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송곳니를 꽂을 때

늑대가 송곳니를 꽂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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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광재 소설의 견고한 문체에서는 시간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는 단호한 저항과 분노가 느껴진다.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회한과 감상을 누르고 그럼에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작가의 시선에는 어떻게 해도 다 말해질 수 없는 침묵과 여백의 시간에 대한 속 깊은 수긍과 존중이 깃들어 있다. “한 인간이 스며들기를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햇빛과 바람이 내 안에 들어와 육화되기를 기다리듯이”(「늑대가 송곳니를 꽂을 때」)라는 작품 속 소설가의 다짐은 이광재 소설이 그 자신의 밀도와 생생함으로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기다림 때문에라도 더딘 걸음은 불가피했을 수 있겠지만, 조금은 뒤늦게 찾아온 이광재 소설의 힘과 기품은 과작의 아쉬움을 상쇄할 만하다.
표제작인 「늑대가 송곳니를 꽂을 때」는 주인공 ‘나’가 친구 문수, 몽골인 바타르와 함께 지프를 타고 푸르른 몽골의 초원을 달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나’가 몽골에 온 목적은 이대암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이대암은 독립군 군관학교를 설립하려고 울란바토르까지 건너와 동의의국(同義醫局)을 세우고, 청나라가 퍼뜨린 화류병(花柳病)을 절멸시켜 몽골을 구했다. (……) 이대암의 모습을 모니터에 담아나가던 나는 문수로부터 몽골까지만 날아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아귀 틀어진 집을 짓는 듯한 불길함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던 내게 그의 전화는 구원과 같았다.”(10쪽) 그러나 ‘나’가 정작 몽골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이대암의 발자취보다는 직면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스스로의 모습이다. 여행 도중 ‘나’는 기념품을 파는 게르에서 늑대 송곳니 한 쌍으로 만든 목걸이를 얻는다. 몽골에서 늑대는 “야생의 것들 가운데 가장 용맹하고 헌신적이며 목숨을 내놓고 주어진 소임을 수행”(30쪽)하는 존재다. “호랑이는 길들여도 늑대는 길들이지 못한다”(13쪽)는 말은 ‘나’의 가슴에 깊게 남는다. 막다른 길에 놓여 있던 이대암에 관한 소설의 가닥을 다시 다잡으며 ‘나’는 다짐한다. “낫이나 초승달처럼 벼려진 송곳니는 어둠 속에서도 찌를 듯 도드라져 조용히 울부짖는다. 그 송곳니를 응시하다 보면 어쩐지 늑대의 정령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내가 만일 늑대라면 저 앞에 웅크린 것의 목덜미에 이제는 송곳니를 꽂을 것이다.”(34쪽)
늑대에 관한 사유는 소설집 곳곳에서 돋보인다. 「먹을 만큼 먹었어」에선 ‘토끼 우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늑대의 길’이 등장한다. ‘나’는 신학대학을 마치고 군사정권하에서 수배된 청년들을 교회에 숨겨주거나 밤거리에 내몰린 이들을 도우며 이것이 늑대의 길, 늑대의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군산, 적산가옥」의 백 목수는 스스로를 ‘개잡부’ 출신이라고 칭하는데, 뜻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개를 잡을 때 말요, 그렇게 순하던 놈도 한 방에 날리지 못하면 늑대가 됩니다. 눈빛이 파래져 송곳니를 드러내요. 아무리 대목이라도 잡부는 건들지 못하는 법입니다.”(206쪽) 이처럼 이광재의 소설 속에서 늑대는 야성적인 생명력과 의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불멸성을 가지고 맥동한다.
그 외에도 노량진 고시원에서 안타깝게 스러져간 젊은 영혼에 바치는 가슴 시린 애가(「386번지」)에서부터 범죄자 신분으로 한국에 끌려와 새벽녘 꿈속에서 가족이 있는 아프리카의 사막을 떠도는 소말리아 민병대 출신의 아흐메드 이야기(「매머드」)까지, 소설집에 수록된 이야기의 진폭도 크다. 몽골 초원과 북만주를 떠돌며 이념의 시대를 돌아보는 인물들의 생각과 언어에는 그들 자신의 내부를 향한 신뢰할 만한 공명통이 마련되어 있다. 이광재의 소설은 가장 개인적으로 시리게 포착된 삶의 순간조차 너와 나가 함께 일구어온 역사와 현실의 시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이 성숙한 시선의 귀환이 놀랍고 고맙다.
저자

이광재

저자:이광재
전북군산에서출생했다.1989년『녹두꽃』2호에단편「아버지와딸」을발표했다.이후수년간쓰지못하다가전봉준평전『봉준이,온다』를썼고,장편소설『나라없는나라』로혼불문학상을받았다.장편소설로『수요일에하자』가있다.

