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동강면 무덤떼의 축조 집단 연구 (양장)

평양 대동강면 무덤떼의 축조 집단 연구 (양장)

$19.30
저자

김영섭

저자:김영섭
인하대학교고고학박사,융합고고학과전공
중원대학교박물관학예사
논문
「고려서북면경계재검토-강동6주를중심으로」(강원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2019)
「동녕부자비령과고려서북경계」(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국학연구원,2021)
「고려西京위치에대한고찰」(강원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2023)

목차

I.서론
1.연구목적
2.연구대상및연구방법26
1)연구대상26
2)연구방법30
3.평양시대동강면무덤떼의발굴ㆍ조사

II.선행연구검토

III.평양대동강면무덤떼의구조및껴묻거리
1.나무덧널무덤(木槨墳)
1)구조
2)출토유물
2.벽돌방무덤(塼室墳)
1)구조
2)출토유물

IV.평양대동강면무덤떼의검토
1.축조시기및특징
1)축조시기
2)특징
2.낙랑군의설치지역

Ⅴ.평양대동강면무덤떼연구
1.축조집단
2.무덤의변천과정

VI.결론

출판사 서평

평양시대동강면대형흙무덤의축조집단은낙랑군과관련이없다.
그렇다면이무덤들을만든사람들은누구인가?

평양시대동강면지역대형흙무덤의축조집단이낙랑군이라는주장이있지만,이주장을뒷받침할문헌자료와고고학자료는부족하다.그런데도한국을포함한현재동북아시아역사학계는지금의대동강지역을낙랑군설치지역으로주장하며,대동강지역을포함하는한반도북부지역의기원전1세기~4세기까지의역사적상황에관한연구를하지않고있다.
이책은평양시대동강면대형흙무덤의축조집단이낙랑군과관련이없음을관련된고고학자료와문헌자료를종합해밝히고,새롭게이대형흙무덤의축조집단을추정하여고대한반도북부지역의역사적상황을조금이나마밝혀내고자한다.

흉노와교역할정도의강력한다른집단이대동강일대대형흙무덤축조가능성

기원전108년서한(西漢)무제(武帝)는위만조선(衛滿朝鮮)을멸망시킨뒤그강역(疆域)에4군(郡)[낙랑군(樂浪郡),현토군(,진번군(眞番郡),임둔군(臨屯郡)]을설치했다.기원전82년서한소제(昭帝)는진번군과임둔군을폐지하고그소속현(縣)을낙랑군과현토군에편입했다.3세기초동한(東漢)의요동태수(遼東太守)공손강(公孫康)은낙랑군남쪽을나눠대방군(帶方郡)을설치했다.
한4군설치지역은고조선(단군조선)ㆍ위만조선의강역뿐아니라고구려ㆍ백제의초기중심지를추정할수있는단서를제공해한국고대사에서중요한문제로인식된다.『삼국사기』「지리지」에고구려주몽(朱蒙)이처음도읍한곳인흘승골성(紇升骨城)이현토군의경계라는기록이있다.백제온조왕은처음위례성(慰禮城)에도읍했지만,낙랑군과계속해서군사적으로충돌했기에도읍을한성(漢城)으로옮길수밖에없었다.한4군의설치지역은낙랑군을중심으로추정되고있다.낙랑군은여러역사책(史書)에나머지3군보다그설치지역을추정할수있는기록이많이남아있기때문이다.

