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백령 중화동교회 약사」는 1896년부터 1928년 6월의 허인 장로 장립식까지 30여 년 동안의 역사만 기록되었는데, 이 기간은 중화동교회 역사라기보다는 백령도 교회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중화동교회 교인들이 가을리, 사곶, 장촌, 진촌, 화동, 연지동에 다니면서 전도하여 그곳 주민들이 중화동교회에 출석하다가 처소회로 모이고 교회로 발전하는 과정이 실려 있으며, 그 한가운데에 언제나 허간 청년이 있었다.
큰 할아버지는 황해도 소래교회 마지막 당회장으로 목회하시다가 공산당의 교회 탄압을 피해 고향 백령도로 오셔서 중화동교회 목회를 하시면서 장촌교회, 중앙교회 설립에도 관여하셨다. -발문 중에서
1894년 가을 황해도 장연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자, 허득 공은 백령도를 떠나 장연의 동학란 진압에 합류하여 1년을 보내고 1895년 말에 백령도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의 백령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도민은 의지할 곳이 없이 낙담하며 감정적 분출을 쉽게 하는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사곶의 김산철 공과 함께 이러한 도민들을 위로하고 지도하면서, 백령도는 차츰 진정되었습니다. 허득 공은 개화파 정치인으로 질서가 무너지고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중화동교회는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 한국동란,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며 백령도, 황해도, 그리고 인천 등의 여러 지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서문에서
큰 할아버지는 황해도 소래교회 마지막 당회장으로 목회하시다가 공산당의 교회 탄압을 피해 고향 백령도로 오셔서 중화동교회 목회를 하시면서 장촌교회, 중앙교회 설립에도 관여하셨다. -발문 중에서
1894년 가을 황해도 장연에서 동학란이 발생하자, 허득 공은 백령도를 떠나 장연의 동학란 진압에 합류하여 1년을 보내고 1895년 말에 백령도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의 백령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도민은 의지할 곳이 없이 낙담하며 감정적 분출을 쉽게 하는 흥분된 상태였습니다. 사곶의 김산철 공과 함께 이러한 도민들을 위로하고 지도하면서, 백령도는 차츰 진정되었습니다. 허득 공은 개화파 정치인으로 질서가 무너지고 백성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중화동교회는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 한국동란,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며 백령도, 황해도, 그리고 인천 등의 여러 지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서문에서
백령 중화동교회 약사 (1896년부터 1928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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