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12.00
Description
‘자연의 몸’을 받아쓰는 필경사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운율의 연금술사라 일컬어지는 고두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가 출간되었다. 시인수첩 시인선 85번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의 몸’을 받아쓰는 필경사로서의 문장을 새롭게 잇고 있다. 특히, ‘운율과 말맛’이라는 시의 본연을 복원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그 외연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시인은 낭송의 전통을 유려하게 펼친다.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저음으로서 형상된 이 목소리의 시학은 나이테처럼 둥글게 뭉쳐지며 우리의 귓속으로 스며든다. 사물을 정확히 구분하고 분별하는 높은 소리와는 다르게, 시인의 바리톤은 침묵의 자리에서 청각의 무도(舞蹈)를 수행하면서 “사물 세계와 일상의 말을 더 잘 받아쓰기 위한 경청의 자세”를 완성한다.
확실히 시인이 계승하고 창안한 목소리의 짙은 농도와 흐름 들은 구술문화의 흔적이며, 우리의 현대시가 잃어버린 ‘시’와 ‘노래’의 대칭이다. “장진주사 마지막 구에서/ 악보 덮고 먼 산을 보네”와 같은 문장이 함의하는 것처럼, 적어도 시인에게 시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음악적 보고가 아닐까. 때문에 고두현 시인의 문장은 지금-여기에서 당대의 시선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히 먼 과거와 미래를 향한다. 이른바 부재의 긍정이자 그 민감한 형식이다.
손택수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고두현 시의 부재는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양상은 ‘고대’와 ‘고향’과 ‘고전’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렬히 결속된 이 트라이앵글은, 놀라운 속도전과 파괴력, 그리고 물신(物神)의 정형화된 이율배반으로 점철된 현대 도시 문명의 대척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대와 고향, 고전이 응시하는 세계는 주체와 타자, 사물이 섬세하게 얽히고 스며들어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용서와 화해, 평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두현 시인의 탁월한 서정은 사태를 좀 더 확장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요컨대, 시인은 이 삼각형의 윤활(潤滑)을 음악을 통해 이끌어낸다. 특히나 시인은 첫 시집 『늦게 온 소포』에서부터 이미 시가(詩歌)의 숭고한 목소리에 집중했으며, 두 번째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와 세 번째 시집 『달의 뒷면을 보다』에서 완성에 가까운 성취를 보인다. “슬픔의 밑둥에선 어떤 소리가 나는지/ 숨 닫고 말문 막힌 땅 끝에선/ 어떤 웅얼거림이 울려오는지/ 마침내 빈 몸으로 귀 맑게 듣기 위”(「발해 금(琴)」)한 첫 시집의 방향 설정은 “유약 바르지 않은/ 다갈색 질그릇 빛”(「발해 자기」)의 공간을 축성하고, 또한 “그리움 깊은 밤엔/ 해금을 듣습니다./ 바다 먼 물소리에/ 천근의 추를 달아/ 끝없이 출렁이는 슬픔의 깊이/ 재고 또 잽니다.”(「해금(海琴)에 기대어」)라는 첨예한 정서를 끊임없이 예각한다.
아울러 두 번째 시집에서는 “적막강산 짊어지고 신화 속으로 들어간다”(「바다로 가는 그대」)는 선언을 통해 “아아 누가 이 밤에/ 돌을 깎는 소리/ 캄캄한 빛을 쪼아/ 칠흑 하늘에 박는가”(「저 별을 잊지 마라」)라는 연금술적 고행이 그의 시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시인이 집중했던 신화적 적막강산을 한 채의 고적한 사원으로, 그러나 외따로 떨어진 고고하고 자기 만족적인 고립된 성채가 아니라 누구나 기대고 염원하고 축원하는 개방된 성소로 밀어올린다. “흙에서 와 흙으로 가는/ 물처럼 바람처럼 강처럼 바다처럼/ 스스로 길이 되어 흐르는 사람들”(「정포리 우물마을」)이 생활하는 공간인 것이다. 과연 “윗물과 아랫물이 서로 껴안고/ 거룩한 몸이 되어 반짝이는 땅// 봄마다 다시 돋는 쑥뿌리 밑으로/ 우렁우렁 물이 되어 함께 흐르며/ 연초록 풀빛으로 피어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이에 대한 시인의 답을 듣기 위해 우리는 네 번째 시집의 첫 장을 펼쳐야 한다. 시인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그의 문장은 혀로 궁굴리는 ‘입말 퇴고’의 직접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시인의 여정을 함께 걸어간 ‘길 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틋하게 풀고 있다. 속삭이는 듯한, 혹은 같이 웃고 떠들며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서 그는 시의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오롯이 묻어나오는 현장성마저 농염하다. “빛바랜 신발 자국 맨발을 맞대보다 백고무신 옆구리에 비친 옛집 처마의 푸른 그늘을 만져 보다”(「신발이 지나간 자리-정병욱의 이력(履歷)」)라는 염결성은, 주관적 회고나 혹은 섣부른 감상, 동정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시인의 작업을 명징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그 생활과 실존의 유려한 악보일 것이다.
저자