낙랑군의설치지역은조선후기의역사지리관련저술에서여러지역으로추정하기시작했고,대일항쟁기를거쳐현재까지이어지고있다.낙랑군의설치지역에관한주장은다양하다.그런데현재학계는일반적으로낙랑군의설치지역을지금의평양시대동강남쪽으로인식하고있다.그이유는대일항쟁기에발굴ㆍ조사한평양시대동강면일대의대형흙무덤(封土墳)이낙랑군과관련되어있다고추정하기때문이다.
1909년이대형흙무덤들가운데처음으로석암동고분이발굴ㆍ조사되었다.조사결과,석암동고분은벽돌방무덤(塼室墳)이었고,껴묻거리(副葬品)로칠기테두리장식(漆器金銅),청동거울(銅鏡),질그릇조각(土器片)등이출토되었다.당시일본학자들은석암동고분의축조집단을고구려(高句麗),한(漢)의낙랑군관리,한의낙랑군호족(豪族)등으로추정했다.그런데1911년부터1913년까지진행한평양및황해도지역의고적(古蹟)조사에서수집된유물이낙랑군과관련이있다는주장이제기되었고,이후석암동고분을포함한이대형흙무덤들은한의낙랑군관련유적으로확정되었다.이대형흙무덤들은현재까지낙랑군이지금의대동강유역에설치되었음을뒷받침하는강력한고고학자료로활용되고있다.그러나1909년부터1910년까지발굴ㆍ조사된이대형흙무덤들의개수는불과5기였고,시기나축조집단을추정할만한껴묻거리는모두도굴당했다.그리고당시는한반도와중국의고대무덤에관한조사나연구도거의없었다.이렇게고고학자료와연구가부족한상황에서일본학자들은역사기록을주된논거(論據)로해서이대형흙무덤들을낙랑군과연결지었다.
당시의일본학자들은주된논거로『수경주(水經注)』와『괄지지(括地志)』를제시했다.『수경주』는중국북위(北魏)의관리출신인역도원이3세기무렵에쓰인작자불명의책인『수경(水經)』에자신의주석(注釋)을단책이다.『수경』은하천의발원지,경류지(經流地),합류지,입해지(入海地)등을간단히적은책이다.이처럼한반도평양시지역에낙랑군이설치되었다는주장의근거가되는역사기록은정확성과신뢰성에문제가있을뿐아니라역사연구가아닌정치적주장이라고생각한다.고고학조사나연구도평양시지역에낙랑군이있었다는주장과일치하지않는다.1932년평양역선로주변에쓰레기장을건설하는과정에서벽돌방무덤1기가발견되어조선총독부는발굴ㆍ조사를했다.발굴ㆍ조사를한결과,‘영화9년(永和九年)’이란기년명(紀年銘)이새겨진벽돌(塼)이출토되었다.영화9년은동진(東晉)목제(穆帝)시대인353년에해당한다.이벽돌방무덤은그때까지발굴ㆍ조사한평양시대동강면지역벽돌방무덤의구조나껴묻거리와비슷한모습을보였다.평양역고분의발굴ㆍ조사로평양시대동강면지역의대형흙무덤의예상축조시기가4세기후반으로밀려났다.

평양시대동강면지역대형흙무덤의축조집단을낙랑군이라고주장한연구자들은“낙랑군은기원전108년에처음설치된후317년에고구려공격으로멸망했다.”라고주장한다.그렇다면평양시대동강면지역의대형흙무덤은4세기초반이후에축조될수없다.그런데1932년평양역무덤은낙랑군이멸망했다고하는317년이후에축조되었으므로이들의주장에어긋난다.주경미는한의하사품(下賜品)으로생각된석암리제9호무덤의금제띠쇠와같은금은제품(金銀製品)이교역품(交易品)이었다고주장한다.그는석암리제9호무덤의금제띠쇠를포함해서다른여러무덤에출토된금은제품이흉노(匈奴)무덤에서출토된금은제품의제작수법ㆍ형태ㆍ무늬등과비슷하다는점을발견했다.따라서그는평양시대동강면대형흙무덤에서출토된다양한금은제품은한의황실이나조정에서낙랑군관리에게하사한것이아니라흉노와낙랑군사이의교역품이었다고주장한다.하사품이아니라교역품이라는점은동의하지만,한의변경군현에불과한낙랑군이흉노와직접교역했을가능성은매우작다고생각한다.그래서흉노와교역할정도의조직력,경제력,군사력을가진다른집단이이대동강대형흙무덤을축조했을것으로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