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시의 시간 - 현대시세계 시인선 156

초록 가시의 시간 - 현대시세계 시인선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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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숨김과 위장에 능한 카멜레온처럼 화려하게 변신하는 배선옥의 시들
199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회떠주는 여자』, 『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오렌지 모텔』 등 세 권의 시집을 선보였던 배선옥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초록 가시의 시간』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56번으로 출간했다.
배선옥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초록 가시의 시간』은 꼼꼼하고 깐깐한 시인의 내면이 다시금 발휘되는 시집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치열한 일상과 시인의 의무를 팽팽하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비법은 적당한 타협과 타협할 수 없는 세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솜씨에 있다. 결국 솜씨란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배선옥의 시는 카멜레온처럼 시적 대상이나 배경에 따라 수시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의 시 색깔은 온갖 꽃들이 만발한 초원이나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나무숲, 황량한 모래사막 등 주변 환경과 여건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시인은 위장한 채 오래 기다린다. 여간해선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방(독자)이 곁에 다가올 때까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위장을 풀고 다가서지도 않는다. 이는 첫 시집 『회 떠 주는 여자』부터 네 번째 시집 『초록 가시의 시간』까지 시인이 일관되게 견지해오고 있는 독특한 시작법(詩作法)이다.
카멜레온이 몸의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듯, 시인은 화려한 수사와 묘사로 시의 본질에 다가가려 한다. 즉 시적 진술을 자제하고 비유와 묘사로 위장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철저하게 숨긴다. 또한 카멜레온이 포식자와 먹이에 들키지 않으려 신중하게 움직이는 듯, 시 한 편 한 편의 발걸음은 진중하다. 시인은 숨김과 위장을 통해 생존뿐 아니라 ‘삶의 공간’에서 존재의 파편들을 회고하고 수습하려 한다. 시의 숲에서 “새파랗게 잘 닦인 언어”(「위대한 계보」)의 향연을, 카멜레온의 화려한 변신을 지켜보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배선옥의 시에서 ‘거리감’은 시작 자아와 사물과의 간격이면서 시간의 관념을 장착한다. 가령 「채석강」에서 “멀리 서라벌의 북소리”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돛을 내”리고, “미처 묻히지 못한 시간의 갈피”에 머문다. ‘여기’는 시적 자아가 서 있는 현실의 지점이다. 반면 ‘저기’는 시적 자아가 머물고 싶은 이상세계다. 「찬란(燦爛)」에서는 “새로 구입한 지도”를 펼쳐놓고 현실과 이상, 자아와 타아, 행복과 불행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즐거운 상상으로 채워진다. ‘여기’는 지도를 보고 있는 시적 자아와 지도 위 사막, ‘저기’는 지도 속 사막에서의 상상이다. 상상 속의 사막은 찬란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낮달은 “옆얼굴만 보여주”고, “걸어갈 사막”은 멀기만 하다. ‘거기’는 상상 속 사막, ‘여기’는 “촘촘한 일상”이다. 지도 속으로의 여행은 “이제 좀 나긋해도 괜찮다”는, “반걸음 먼저 당도해 불을 댕겨놓”아도 좋을 것 같은 마음의 위안과 여유를 준다.
4부 학익동 연작시 15편의 학익동은 예전의 그악스럽고 서글픈 가난보다 그리움과 정겨움이 시인에겐 훨씬 크게 다가온 듯하다. 초록 가시 속에 숨어 있는 속살이랄까? 시인은 세상을 향해 문 두드리는 자이다. 화답은 없을지언정 함께 춤추길 권유한다. 늘 무엇인가 새로운 걸 시작하는 사람이고 늘 현재진행형이다. 제일 큰 덕목은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간간이 낡은 신발에 연민을 갖기도 하고 작고 소박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결코 체념하지 않는다. 부디 기름종이 이편과 저편의 간극이 더 크게 벌어져 푸른 수맥이 풍성하길. 푸른 가시가 창대하게 발광하길.
저자

배선옥

1997년『시문학』으로등단했다.어쩌다보니『회떠주는여자』,『오래전의전화번호를기억해내다』,『오렌지모텔』세권의시집을냈다.여전히낮에는품위유지비를벌러다니는사무원으로밤에는글쟁이의삶을산다.그사이사이대학원에서문예창작콘텐츠를전공했다.아직도이런저런공부를손에서내려놓지못하고있으며덕분에네번째시집『초록가시의시간』을세상에내보인다.