고두현

저자:고두현
1963년경남남해에서태어났다.1993년《중앙일보》신춘문예에시「남해가는길-유배시첩(流配詩帖)」연작이당선되어등단했다.잘익은운율과동양적어조,달관된화법을통해서정시특유의가락과정서를보여줌으로써전통시의품격을높였다는평가를받고있다.시집으로『늦게온소포』『물미해안에서보내는편지』『달의뒷면을보다』,시선집『남해,바다를걷다』등이있다.<유심작품상><김만중문학상><시와시학젊은시인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길밖에서너를기다리며·13
맹인안마사의슬픔·14
독수리의포란법·15
오래된길이돌아서서나를바라볼때·16
정년직전·18
풍란절벽·20
내가마구간에서태어났을때·22
망고씨의하루·24
우편함의용도·25
사랑에빠진비행사·26
꽃자루에꽃하나씩피는목련·27
붉은사슴뿔버섯을본적있나요·28
튤립뿌리에선종소리가난다·30

[2부]

그말-시경(詩經)필사·35
망덕포구에그가산다-윤동주유고지킨정병욱의전언·36
신발이지나간자리-정병욱의이력(履歷)·38
굴라재활불사건-나,만해·40
심우장(尋牛莊)가는길-만해시편·43
북정마을-만해시편·44
목련이북향으로피는까닭·46
가사(歌辭)읽는저녁·47
갈매나무백석,흰바람벽을타고-남신의주유동에서남해통영까지·48
적과흑·51
대웅성좌,옥천-지용의별·52
배는묵어타고집은사서들라·54
구운몽길억새꽃·56

[3부]

우득씨의열한시반·61
빨간색차만보면·62
방호복화투·64
노숙인과천사-서울역,2021년1월18일오전10시30분·66
눈녹이는남자·68
가불시대-사소한풍경·70
아주비극적인유머·72
숨·73
젓갈장수와나무장수-오래된현재·74
마포어부의딸,주꾸미·76
애간장·78
상강(霜降)아침·79
서릿발·80
여왕의홀·82

[4부]

아사(餓死)·87
네가오기전에는항상·88
일용할양식·90
오디주와뽕잎차가함께익는밤-펜션지기시인의집·92
귓바퀴를한껏오므리며·94
이사철·96
마스크대화·97
늦게온광석이-유자아홉사리아홉·98
유쾌한벌초·100
뿌리가뿌리에게·102
매미옷을들춰보다·104
철로역정(鐵路歷程)·106

[5부]

기도·111
무화과나무아래의회심-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112
이토록오래고이토록새로운-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114
뿔난짐승은복이있나니·116
최초의시-경전필사·117
깊고푸른밤-경전필사·118
돕는배필-경전필사·119
아직태어나지않은말·120
지상에서천국까지·121
거룩한손·122
새벽기도·124

해설|손택수(시인)
“오래된길의시,신생의말”

