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국가보안법에 묶여 웃는 시
“1948년 국가보안법이 생겨 1년 만에 11만 명”을 가두었던 올가미가 어느 날 한 노동자 시인을 덮쳤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인 양기창 시인이 바로 그다. 시인은 얼마 전 보석으로 출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분단 정권을 유지하는 데 그 밑거름이 된 국가보안법의 올가미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인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옥중에서 쓴 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여전히 기개가 꺾이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양기창 시인이 가진 시야와 가슴이 지금 당장의 노동 현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여느 노동자 시인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양기창 시인의 영혼은 우리 역사의 깊은 상처에도 닿아 있는바, 분단체제를 숙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눈에 이것이 거슬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쾌활한 유머가 있고 앞선 혁명 열사들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살아 있다.
일단 발라보자 참기름!
차도가 있나 몰라
한 시간도 안 되어 한 번 더 찍어 발라
그렇게 몇 번 더, 고소하다 했더니
헉, 아침 거울에 비친
더욱 보도 사도 못 해버린 내 얼굴
퉁퉁 부어올라
_「참기름」 부분
“법무부 자비 물품 신청서 식품란/ 3,970원짜리에 눈이 번쩍 뜨여” 바른 참기름에 얼굴에 피부병을 얻었는데, 처방 받은 항생제를 복용하면서 “참기름 발랐다는 사실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구치소 안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의 진술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쾌활함을 잘 보여주며 이 쾌활함은 시집에 실린 전체 작품을 건강하게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비록 “딸아이로부터 세 번째 인터넷 서신을” 받고 “가고 싶다/ 보고 싶다/ 가족들과 꽃 피우는 우리 집으로 달려가고 싶다”(「꽃동산-독방 회상 2」)고 하지만 그것은 얕은 감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녹차 나무가 그리워”지기도 하고(「녹차 나무-독방 회상 3」), 음식의 고장 광주 사람을 주눅들게 한 엄 부위원장 부인이 만들어준 ‘미더덕 젓갈’이 먹고 싶다고도 한다.(「미더덕 젓갈-독방 회상 7」)
그렇다고 인신을 구속한 감옥에서 바깥 세계만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수 선생에게 시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백풍암(白風庵)), “법무부 마크가 찍힌 모포 뒤집어쓰고서” 자신이 겪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기도 하며(「솜이불 덮으며」), “오빠들 뒷바라지하느라 문맹아였지만 맹문이는” 아닌(「금강경」) 어머니의 삶도 다시 생각해본다. 결국 국가보안법 덕분에 시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역사를 다시 산 셈이다. 그렇다고 독방에 갇히면서 벼락처럼 다가온 깨달음인 것은 아니고 시인이 투신했던 운동의 연장이지만 고요 속에서 내면에 깊이 아로새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의 증거다.
여기 흰 바람벽이 있어 여기 수원에도 내린다
내 눈 내 코 내 입 내 귀로, 나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심지어는 심장에 남은 기억으로도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용이 승천하는 적벽에
청태(靑苔)와 부처손을 품은 흰 바람벽에 투영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다
_「비 내리는 풍경」 부분
소박하지만, 크나큰 마음
발문을 쓴 조성국 시인에 의하면 “국가정보원이 구속영장을 들어대는 증거의 하나”였던 시 「쏠 테면 쏘아 봐라」는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이 시는 “빨치산 혁명 전사”들에게 바친 작품인데, 다시 조성국 시인의 발문에 기대 보면 “추모식에 참석한 눈빛 형형한 백발의 빨치산들이 뒤로 자지러졌다”고 한다.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차고 넘친다.(이상, 「쏠 테면 쏘아 봐라」)
양기창 시인의 ‘세계관’에서 호쾌함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작품을 굳이 들자면 「오키나와」와 「사북, 봄날의 교향곡」이 있다. 「오키나와」는 전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시의 화자가 일본과 오키나와를 여행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한 관광은 아니다. “도쿄 서점을 나오면서”로 시작되는 「오키나와」는 “가토 상”이 들려준 일본에 대한 이야기와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여정,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만난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오키나와 민중의 구김살 없는 묘사로 이어진다. 다음을 보라.
도쿄와 오키나와는 달랐다
인심이 후했고
아와모리 술이 있었다
오키나와 술집에서 만난
오키나와 여자는
인심이 후했지만, 독했다
일본주(日本酒)를 먹고 있었던 나는
그 여자와 대화하는 동안
아와모리를 다 마셔버렸다
미국과 일본 본토를 함께 성토하면서
_「오키나와」 13장 전문
산문적 진술에 가까우며 동시에 화자의 주관적 감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아와모리”를 통해 한국과 오키나와의 민중의 연대 장면으로도 충분히 읽힌다. 이 13장은 더 이상의 사족이 없이 마지막 14장으로 넘어간다. 즉 오키나와에서 단 “하룻밤이었지만” 시의 화자가 얄팍한 감상에 빠져 있다는 의심은 갖지 않아도 된다. 양기창 시인의 이번 시집은 창백한 미학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인 자신의 가슴과 정신을 가감 없이 펼쳤다는 점에서 요즘 만나기 힘든 매력을 품고 있다.
