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프레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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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여기, 결혼 육 년 차에 이유를 모른 채 아내로부터 헤어짐을 요구받은 남자가 있다. 서른다섯의 안경사 이재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내 두윤서는 돌연 이혼을 통보해온다. 빈집과 빈 침대, 아내의 부재,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제자리에 있던 것들의 질서가 동요하고 익숙함이 배반하는 풍경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남자가 느끼기에 이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따라서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징조나 전조 증세를 되짚어보다 지난밤 식탁에서의 사소한 다툼에서 애꿎은 이유를 끌어와보기도 하고, 외도를 의심해 아내를 미행하기도 하는 등 헤어짐의 이유와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보지만, 남자는 아무래도 그 이유를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른다’는 서술어가 나머지 문장들을 견인해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모른다’는 서술어는 헤어짐의 이유 말고도 한 가지 목적어를 더 대동한다. 바로 결혼기념일에 도둑맞은 물건의 정체. 결혼기념일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짧고 의례적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의 눈앞에는 도둑이 들어 난장판이 된 집 안의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경찰이 수사를 위해 도둑맞은 물건의 목록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끝내 “무엇을 잃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도둑맞은 그 ‘무엇’의 실체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라캉이 해석한 ‘도둑맞은 편지’의 의미처럼 텅 빈 기표로만 남아 있다. 도둑맞았다는 유일한 진실만이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결핍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

심아진

저자:심아진

1999년중편소설「차마시는시간을위하여」(『21세기문학』)로등단.소설집으로『숨을쉬다』『그만,뛰어내리다』『여우』『무관심연습』,장편소설로『어쩌면,진심입니다』『후예들』이있다.소설집『신의한수』로2022년김용익소설문학상,2023년제1회백릉채만식문학상을수상했다.

2020년‘심순’이란이름으로동화「가벼운인사」가동아일보신춘문예에당선되었고,『비밀의무게』로창비좋은어린이책대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
2부
3부
4부

해설기억과망각,연대와적대의아포리아|임정연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여기,결혼육년차에이유를모른채아내로부터헤어짐을요구받은남자가있다.서른다섯의안경사이재열.어느날갑자기사라져버린아내두윤서는돌연이혼을통보해온다.빈집과빈침대,아내의부재,그의이야기는이렇게제자리에있던것들의질서가동요하고익숙함이배반하는풍경에서시작된다.
문제는남자가느끼기에이모든일이갑작스럽게이루어졌고,따라서“아무런이유가없다”는것이다.징조나전조증세를되짚어보다지난밤식탁에서의사소한다툼에서애꿎은이유를끌어와보기도하고,외도를의심해아내를미행하기도하는등헤어짐의이유와원인을찾기위해고군분투해보지만,남자는아무래도그이유를‘모른다’.아이러니한것은이‘모른다’는서술어가나머지문장들을견인해가는동력으로작용한다는점이다.
이소설에서‘모른다’는서술어는헤어짐의이유말고도한가지목적어를더대동한다.바로결혼기념일에도둑맞은물건의정체.결혼기념일에이탈리안레스토랑에서짧고의례적인저녁식사를마치고집에도착한두사람의눈앞에는도둑이들어난장판이된집안의낯선풍경이펼쳐진다.경찰이수사를위해도둑맞은물건의목록을요구했지만그들은끝내“무엇을잃었는지도알지못”한다.도둑맞은그‘무엇’의실체는명확하게밝혀지지않은채라캉이해석한‘도둑맞은편지’의의미처럼텅빈기표로만남아있다.도둑맞았다는유일한진실만이채워지지않는근원적인결핍을대신하고있는셈이다.

경찰은최선을다하겠지.물론그럴것이다.하지만찾을수없을것이다.제아무리뛰어난경찰이라해도윤서와내가잃은것을결코찾을수없으리란확신이들었다.무엇보다우리는무엇을잃었는지도알지못하니까.(125쪽)

그렇다.분명한건친밀성의장으로서의가정,그‘집안’에있어야할내밀한무엇인가가더이상있지않다는사실이다.아내가잃어버렸다고믿는결혼반지나도둑이훔쳐엉뚱한곳에버린여권은되찾고싶은그‘무엇’을상징하는기호에불과할뿐,상실한대상자체를지시하지는않는다.이렇게일상을구성하던것이사라지고흩어진‘텅빔’의상태,익숙한세계의부재와소멸은둘사이에분명‘무엇’인가가존재했다는사실만을또렷하게환기한다.
그러므로중요한것은도둑맞은‘무엇’이아니라‘도둑맞았다’는상실감이,그리고남자가그‘무엇’의정체를끝내몰랐거나혹은망각했다는사실일것이다.아내에게는더이상“얘기하는게의미없을것”같아진무엇,퇴근길에만난슈퍼주인과골목어귀에서마주치는앞집할머니와미장원원장,그리고독자까지“모두가알고있”지만“나만모르는무언가”혹은“제대로하지못한이야기”.이렇게소설은좀처럼이야기를응집하지않고흩뿌려놓는방식으로독자의호기심과궁금증을수집해간다.
『프레너미』는‘사랑에빠지는아주특별한법칙’이착각과오인에불과할지라도그게아니면시작조차할수없는사랑의불가피함을부정하지않는다.최상급의순도로빛나던무언가가바래고스러진자리에서야알게되는사랑의불가능성또한부인하지않는다.영원불변이라는환상을구원이라여기면서상대를속이고스스로속으면서불가피성과불가능성에기꺼이투신하는사건,그게사랑임을모르지않기때문이리라.
결혼이라고다를까.사랑의여신아프로디테와결혼의여신인헤라의신화를빌려비유되고있듯사랑과결혼은“원수처럼으르렁거”리다,“사랑이,결혼이던진그물에갇혀영원히버둥대다죽어버리는”운명으로엮여있다.그러니사랑이지닌‘마법의띠’란아프로디테와헤라사이에맺은동맹의증거이기도한셈이다.
적대를품은연대혹은연대로위장한적대사이를오가는이같은사랑과결혼의불안정한관계를작가는‘프레너미(Frienemy)’로번역하고자한다.친구처럼보이지만적일수있고적인듯하다가친구같기도한,다시말해사랑하면서도미워했고,가까우면서도먼,익숙하면서도낯선,믿으면서도의심하는,인정하면서도질투하는모든이들.프레너미란서로의반대편이아니라서로안에잠재되어있는관계라고볼수있다.이런관계에서친구인지적인지를구별하는것보다더중요한건자아와타자가차이를전제한채로공생의메커니즘을만들어가는일일지모른다.이렇게반대편을향한듯보이는신의두팔이처음부터서로맞닿는방향을향해둥글게이어져있는세계,이런비대칭의세계의균형은작가심아진이세계의본질을설정하고추구하는방식과다르지않을것이다.
착각과망각으로자진하며지켜낸무수히덧없는밤들이심아진소설의고아한기품과정취를만들어냈다고믿는다.불안과비탄에뒤덮여보이지않던‘무한’을품은‘바깥’의세계가그앞에펼쳐질것을또한믿는다.밤의바깥을품은그‘밝은밤’들이또다른밤의침묵을견디게할것이며,망각속에서도끝내잊히지않는것을남길수있는자유로응답할것이다.그리하여환상이부재한일상을껴안은채로도비교적오래,문학과공생하는밤을이어가는힘이되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