출판사 서평

‘자연의몸’을받아쓰는필경사

우리시대의뛰어난서정시인이자운율의연금술사라일컬어지는고두현시인의네번째시집『오래된길이돌아서서나를바라볼때』가출간되었다.시인수첩시인선85번째다.이번시집에서시인은‘자연의몸’을받아쓰는필경사로서의문장을새롭게잇고있다.특히,‘운율과말맛’이라는시의본연을복원하는동시에현대적감각으로그외연을확장했다는평가를받는다.
우선시인은낭송의전통을유려하게펼친다.‘나지막하게읊조리는’저음으로서형상된이목소리의시학은나이테처럼둥글게뭉쳐지며우리의귓속으로스며든다.사물을정확히구분하고분별하는높은소리와는다르게,시인의바리톤은침묵의자리에서청각의무도(舞蹈)를수행하면서“사물세계와일상의말을더잘받아쓰기위한경청의자세”를완성한다.
확실히시인이계승하고창안한목소리의짙은농도와흐름들은구술문화의흔적이며,우리의현대시가잃어버린‘시’와‘노래’의대칭이다.“장진주사마지막구에서/악보덮고먼산을보네”와같은문장이함의하는것처럼,적어도시인에게시는인간이표현할수있는가장놀라운음악적보고가아닐까.때문에고두현시인의문장은지금-여기에서당대의시선을취하고있으면서도까마득히먼과거와미래를향한다.이른바부재의긍정이자그민감한형식이다.
손택수시인이지적한것처럼,고두현시의부재는이번시집에서두드러지는데그양상은‘고대’와‘고향’과‘고전’의복원에집중되고있다.서로가서로에게강렬히결속된이트라이앵글은,놀라운속도전과파괴력,그리고물신(物神)의정형화된이율배반으로점철된현대도시문명의대척점이기도하다.왜냐하면,고대와고향,고전이응시하는세계는주체와타자,사물이섬세하게얽히고스며들어서로를부드럽게감싸안는용서와화해,평등의세계이기때문이다.
여기서고두현시인의탁월한서정은사태를좀더확장하면서독자의시선을사로잡는다.요컨대,시인은이삼각형의윤활(潤滑)을음악을통해이끌어낸다.특히나시인은첫시집『늦게온소포』에서부터이미시가(詩歌)의숭고한목소리에집중했으며,두번째시집『물미해안에서보내는편지』와세번째시집『달의뒷면을보다』에서완성에가까운성취를보인다.“슬픔의밑둥에선어떤소리가나는지/숨닫고말문막힌땅끝에선/어떤웅얼거림이울려오는지/마침내빈몸으로귀맑게듣기위”(「발해금(琴)」)한첫시집의방향설정은“유약바르지않은/다갈색질그릇빛”(「발해자기」)의공간을축성하고,또한“그리움깊은밤엔/해금을듣습니다./바다먼물소리에/천근의추를달아/끝없이출렁이는슬픔의깊이/재고또잽니다.”(「해금(海琴)에기대어」)라는첨예한정서를끊임없이예각한다.
아울러두번째시집에서는“적막강산짊어지고신화속으로들어간다”(「바다로가는그대」)는선언을통해“아아누가이밤에/돌을깎는소리/캄캄한빛을쪼아/칠흑하늘에박는가”(「저별을잊지마라」)라는연금술적고행이그의시업이었다고밝히고있다.
세번째시집에이르러서는시인이집중했던신화적적막강산을한채의고적한사원으로,그러나외따로떨어진고고하고자기만족적인고립된성채가아니라누구나기대고염원하고축원하는개방된성소로밀어올린다.“흙에서와흙으로가는/물처럼바람처럼강처럼바다처럼/스스로길이되어흐르는사람들”(「정포리우물마을」)이생활하는공간인것이다.과연“윗물과아랫물이서로껴안고/거룩한몸이되어반짝이는땅//봄마다다시돋는쑥뿌리밑으로/우렁우렁물이되어함께흐르며/연초록풀빛으로피어나는사람들”의마음과정서에는무엇이깃들어있을까.
이에대한시인의답을듣기위해우리는네번째시집의첫장을펼쳐야한다.시인스스로가밝힌것처럼,그의문장은혀로궁굴리는‘입말퇴고’의직접적인형식을취하면서,시인의여정을함께걸어간‘길위의사람들’의이야기를애틋하게풀고있다.속삭이는듯한,혹은같이웃고떠들며노래하는듯한목소리로서그는시의공동체를일으켜세우는것이다.있는그대로사람들의삶에오롯이묻어나오는현장성마저농염하다.“빛바랜신발자국맨발을맞대보다백고무신옆구리에비친옛집처마의푸른그늘을만져보다”(「신발이지나간자리-정병욱의이력(履歷)」)라는염결성은,주관적회고나혹은섣부른감상,동정으로서는도저히도달할수는없다는점을감안한다면,우리는시인의작업을명징하게받아들이고또한이해할수있을것이다.그런측면에서『오래된길이돌아서서나를바라볼때』는그생활과실존의유려한악보일것이다.

