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시 (이상실 소설집)

죽음의 시 (이상실 소설집)

$15.00
Description
로봇화된 현실과 시
이상실의 새 소설집 『죽음의 시』가 출간됐다.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대체로 궁핍의 결과로서의 모습들인데 이것은 작가 이상실이 견지하고 있는 작가적 관점이기도 하다. 먼저 표제작인 「죽음의 시」는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다. 오늘날 ‘비대면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작품에서 그려진 물류센터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 그리고 자동화된 물류센터의 SF적 노동 환경일 것이다. 이 자동화의 결과가 소비자에게는 편의를 제공할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하찮은 부품이 되어가고 있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물품 출고 작업을 할 때는 음악이 계속 흐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음 대목은 여러 면에서 인상적이다.

작업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 부른 사원은 즉시 중앙으로 오라고 했다. 종기도 불렀다. 종기는 중앙데스크로 갔다. 관리 사원이 말했다.
“누구신가요?”
“박종기입니다.”
이름을 확인한 관리 사원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사원님, 유피에이치(UPH, 시간당 피킹)가 꼴찌네요. 일곱 시 오십 분에서 여덟 시 사이에 뭘 하셨습니까? 잠잤나요?”
“아, 그때, 피디에이가 십 분간 쉬라고 해서 물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잠시 쉬다가 일했습니다.”
“사원님, 작업 들어가기 전에 교육받지 않았나요? 자동할당 마감 시간이 육 분 남았을 땐데, 쉬고 어딜 다녀와요? 사원님, 앞으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42~43쪽)

사실 소설에서 종기를 질책하는 ‘관리 사원’도 자신의 언어로 작업을 지시한다기보다는 기계의 한 부품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동화된 물류센터에서 부품화된 존재들이다. 물론 과잉 노동으로 인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는 구윤재 같은 밑바닥 노동자다. 일종의 의식화된 노동자였던 구윤재를 죽게 한 것도 예삿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죽음의 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은 섬뜩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죽음의 시」와 「시인과 소녀」는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함께 읽어야 하는데, 특기할 것은 작가가 이러한 노동 현실의 치유제 혹은 극복을 위한 상징으로 ‘시’를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과 예술의 만남

하지만 「사진 밖으로 뜬 가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예술의 힘은 미약하고 도리어 현실적인 삶을 훼방하기도 한다. 물론 「사진 밖으로 뜬 가족」의 예술, 즉 구체적인 삶과 괴리된 예술과 「죽음의 시」나 「시인과 소녀」에서 보여주는 예술은 작품의 분위기와 결말에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작가가 이 소설들에서 자신의 ‘예술론’을 다루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작품들에서 ‘예술’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마지막 동창회」에서 등장하는 “볼레 모양의 머리핀”도 ‘위안부’로 끌려갔던 유하와 남주의 삶을 이어주는 상징으로 빛난다.
「마지막 동창회」는 짧은 분량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는 전후 사정과 ‘위안부’로서 살아야 했던 유하의 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유하의 삶을 상투적으로 위로하지 않으면서 유하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인 남주를 등장시켜 재회하게 만드는데, 그것도 살아 있는 유하가 아니라 죽은 유하를 남주와 만나게 함으로써 살아서는 진정으로 위로받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말하고 있다. 유하와 남주를 만나게 해주는 영미는 유하의 삶을 남성인 남주가 감당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하는?”
“왔다네.”
“왔구먼, 죽음을 왜 숨겼는가?”
“유하가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하먼 자네가 안 올 것 같응께…. 그라고 유하가 이 시상에 있다고 했을 때 자네 맘하고, 저 시상으로 떴을 때 맘도 알고 싶었네. 오늘 아침에는 말하고 싶었는디 참말로 입이 안 떨어지등마.”
영미가 치마 끝단을 잡고 눈을 훔쳤다.(93)

「마지막 동창회」는 죽은 유하에게 지내는 제사로 마무리되지만,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남주가 볼레머리핀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볼레머리핀”은 유하와 남주를 이어주는 상징물이면서 그것이 영미, 유하, 남주가 살던 고향에서 부르던 ‘보리수’의 사투리라는 점, 그것을 본뜬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결국 유하를 기억하게 해주는 것도 일종의 예술의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법은 「계양산기」를 읽을 때도 적용 가능하다. 「계양산기」의 골자가 되는 내용이 글쓰기에 관한 것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서 소설 『임꺽정』의 내용을 과감히 차용하는 것도 결국 작가가 이야기와 서사를 앞세우지만 언제나 ‘예술’에 대해 예민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는 『임꺽정』의 일부 내용을 차용했지만 어쨌든 마치 두 편의 소설을 겹쳐놓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 액자 구조 자체가 낯설고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계양산기」가 글쓰기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 또 「환각의 도시, 그리고 섬」이 작중 화자의 잃어버린 소설 원고를 되찾아 다시 읽는 구조를 갖는 점은 작가 이상실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실의 특징은 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마음이 세칭 ‘예술가 소설’로 흐르는 게 아니라 「죽음의 시」나 「시인과 소녀」에서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소설집 『죽음의 시』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과 밀도를 더해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저자

이상실

1964년전남완도군생일도에서태어나그곳에서초등학교를다녔다.이후부산으로갔다.충무동소재약국에서학교를다니며이십대중반까지살았다.서울에서도몇년거주하다인천에정착했다.2005년『문학과의식』신인상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으며,소설집『월운리사람들』『콜트스트링의겨울』,장편소설『미행의그늘』이있다.현재한국작가회의이사로활동중이며,인천작가회의사무국장을역임했다.