목차


늑대가송곳니를꽂을때
먹을만큼먹었어
매머드
386번지
달세개뜨는행성
검은바다의기억
군산,적산가옥

발문한없이고독하고,한없이사려깊고,한없이도발적인|김형수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이광재소설의견고한문체에서는시간의파괴적인힘에맞서는단호한저항과분노가느껴진다.무언가가사라져버린세상에서회한과감상을누르고그럼에도묵묵히살아가는사람들의이야기를길어올리는작가의시선에는어떻게해도다말해질수없는침묵과여백의시간에대한속깊은수긍과존중이깃들어있다.“한인간이스며들기를조용히기다려야한다.햇빛과바람이내안에들어와육화되기를기다리듯이”(「늑대가송곳니를꽂을때」)라는작품속소설가의다짐은이광재소설이그자신의밀도와생생함으로이미증명하고있는것이기도하다.그기다림때문에라도더딘걸음은불가피했을수있겠지만,조금은뒤늦게찾아온이광재소설의힘과기품은과작의아쉬움을상쇄할만하다.
표제작인「늑대가송곳니를꽂을때」는주인공‘나’가친구문수,몽골인바타르와함께지프를타고푸르른몽골의초원을달리는장면에서부터시작된다.‘나’가몽골에온목적은이대암에관한소설을쓰기위해서다.“1911년세브란스의학교를졸업한이대암은독립군군관학교를설립하려고울란바토르까지건너와동의의국(同義醫局)을세우고,청나라가퍼뜨린화류병(花柳病)을절멸시켜몽골을구했다.(……)이대암의모습을모니터에담아나가던나는문수로부터몽골까지만날아오라는전갈을받았다.아귀틀어진집을짓는듯한불길함속에서자판을두드리던내게그의전화는구원과같았다.”(10쪽)그러나‘나’가정작몽골에서발견하는것들은이대암의발자취보다는직면해야하는것을하지못하고회피하는스스로의모습이다.여행도중‘나’는기념품을파는게르에서늑대송곳니한쌍으로만든목걸이를얻는다.몽골에서늑대는“야생의것들가운데가장용맹하고헌신적이며목숨을내놓고주어진소임을수행”(30쪽)하는존재다.“호랑이는길들여도늑대는길들이지못한다”(13쪽)는말은‘나’의가슴에깊게남는다.막다른길에놓여있던이대암에관한소설의가닥을다시다잡으며‘나’는다짐한다.“낫이나초승달처럼벼려진송곳니는어둠속에서도찌를듯도드라져조용히울부짖는다.그송곳니를응시하다보면어쩐지늑대의정령은내안으로들어오는것만같다.내가만일늑대라면저앞에웅크린것의목덜미에이제는송곳니를꽂을것이다.”(34쪽)

늑대에관한사유는소설집곳곳에서돋보인다.「먹을만큼먹었어」에선‘토끼우리’와반대되는개념으로‘늑대의길’이등장한다.‘나’는신학대학을마치고군사정권하에서수배된청년들을교회에숨겨주거나밤거리에내몰린이들을도우며이것이늑대의길,늑대의삶이아닌가라는생각을한다.「군산,적산가옥」의백목수는스스로를‘개잡부’출신이라고칭하는데,뜻을묻자이렇게답한다.“개를잡을때말요,그렇게순하던놈도한방에날리지못하면늑대가됩니다.눈빛이파래져송곳니를드러내요.아무리대목이라도잡부는건들지못하는법입니다.”(206쪽)이처럼이광재의소설속에서늑대는야성적인생명력과의지를상징하는것으로불멸성을가지고맥동한다.
그외에도노량진고시원에서안타깝게스러져간젊은영혼에바치는가슴시린애가(「386번지」)에서부터범죄자신분으로한국에끌려와새벽녘꿈속에서가족이있는아프리카의사막을떠도는소말리아민병대출신의아흐메드이야기(「매머드」)까지,소설집에수록된이야기의진폭도크다.몽골초원과북만주를떠돌며이념의시대를돌아보는인물들의생각과언어에는그들자신의내부를향한신뢰할만한공명통이마련되어있다.이광재의소설은가장개인적으로시리게포착된삶의순간조차너와나가함께일구어온역사와현실의시간위에있다는사실을잊지않는다.이성숙한시선의귀환이놀랍고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