도서78
오래전에쓴시:비마(飛馬)80
고모의골목81
노을이질때82
필립스다리미84

3부내것이아닌나의
‘아니고’들에서돌아오는밤89
인생91
키큰금목서가내게말했네93
어떤전시장에서94
봄·산길96
앵두나무가지를부러뜨리다97
검은창들___구형왕릉에서98
시집값100
거대한오후101
내것이아닌나의102
TV를들여다보네104
만두106
나는결국DMZ에가지않았다108
새가난다-어느시인에게바침110
양배추,그리고113
그아이의방114

출판사 서평

하늘색가위

객관적상관물을찾는것은문학작품을감상하고이해하는대표적인방법이다.백석시「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등장하는“굳고정한갈매나무”나이청준단편소설「눈길」에등장하는치자나무같은것들이대표적인객관적상관물이다.독자들은갈매나무나치자나무에대한묘사를통해주인공의내면을간접적으로이해할수있고,나아가작가가작품을통해전달하려고하는정서와생각에다가갈수있다.이번시집에서눈에띄는객관적상관물이라면단연‘하늘색가위’다.시「하늘색가위」에등장하는이사물은작중화자가잃어버린물건이자화자의당고마기고모가애지중지하던물건이다.시는화자가잃어버린가위를찾으러집안여기저기,동네구석구석을살피던중하늘색가위를찾는것인지그가위를아끼던당고마기고모를찾는것인지모호해지는지점에서광활해진다.구체적인시간과공간,그리고사물이상징적인시간과공간,그리고존재의차원으로비상할때,일평생교차하며노동한가위질과“맨발에슬리퍼를신은채어딜헤매고”있을당고마기고모의삶이겹쳐진다.하늘색가위의가위질은당고마기고모의고단한걸음걸음과닮았다.

필립스다리미

그리고다리미가있다.「필립스다리미」에서다림질하는일상적순간은어느새바다위에배가떠가고파도가이는비일상적풍경으로바뀐다.손에쥐고다림질하는다리미는바다위를떠가는배가되고,다리미가뿜어내는스팀은파도치며일어나는거품이된다.다리미가지나간자리마다펴지는옷감들의주름.주름의파도를옷감들이줍는다.이제다림질하는평범한순간들은다만옷에남겨진주름을펴는것이아니라옷에새겨진시간을펴는행위가된다.시간을편다는것은흠결없는시간을상상하는것이아니다.옷감위를다리미가지나갈때펴지는것은린넨이나실크의주름이지만그실체는시간의주름속에감춰진기억들이다.

시의늪을벗어나

책의시작을알리는첫페이지에는시인이쓴서문,즉자서가있다.이시집의자서에서강은교시인은다음과같은의미심장한문장을쓴다.“시여,달아나라,시여,떠나라,시의늪들을./그때시는비로소일어서리니.”시에대한결심인동시에인생에대한결심이라고해도오독은아닐것이다.인생이여,달아나라,떠나라,인생의늪들을.그때인생은비로소일어서리니.일평생시로살아온시인이시에대해하는단한마디말은시로부터달아나라는것.미래와환상으로부터달아나라는것,그때비로소미래도환상도,말하자면우리가기다리는인생이우리를향해돌아볼것이니.

책속에서

“고모,노을이질때가됐어요”나는이층계단에올라서서외쳤어.그리고마구뛰어올라갔어.구석에있던의자를번쩍들고,

고모가느릿느릿걸어오셨어.고모는의자에풀썩앉으셨어.마치싫은자리에라도억지로앉는듯이,“고모,고모,어디아프세요?”“아니,아니,노을을보려니내가사라지는것같애”고모의비스듬한웃음,나는고개를숙였어.나도사라지는것같았기때문이야.우리는나란히해를바라보기시작했어.
---「노을이질때」중에서

“환상깨기”첫줄을읽는다.‘우리는너무환상에빠져있다.’그렇게시작되는그책,아메리카노를마신다,책장을넘겨본다,나는고개를끄떡이며,끄덕이며우선커피의환상부터깬다,목마름을축여주리라는그환상,달콤하리라는그환상,그환상,깬다,

홀한구석유난히어두워보이는한켠에노트북을켜는청년이보인다,읽던페이지가조그맣게속삭인다,환상을깨게,그책의저자를넘어서리라는생각을,한명제뒤엔늘다른명제가나타나지,저자만이아는명제가,
---「환상가게」중에서

나는하늘색가위의인상착의를말해주었지만,맨발에슬리퍼를신고짧은바지를입었으며손에는주머니를들고있음……뭐그렇게설명하곤했지,

오,나의하늘색가위,당고마기고모가그렇게도애지중지하던하늘색가위,지금맨발에슬리퍼를신은채어딜헤매고있나,아니,어디선가그넓은양팔을벌려흙이라든가,그무슨꽃가지를안고있나
---「하늘색가위」중에서

배같은필립스다리미
바다를가네

파도처럼
스팀을내뿜네

실크들이,린넨들이
파도를줍네

방안가득돛들이춤춰
풀먹인옥양목목소리펄럭펄럭춤춰
---「필립스다리미」중에서

다시살아도이렇게살게될거야
스무살에연애를하고
둬번쯤긴키스를꿈꾸다가
사소한지모르는결혼을하고
사소한지모르는이별을하고
헐떡헐떡뛰어가버스를타고
잠시숨을멈추는동안
사소하고사소하게정찰표를들여다보네
하루에도몇번씩엘리베이터로승천을하고
에스컬레이터로세상을굽어보며
내가종족의한명임을짐작하네
문득별이가까이오는저녁이면
뉴스를보며내가그여러통계의하나임을실감하고
사소하고사소하게잠드네
---「인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