목차

1부
전생(前生)·13
채석강·14
피었다,냉이꽃·15
베스트드라이버·16
포물선·17
노랗다·18
밥줄·19
광화문연가·20
시래기를삶다·21
이제,너를보낸다·22
쉘위댄스·23
갈수기(渴水期)·24
김씨·26
까치가있는풍경·27
우회전일단정지·28

2부
나의연애는아직푸르다·31
습기제거제·32
찬란(燦爛)·33
7080라이브카페·34
숨은그림찾기·35
위대한계보·36
안개주의보·37
생활의발견·38
초혼(招魂)·40
그날·42
일주문·43
우리들의내일도오늘같기를·44
시간의비늘·45
대장내시경·46
문학산기슭·47

3부
오늘의운세·51
지장전앞목백일홍피었으니·52
이상한하나도안이상한·54
봄,진즉에와버렸어라·56
실업일기·58
초록가시의시간·59
매화폈다,기별이왔다·60
풍경·62
목단꽃피었습디다·63
내일·64
흰빛에취하다·65
다이어트·66
낮달·68
죽비·69
구겨진신문지·70

4부
끽동그골목에도불이켜지기시작하는시간입니다·73
517번마을버스를타면·74
딸부잣집·75
언덕배기그집·76
초경·77
개건너갈일이없어졌다·78
삼성제강·79
거기,이제너는없고·80
애정에대한고찰?바퀴벌레를중심으로·81
복개천변·82
햇골소식·83
장미아파트·84
꽃샘추위·85
이만큼·86
보고싶은것만보고·88

해설숨김혹은위장의시학/김정수·89

출판사 서평

[표제시]

초록가시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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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도시를덮었다놀란구멍들일제히문닫아걸었다미처고장난경첩손보지못한마음뒤늦게허둥거렸고그러더니이번엔서둘러닫아걸었던문빨리열리지않아난리법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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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떼처럼쏟아져들어온모래알에누더기된꽃밭절대울지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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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밤이면하얗게빛나는별의살갗쓰다듬었다은밀하게감춰진궤도따라비밀번호누르면고개저으며버티던방정식도풀리고야말았다어렵게다시찾은구멍매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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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숨은수맥터트려물길만들고
드디어푸른나무되고
욕심껏햇살움켜쥔진초록그늘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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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찬란(燦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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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구입한지도엔해독되지않는난수표처럼밤의표면에얇게물수제비뜨며내려앉는꽃잎오아시스여전히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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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와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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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꼿꼿하게세운베두인족처럼내내옆얼굴만보여주는낮달이름모를언덕지나며주억거리는뒤늦은고해오늘낙타가되어걸어갈사막캄캄하지만촘촘한일상쯤이제좀나긋해도괜찮다고노곤한저녁이면언제나반걸음먼저당도해불당겨놓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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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와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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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학익동편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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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한다화장수도발랐겠다이젠
눈썹그릴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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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얼굴균형맞추려면
멀리떨어져봐야해
이·만·큼
뒤로물러서니제대로보이는군
양팔저울추올리듯비율맞추는것도
잘생긴뒷산봉우리처럼입술그리는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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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움켜쥐고놓치지않으려발버둥쳤던
시절
눈썹비뚤어지는지
입술선뭉개졌는지모른채
발동동굴렀지
이·만·큼
뒤로물러서야제대로할수있는걸
-
이·만·큼
떨어져나오니
보인다
아직도진행중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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