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달이 떠오릅니다 - 삶창시선 70

분홍달이 떠오릅니다 - 삶창시선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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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작고 낮은 목소리, 그러나…

박영선 시인의 시는 얼핏 보면 단순하게 보이지만 조금 더 시 속으로 들어가면 순결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시를 언어의 기술로 쓴다고 하지만 그 언어도 결국 시인의 영혼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시에서 느끼는 시인의 영혼은 언어의 기술 능력과는 별개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박영선 시인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이번 시집은 첫 시집인데 그만큼 또 순결한 영혼이 바짝 다가온다. 예를 들면 시집의 가장 앞자리에 실린 「10월」이란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소리가 없는 것들은
적막한 혀를 가지고 있을 거야
노래를 불러줄까
쓸쓸한 나의 노래는 늘 낮은음자리
중얼거리는 손가락들이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렸다
_「10월」 3연

박영선 시인의 목소리는 이렇듯 작고 낮다. 발문을 쓴 황규관 시인의 말마따나 이것은 정직의 모습이다. 박영선 시인은 이런 작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돌아보고 생활을 돌아본다. 충혈된 자아가 너무도 흔한 시대에 이런 목소리는 읽는 이를 고요하게 한다. “강은 흐르고 나는 물소리에 귀를 적시다/ 들풀 가득한 오솔길을 맨발로 걷고 싶네”(「길 위에서」)라는 표현이나 “작은 몸 하나에/ 많은 손들이 나왔다/ 손들은 해보다 더 반짝거렸다”(「기억의 봄」) 같은 감각적인 언어는 더욱 그것을 촉진시킨다. 그래서 시집을 다 읽고나면 작은 숲을 지나온 느낌을 준다.

어느 해 바람 불고 꽃피우는 날
가만히 눈감고 불러볼
쓸쓸한 이름
후회처럼
내게 돌아올 시간들이여
주저했던 발걸음이여
기나긴
먼지의 시간들이여
_「먼지의 시간」 부분

이 시에서도 화자의 목소리는 작고 낮지만 신생의 시간을 불러들이는 주술이다. 그런데 그 주술이 요란하거나 선언적이지 않다. 도리어 “주저했던 발걸음”이나 “먼지의 시간들”을 가만히 긍정하는 화자의 태도가 보인다. 즉, 박영선 시인의 작고 낮은 목소리는 타자를 시인의 마음 안으로 모시기 위한 본능적인 태도에 가깝다.


타자를 자신 안으로 모셔오기

시집에 실린 여러 작품에서 타자를 모시는 모습은 희미하게 존재한다. 시인 자신도 모르는 이 본능적 태도에 대한 예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거기에는 일종의 ‘주저’가 있는데, 이 주저는 정직에서 나오고, 주저는 작고 낮은 목소리를 발한다.

한참을 돌아서 걷는 사이
스쳐가는 사내의 젖은 얼굴을 보았다
마른 나무처럼 흔들거리는 몸
트럭이 떠난 뒤에도
엔진 소리는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_「엔진 소리」 부분

이 시는 화자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목격한 어느 택배 노동자의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인데,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하는 아이와 통화하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약간의 큰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데, 시에서 화자는 아빠와 아이가 함께 아픈 것을 예민하게 붙잡아낸다. 하지만 감정을 과잉되게 얹지 않고 떠난 트럭이 남긴 “엔진 소리”만 모셔온다. “오래도록”이라는 한 단어에 그것이 응축되어 있다.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길
손목의 가는 실금을 따라
분홍물이 들었네
예감은 낯설지도 않아서 붉은 꽃처럼 울었네
_「꽃 보러 갔다가」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단지 ‘꽃구경’을 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꽃”을 자신 안에 모셔온 경우이다. 그런데 타자를 모셔오는 것에는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일이 수반되기도 한다. 오로지 작고 낮은 목소리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는 고통을 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예감은 낯설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는 “힘없이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일을 예감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타자를 모셔오는 일 자체에 어떤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에 조금 더 가깝다. 이 시의 마지막이 “붉은/ 봄”인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삶의 고통을 말할 때도 박영선 시인은 작고 낮게 말한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 이 미덕도 시인 스스로 자기 삶에 정직하기에 가능한 경지다.
발문을 쓴 황규관 시인이 시의 정직과 삶의 정직을 말한 것은 이런 작고 낮은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다들 목소리들이 커진 현대 세계에서 작고 낮은 목소리는 희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작고 낮은 목소리가 크고 높은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릴 때가 있다. 작고 낮은 목소리에는 청자의 귀를 여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영선 시인의 첫 시집 『분홍달이 떠오릅니다』는 그런 시들로 빼곡하다.
저자

박영선

전북김제에서태어나광명에살고있다.『조금더사소해지는사이』등동인시집이있고,‘시락’동인에서활동중이다.

목차

시인의말·4

1부

10월·12
거짓말·14
기억의봄·15
길위에서·16
당신의안부는·17
마른잎지는저녁에·18
붉은새·20
시(詩)·21
안구건조증·22
어떤죽음에관하여·23
예수와나·24
조문·26
먼지의시간·28
팔월·30

2부

다림질·34
젖은책·35
엔진소리·36
폭설을꿈꾸는밤·38
즐거운나의집·40
집·42
빗소리·44
소문·46
소리쳐·47
식탁에서밥을먹는법·48
코끼리를보았다·50
하안동을기억한다면·52
쏘세지부치는저녁·54

3부

자화상·56
사월,그리고·57
가을밤·58
꽃·59
겨울바다에·60
꽃보러갔다가·62
분홍달·63
다시,봄기형도에게·64
사월,독산역·66
산수유나무아래·67
여름의끝·68
이사·69
이팝꽃필적에·70
검은잎사귀들·71

4부

목련이질때·74
감기·76
그림자도시·78
도시의눈·79
너에게·80
일요일·81
갇힌사람·82
기린탐구보고서·84
눈화장하는여인·86
심부름·88
엘리베이터-19·90
티비가자란다·92
흰눈을가진아이들·94
가방을사세요·96

발문

시의정직과삶의정직(황규관)·99

출판사 서평

타자를자신안으로모셔오기

시집에실린여러작품에서타자를모시는모습은희미하게존재한다.시인자신도모르는이본능적태도에대한예를찾아보는것은어렵지않다.다만거기에는일종의‘주저’가있는데,이주저는정직에서나오고,주저는작고낮은목소리를발한다.