“이 소박한 형식을 21세기의 리얼리즘이라 부르자.”(김형수, ‘추천사’ 중)
“1948년 국가보안법이 생겨 1년 만에 11만 명”을 가두었던 올가미가 어느 날 한 노동자 시인을 덮쳤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인 양기창 시인이 바로 그다. 시인은 얼마 전 보석으로 출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분단 정권을 유지하는 데 그 밑거름이 된 국가보안법의 올가미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인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옥중에서 쓴 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여전히 기개가 꺾이지 않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양기창 시인이 가진 시야와 가슴이 지금 당장의 노동 현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여느 노동자 시인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양기창 시인의 영혼은 우리 역사의 깊은 상처에도 닿아 있는바, 분단체제를 숙주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눈에 이것이 거슬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쾌활한 유머가 있고 앞선 혁명 열사들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살아 있다.
일단 발라보자 참기름!
차도가 있나 몰라
한 시간도 안 되어 한 번 더 찍어 발라
그렇게 몇 번 더, 고소하다 했더니
헉, 아침 거울에 비친
더욱 보도 사도 못 해버린 내 얼굴
퉁퉁 부어올라
_「참기름」 부분
“법무부 자비 물품 신청서 식품란/ 3,970원짜리에 눈이 번쩍 뜨여” 바른 참기름에 얼굴에 피부병을 얻었는데, 처방 받은 항생제를 복용하면서 “참기름 발랐다는 사실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구치소 안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의 진술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쾌활함을 잘 보여주며 이 쾌활함은 시집에 실린 전체 작품을 건강하게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비록 “딸아이로부터 세 번째 인터넷 서신을” 받고 “가고 싶다/ 보고 싶다/ 가족들과 꽃 피우는 우리 집으로 달려가고 싶다”(「꽃동산-독방 회상 2」)고 하지만 그것은 얕은 감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녹차 나무가 그리워”지기도 하고(「녹차 나무-독방 회상 3」), 음식의 고장 광주 사람을 주눅들게 한 엄 부위원장 부인이 만들어준 ‘미더덕 젓갈’이 먹고 싶다고도 한다.(「미더덕 젓갈-독방 회상 7」)
그렇다고 인신을 구속한 감옥에서 바깥 세계만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수 선생에게 시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백풍암(白風庵)), “법무부 마크가 찍힌 모포 뒤집어쓰고서” 자신이 겪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기도 하며(「솜이불 덮으며」), “오빠들 뒷바라지하느라 문맹아였지만 맹문이는” 아닌(「금강경」) 어머니의 삶도 다시 생각해본다. 결국 국가보안법 덕분에 시인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역사를 다시 산 셈이다. 그렇다고 독방에 갇히면서 벼락처럼 다가온 깨달음인 것은 아니고 시인이 투신했던 운동의 연장이지만 고요 속에서 내면에 깊이 아로새긴 시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의 증거다.
여기 흰 바람벽이 있어 여기 수원에도 내린다
내 눈 내 코 내 입 내 귀로, 나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심지어는 심장에 남은 기억으로도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용이 승천하는 적벽에
청태(靑苔)와 부처손을 품은 흰 바람벽에 투영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이다
_「비 내리는 풍경」 부분
소박하지만, 크나큰 마음
발문을 쓴 조성국 시인에 의하면 “국가정보원이 구속영장을 들어대는 증거의 하나”였던 시 「쏠 테면 쏘아 봐라」는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이 시는 “빨치산 혁명 전사”들에게 바친 작품인데, 다시 조성국 시인의 발문에 기대 보면 “추모식에 참석한 눈빛 형형한 백발의 빨치산들이 뒤로 자지러졌다”고 한다. 이 시는 양기창 시인의 기개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차고 넘친다.(이상, 「쏠 테면 쏘아 봐라」)
양기창 시인의 ‘세계관’에서 호쾌함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작품을 굳이 들자면 「오키나와」와 「사북, 봄날의 교향곡」이 있다. 「오키나와」는 전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시의 화자가 일본과 오키나와를 여행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한 관광은 아니다. “도쿄 서점을 나오면서”로 시작되는 「오키나와」는 “가토 상”이 들려준 일본에 대한 이야기와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넘어가는 여정,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만난 평화 운동가들, 그리고 오키나와 민중의 구김살 없는 묘사로 이어진다. 다음을 보라.
도쿄와 오키나와는 달랐다
인심이 후했고
아와모리 술이 있었다
오키나와 술집에서 만난
오키나와 여자는
인심이 후했지만, 독했다
일본주(日本酒)를 먹고 있었던 나는
그 여자와 대화하는 동안
아와모리를 다 마셔버렸다
미국과 일본 본토를 함께 성토하면서
_「오키나와」 13장 전문
산문적 진술에 가까우며 동시에 화자의 주관적 감정이 짙게 배어 있지만, “아와모리”를 통해 한국과 오키나와의 민중의 연대 장면으로도 충분히 읽힌다. 이 13장은 더 이상의 사족이 없이 마지막 14장으로 넘어간다. 즉 오키나와에서 단 “하룻밤이었지만” 시의 화자가 얄팍한 감상에 빠져 있다는 의심은 갖지 않아도 된다. 양기창 시인의 이번 시집은 창백한 미학에 사로잡히지 않고 시인 자신의 가슴과 정신을 가감 없이 펼쳤다는 점에서 요즘 만나기 힘든 매력을 품고 있다.
“이 소박한 형식을 21세기의 리얼리즘이라 부르자.”(김형수, ‘추천사’ 중)
쏠 테면 쏘아 봐라 - 삶창시선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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