다음은시집에관하여시인과나눈짧은인터뷰내용이다.

[Q]주제와이야기의방향은?
[A]이번시집에는길의이미지가많이담겨있습니다.제목부터『오래된길이돌아서서나를바라볼때』이지요.개인과사회,과거와현재,지질과역사의단면을길의이미지로치환했습니다.그길위에서만난사람과사물,사회의이면,세계의표정등을시로썼습니다.길위의사람이야기중에서도1부의‘맹인안마사의슬픔’과‘풍란절벽’‘망고씨의하루’,3부의‘우득씨의열한시반’‘방호복화투’‘노숙인과천사’등에슬프고도애틋한삶의풍경들이스며있습니다.
과거의길과현재의길이맞닿은곳에서‘새로운길’의시작점을발견하기도합니다.이과정에서즐겨활용한것이‘인유(引喩)의작시법’입니다.만해와백석,정지용,윤동주,정병욱등의입과눈빛을빌려다음세대의여정을그려보는작업에공을들였습니다.그연장선에서‘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과‘경전필사’연작을만날수있었으니,이번시집을관통하는이야기의방향은‘오래된길’에서‘새로운길’쪽으로가닿습니다.그길의접점에서태어난‘신생의말’이곧63편의신작시이지요.

[Q]이번시집의특징은?
[A]비교적짧은시가많다는점입니다.3~4행짜리부터10행안팎의단시(短詩),길어도한페이지를넘지않는작품이많습니다.상대적으로좀긴작품도호흡이늘어지지않게끔내재적리듬을살리는데애를많이썼지요.서정과서사만큼이나중요한게운율이잖아요.
또하나는문자이전의소리감각을되살리려고노력한점입니다.시어의의미와소리의말맛이둥글게맞물릴때화자(話者)의감성이그대로전달되지요.시가곧노래이니더욱그렇습니다.저는시를쓰거나퇴고하는과정에서몇번씩소리내어읽고또읽습니다.손으로다듬는‘문장퇴고’와함께혀로궁굴리는‘입말퇴고’에더시간을많이들이는편이죠.낭송무대에서제시를자주만나는것도이때문이아닌가싶습니다.

[Q]‘나’는어떤시인인가?
[A]죽순을닮은시인을꿈꿉니다.비그친다음날대나무숲에서보았지요.여기저기싹을밀어올리는죽순.귀기울이면키크는소리가들리는듯했습니다.마디마다생장점이있어하루에30~50㎝까지자라니그럴만도하죠.한달이면어른대나무키가되고,생장이끝난뒤엔더굵어지지않고속을단단하게다집니다.그런데,대나무는땅속에서5~6년을자란뒤에야순을내밉니다.땅속줄기가굵을수록죽순이튼실합니다.
마디마다달린눈가운데죽순으로솟는것은고작10%.그만큼오랜기간을거치고생멸의경계를지난뒤에야지상에오릅니다.꽃은일생에한번만피우지요.마지막순간에온몸으로개화하고생을마감합니다.바로이지점에서시가탄생합니다.보이지않는곳에서오래견딘뿌리,삶의극점에서단한번피우는꽃,매사에더디고과작인제가특별히신봉하는‘죽순의시학’입니다.
―「저자와의인터뷰」중에서

해설들여다보기

“오래된길의시,신생의말”

고두현의시는변경에서온다.변경으로서의고대와고향과고전적상상의지리학은‘영혼의밑바닥’을들여다본소멸의경험과관계가있는것으로보인다.한작가의탄생을알리는원체험으로서의심연은생과사의접경지역에뿌리를내리고있다.