목차

사진밖으로뜬가족·007
죽음의시·037
마지막동창회·063
같은시간속의사람들·095
시인과소녀·123
퇴근길·149
계양산기·179
환각의도시,그리고섬·205

해설|내몰린사람들을향한소설의윤리(이병국)·234
작가의말·254

출판사 서평

현실과예술의만남

하지만「사진밖으로뜬가족」에서확인할수있듯,예술의힘은미약하고도리어현실적인삶을훼방하기도한다.물론「사진밖으로뜬가족」의예술,즉구체적인삶과괴리된예술과「죽음의시」나「시인과소녀」에서보여주는예술은작품의분위기와결말에다른결과를가져온다.작가가이소설들에서자신의‘예술론’을다루려고한것은아니지만어쨌든작품들에서‘예술’이상징적인역할을하는것은사실이다.예술작품은아니지만「마지막동창회」에서등장하는“볼레모양의머리핀”도‘위안부’로끌려갔던유하와남주의삶을이어주는상징으로빛난다.

「마지막동창회」는짧은분량에일본군‘위안부’로끌려가게되는전후사정과‘위안부’로서살아야했던유하의시간,그리고그이후의이야기를압축적으로보여준다는점에서이소설집의가장큰성과라고할수있다.작가는유하의삶을상투적으로위로하지않으면서유하의이루어지지못한사랑인남주를등장시켜재회하게만드는데,그것도살아있는유하가아니라죽은유하를남주와만나게함으로써살아서는진정으로위로받지못한일본군‘위안부’의삶을말하고있다.유하와남주를만나게해주는영미는유하의삶을남성인남주가감당하지못할것을이미알고있었던것같다.

“유하는?”
“왔다네.”
“왔구먼,죽음을왜숨겼는가?”
“유하가저세상으로갔다고말하먼자네가안올것같응께….그라고유하가이시상에있다고했을때자네맘하고,저시상으로떴을때맘도알고싶었네.오늘아침에는말하고싶었는디참말로입이안떨어지등마.”
영미가치마끝단을잡고눈을훔쳤다.(93)

「마지막동창회」는죽은유하에게지내는제사로마무리되지만,마지막문장은다음과같다.“남주가볼레머리핀을안주머니에넣었다.”“볼레머리핀”은유하와남주를이어주는상징물이면서그것이영미,유하,남주가살던고향에서부르던‘보리수’의사투리라는점,그것을본뜬‘작품’이라는점에서도결국유하를기억하게해주는것도일종의예술의일이라고작가는말하고있는것이다.

이런독법은「계양산기」를읽을때도적용가능하다.「계양산기」의골자가되는내용이글쓰기에관한것이라는것,그것을위해서소설『임꺽정』의내용을과감히차용하는것도결국작가가이야기와서사를앞세우지만언제나‘예술’에대해예민한인식을가지고있음을드러낸다.이작품에서는『임꺽정』의일부내용을차용했지만어쨌든마치두편의소설을겹쳐놓은구조를가지고있다.이런방식은「환각의도시,그리고섬」에서도그대로반복된다.이액자구조자체가낯설고새로운방식은아니지만「계양산기」가글쓰기에대한작품이라는것,또「환각의도시,그리고섬」이작중화자의잃어버린소설원고를되찾아다시읽는구조를갖는점은작가이상실의글쓰기에대한마음을보여준다고할것이다.

하지만이상실의특징은예술에대한이러한인식과마음이세칭‘예술가소설’로흐르는게아니라「죽음의시」나「시인과소녀」에서처럼예술을적극적으로현실에개입시키고있다는점이다.이것이소설집『죽음의시』전체에팽팽한긴장감과밀도를더해준다는것은말할나위도없다.

작가의말

나는소설에등장하는인물들의뒤를밟기도했다.산으로갔다.전설이어린도둑고개를넘었다.바다로갔다.남해안외딴섬에내려마을사람들이야기를들었다.남태평양남양군도(南洋群島)천국의섬에대한이야기를들었고,망망대해의물살을가르며싱가포르센토사로끌려간소녀를상상하기도했다.도시로돌아와아르바이트생을만났다.노동자와거리의시인,샐러리맨그리고어느가족을만났다.환각에젖은거리를걷기도했다.인물들이겪거나벌인인물들의삶을쓰지않으면견딜수없을것같았다.편린으로치부할지몰라도,누군가에게는전부일수있는사건을두고무심히지나치기가힘들었다.보일뿐볼수없는원형감옥‘파놉티곤’같은환경에서하루하루를버티며살아가는인물들,그러한삶마저도부러운인물들,낯선곳으로끌려간인물들,사소한것에슬퍼할겨를도없는인물들을달래며이야기를전개했다.그들이처한현실을그들과함께걸으며자유롭게말하고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