한참을돌아서걷는사이
스쳐가는사내의젖은얼굴을보았다
마른나무처럼흔들거리는몸
트럭이떠난뒤에도
엔진소리는오래도록남아있었다
_「엔진소리」부분

이시는화자가사는“아파트주차장”에서목격한어느택배노동자의모습을스케치한작품인데,학교를가지않겠다고하는아이와통화하는내용을옮긴것이다.아파트주차장에서약간의큰목소리는듣고싶지않아도들을수밖에없는데,시에서화자는아빠와아이가함께아픈것을예민하게붙잡아낸다.하지만감정을과잉되게얹지않고떠난트럭이남긴“엔진소리”만모셔온다.“오래도록”이라는한단어에그것이응축되어있다.

힘없이미끄러지고주저앉은길
손목의가는실금을따라
분홍물이들었네
예감은낯설지도않아서붉은꽃처럼울었네
_「꽃보러갔다가」부분

이시에서화자는단지‘꽃구경’을간것처럼보이지만결국“꽃”을자신안에모셔온경우이다.그런데타자를모셔오는것에는“힘없이미끄러지고주저앉은”일이수반되기도한다.오로지작고낮은목소리로만가능한것이아니라상대에따라서는고통을통해야만한다는것이다.그런데시인은“예감은낯설지도않”다고말한다.이는“힘없이미끄러지고주저앉은”일을예감했다는뜻이라기보다는,자신의삶에서타자를모셔오는일자체에어떤고통이필요하다는것을이미알고있었다는뜻에조금더가깝다.이시의마지막이“붉은/봄”인것은그것을증명한다.하지만삶의고통을말할때도박영선시인은작고낮게말한다.고통을과장하지않는이미덕도시인스스로자기삶에정직하기에가능한경지다.

발문을쓴황규관시인이시의정직과삶의정직을말한것은이런작고낮은목소리때문일것이다.다들목소리들이커진현대세계에서작고낮은목소리는희귀하기까지하다.하지만작고낮은목소리가크고높은목소리보다더잘들릴때가있다.작고낮은목소리에는청자의귀를여는신비한힘이있기때문이다.그리고박영선시인의첫시집『분홍달이떠오릅니다』는그런시들로빼곡하다.

시인의말

1990년대『샘터』를인연으로시작된동행이
참오래걸렸다는생각이든다.
이시집으로
오래기다렸던나의시(詩)에게
따듯한햇빛을보여주게된것은
참기쁜일이다.
사는동안시는힘이었다.
앞으로도그럴것이다.
천천히해찰하며
걸어갈작정이다.

나의가족,‘시락’동인,
그리고사랑했던모든이들에게
감사를전한다.

책속에서

정오무렵의해는높이오르고
햇빛은지나치게날카로웠다
아파트유리창마다햇살에찔린자국들
길다란화분들이조금씩야위어갔다

마른풀위로사과가떨어지고
허기진개미들이몰려들었다
비명도없이쓰러져가는날것들
누가마른잎한장덮어주랴

소리가없는것들은
적막한혀를가지고있을거야
노래를불러줄까
쓸쓸한나의노래는늘낮은음자리
중얼거리는손가락들이
주머니속에서꿈틀거렸다

반성도후회도희미해져가는이마위로
날이저문다
발자국소리가없다
---「10월」중에서

바람길이었을까
얼기설기엮은철망사이로사라져간
그대의손,손
번쩍이는불빛몇점보았을뿐인데
흔들리는노래잠깐들었을뿐인데
바람은아무말없이
너의등을밀었지
텅빈시멘트바닥을울리던
아아
죽음은지천으로널리고
새롭지도않아서
쉽게잊혀져가고
낡은비상구만즐비한이곳에서
붉은새가된사람들을
나는알고있다
---「붉은새」중에서

사각형수조
어린구피들이사라져갔다
어떤이는
어미구피가배가고파잡아먹었을거라했고
어떤이는크고강한입을가진늙은
금붕어의소행일것이라했다
나는청소부비파에대해강한의심을품기시작했다
온종일돌위에찰싹붙어있던비파는
가끔씩유리뒤에달라붙어나를살피곤했다
어린구피는찾을수없고
소리없이흔들리는수초사이를
유유히헤엄쳐가는금붕어의비늘이반짝거릴뿐
비파와나는
오늘도눈이마주쳤다
---「소문」중에서

바람불고
배롱나무꽃들가려움에부풀어집니다

몽글몽글진분홍꽃을보아요
그녀의립스틱처럼도발하네요
태풍이몰려와요
휘청거리는나뭇가지를붙잡아줘요
펄펄흩날리는꽃
사랑따위는잊어버려요
당신의머리위에화관처럼빛나고싶어요

꽃이지는저녁
앞서걸어가는사람뒤로
배롱나무한그루
마른손을흔들며따라갑니다
휘청거리며멀어집니다
가장낮은땅위로
분홍달이떠오릅니다
---「분홍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