가포요양원에있는동안비로소‘영혼의밑바닥’을들여다볼기회가있었다.시대의굴곡앞에서이리저리헤매던어쭙잖은문장이조금씩달라지기시작했다.생과사의접경지역을밟아본뒤에새로발견한지평이랄까.바로코앞의역사에서더근본적인뿌리의역사까지로시야가확대된것도이무렵이었다.
-「나의문학자전」중,《시와시학》2005겨울호

결핵요양소로결핵문학의장소지리를한국문학의장에기입한마산의가포에서겪은죽음체험이문학적회전을하는계기가되었음을알수있는고백이다.인간존재의근원적결핍과불안,존재의불구성에대한강렬한체험으로부터오는‘근본적인뿌리의역사’에대한탐구는기수역에머무는동안‘나는바다장어인가민물장어인가’같은아이덴티티의물음에빠진「장어의일생」으로비유되기도하고,“선대가산한데모아경원선철길타고/원산함흥김천청진북관의단선열차/강건너간도까지한달음에갔던그길/꿈꾸던기둥은커녕학교터도다못닦고/몸버린채절망했던그밤은처연했죠./돌아올땐압록건너의주선천곽산정주/경의선귀경길이천만근더버거웠죠”(「철로역정(鐵路歷程)」중)같은가족사의시원을민족사의맥락으로겹쳐진채로돋을새김하기도한다.
특히,국치이후유랑으로풍찬노숙의삶을살다귀국하였으나고향땅에돌아온뒤에도여전히귀향을완성하지못한채유이민의신산한세월을곱씹고있는아버지의삶과만남으로써시인은‘꿈꾸던기둥은커녕학교터도다못닦고’실패한세계를시의영토로선언하고있는것처럼보인다.‘뿌리의역사’를향한천로역정끝에서마주한아버지의변경인간도(間島)가시의간도로옮겨온사정을나는그렇게읽는다.
변경을사는시인은경계인일수밖에없다.국경과국경사이에존재하는변경으로서의섬,섬으로서의시적인간에게경계는선이아닌면이다.그래서경계인은0과1사이에무수히많은가치들을긍정한다.이것이나저것을일도양단식으로선택하고강요하길좋아하는사회에서이런태도는환영받지못하겠지만그는0과1사이의무수한타자들을환대하는자로서0과1이살수없는무한을누릴수있다.그리하여시인은인간중심의에토스를이루는세속적휴머니즘을넘어선다.그것은애써익힌세속적관념을지움으로써천지만물에예민하게반응하고자하는자세이기도하다.

발밑어두운줄모르고
고개빳빳이들고다니다
바삭,
서릿발
밟은아침

아뿔싸,
지금
땅속으로
막동면할벌레들
숨어드는때아닌가.
-「상강(霜降)아침」전문

인간과비인간의완고한경계가순간적으로무너지는날렵한감각이돋보이는시다.그냥서리가아니라하필‘서릿발’인것은서리를밟는일상적행위가타자의발을밟는낯선느낌을환기하도록하기위해서다.이타자성은자연스럽게동면에드는벌레들의처지에대한근심으로이어진다.나열된일상의포도를밟는습관이‘바삭’하는순간적경험과함께‘아뿔싸’하는성찰을부르면서‘고개빳빳이’쳐든수직적우월감으로부터풀려나는화자를엿볼수있다.여기서시인은감정이입적으로측은지심을투사하지않는데,타자와참으로소통할수없는자신의한계를참되게마주하기위한신음으로서의감탄사‘아뿔싸’가선택된이유이기도하겠다.알수없는차원의그늘을비로소겸허하게받아들이는이막막한순간으로부터기계적교감이아닌공명이시작된다.그것은언뜻붓다의유년시절풀이뜯겨나가고벌레들이죽어나가는쟁기질을본뒤에느낀슬픔의장면을연상시킨다.피조물의고통이가슴을뚫고들어오게하는슬픔의분출에서붓다는망아상태의환희를경험했다고한다.
현대사회에선소외된공유적감각의깨어남을통해인간중심적주체는무너지고미물들과우애를나눌줄아는관계하는주체가회복된다.탈자적공명을가능케하는이같은관계맺기가오래된미래로서의시의지혜다.지혜는라틴어로‘spere’즉‘음미하다’,‘맛보다’는뜻이다.현명해진다는것은대상에마음과감각을주는행위다.작고희미한것을들여다보고보이지않는것들과소통할때시는세계의은유이고은유로서세계를대변한다.

빗방울떨어지자공원에서놀던아이들
황급히집으로간다.한아이가돌아와
커다란플라스틱휴지통을뒤집어놓고들어간다.
“빗물고이면청소아줌마힘들까봐……”
등에묻은빗방울털며환하게웃는손.
어린날마당귀퉁이사금파리놀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