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일찍이1996년에시인이되었으나이번이가까스로첫번째시집이다.따져보면이십팔년만에시집을내놓는셈이다.그함구와침묵과격절의시간에도시인은타자를유심히바라보는일만큼은내려놓지못한모양이다.타자의슬픔을바라보면누구에게나연민이발생하는데,그순간타자에게값싼동정을내비치는주체는속물로전락하고만다.그점을잘아는백연숙은타자를통해자신을들여다보거나타자와자신을동일시하는방식의전략을택한다.그러다보니‘여동생’과‘나’와‘엄마’와‘할머니’가할머니방에모이면모두“한자리에모인우리는상기된소녀들”이된다(소녀시대).미용실갔다가개미집을구경하고,동태찌개를먹거나세탁기앞에서‘엄마’를떠올리고,달빛을바라보다가거실창문에맺히고,반찬투정하는‘남편’앞에서동백꽃이되는일이모두그렇다.그것들은새초롬한듯하지만다예사롭지않고,무심한듯하지만살가운데가있다.간접인용형식의구문을활용한표제작십분이면도착한다며봄이라며가주는울림을읽어보라.사소하고무덤덤한전언이통증처럼아리게스며들것이다.또하나백연숙의시집에서유난히눈에띄는건‘여자’다.그‘여자’는지극히객관적이면서냉철한척하는‘여성’이아니라“보이지않지만들려오거나/해마다잊지않고찾아와통증으로열리는/몸의서랍들”을지닌‘여자’다(자궁의기억).우리는이시집의성과를‘여성’이라는말의메마른관념성을‘여자’라는몸의생생한구체성으로그려낸수확으로봐도좋을것이다.
―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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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말
버스정류장도지나고페르시안고양이도지나고
겨울지나겨울이오기전당신도지나고지나는김에나도지나가며
다지나왔다고생각했는데
웬걸,저만치서당신의오늘과내일이나를노크한다
쉼표하나지나자마자마침표를찍을까말까갸우뚱거린다
알수없는일이지만나는아직도비상등처럼깜빡이거나지직거리는
당신의그찬란한눈동자를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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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속의시세편
평촌
거미줄에걸려말라붙은나비를본다
바람불때마다파닥거리는나비
멀리쌍둥이빌딩이보인다
벌레먹은산딸나무잎사귀
거미줄위에매달린채흔들린다
줄을쳐놓고대체그는어디로사라진걸까
아무리둘러봐도보이지않지만
육천원짜리백반을먹기위해
식판을들고길게줄이섰다
거미줄이바람에흔들릴때마다
조금씩무거워지는허기,
요란하게지나가던배달오토바이경적소리도
거미줄에걸려있는가을장마끝이었다■
돌무지
돌이울어요
비가오면떠내려갈까봐
맨밑에깔린채
입밖으로빠져나가지못한단말마의비명을위해
돌들이개구리처럼떼거리로울어요
여덟명의아이들에게
먹을것이없다는걸감추기위해
케냐엄마는냄비에돌을넣고끓였지요
휘휘저으며맛도봤을거예요
쌀이나금이되느라돌들은잠못이루고
냄비가끓는동안아이들은헛배가불렀을거라고
돌들은잠시울음을그쳐요
눈이오면강아지꼬리가생기고
차곡차곡쌓인비명들입냄새처럼빠져나와
아아입을벌려눈을받아먹으며
오오,배부르다고하나같이입을모으지요
울음을그친돌들은
반달눈을하고깊은잠이들어요
얼굴에말라붙은눈물자국들
모래알처럼밤새반짝이지요■
십분이면도착한다며봄이라며
물들까봐근처도가지않았다며
쥐똥나무창공이라며친구라며
졸지도않았다며
꽃은피었지만나비는날지않았다며
사각지대는아니었다며
새가노래로울었다며
58년개띠열댓살짜리아이가있었다며
게이는아니지만스타킹이나왔다며
뒤로갈수도없었다며대포통장이었다며
아이와노모가타고있었다며
하필이면블랙박스가꺼져있었다며
애인이라며
월요일은일산수요일은목동
토요일은우리동네약수터
약물이나알코올중독자
운좋게발을뺐다며물까지타진않았다며
고향가는길이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