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 - 걷는사람 시인선 107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 - 걷는사람 시인선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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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07
박인하 시집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 출간

“하얗게 마른 얇은 낱장을 걷어내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이한 밤이야”

우리가 목격한 가장 빛나는 어둠
삶을 구성하는 잔혹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의 시(詩)
광주에서 태어나 2018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인하 시인의 첫 시집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가 걷는사람 시인선 10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박인하의 시집을 펼치면 “아직 살아 있구나 늦지 않았어”라는 다정하고도 서늘한 첫 속삭임이 우리를 반긴다. “뜨겁고 차가운 것이 이생의 일인지도”(「테를지의 밤」) 모르기에, 시인의 세계는 삶을 구성하는 잔혹하고 아름다운 생명력과 그것이 지닌 다채로운 온도로 가득하다. 의도적으로 구성된 “어느 곳으로도 건너갈 수 없”(「검은 식물」)는 “희고 빛나는 세계”(「눈물」)로 걸음을 옮기면, “땅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보이지 않는 도시」)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그의 인물들이 보인다. 이들은 외부의 규격에 자신의 모양을 맞추는 대신 “누구도 쉽게 나를 호명하지 못”(「테를지의 밤」)하도록 적극적으로 이탈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역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시인은 “손을 꼭 잡고 빛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던 연인들”(「부러지는 빛」)의 주위로 쏟아져 내리는 빛을 감각하고, “웃을 수 있는 건 지켜보는 쪽”(「첫 번째 수업」)이라는 명제의 바깥에 남겨진 응시당하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물성의 뒷면이 가진 고유함을 온전히 응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짐작해내는 오롯한 풍경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니 뒤돌아 도망치는 것이 끝내 부끄럽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시인은 일러 주는 듯하다. 이곳에서만큼은 “우리 도망가자”라는 말이 더없이 달콤하다.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이의 마음에 녹아 있을 너른 함의와 그 내밀한 속을 겁내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한 시인의 마음이 이곳에 있으므로. 그러니 “그 후로 슬픔은 오래 녹지 않는 것”(「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다 해도 “우리”는 괜찮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이 써 버려서 망가진 마음”을 향해 조곤조곤히 속삭이는 목소리와 “차라리 죽어 버려라 없어져 버려라”라는 격렬한 염원이 담긴 절규의 끝에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부르는 노래”(「검은 식물」)를 가만히 따라 불러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이렇듯 찐득찐득한 밤과 죽음과 세상의 온갖 어둠으로부터, “혼자가 될 때까지 하나씩 버려지는 것들”(「리모델링」)의 바깥으로부터. 시인 박인하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빛의 파편 속”(「시뮬레이션」)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낸다. 최백규 시인이 이야기하듯, “하나의 인생이 또 다른 하나의 인생을 들여다보았으므로 어느 잠에서 우리는 옷깃을 스치며 서로의 곁을 지나칠 때가 올 거라”는 희망이 이곳에 있다. “무한 반복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블랭킷」)음을 믿는 이의 시에는 반드시 마음속 여린 부분을 건드리는 울림이 있기에, “멀리 있는 빛 속을 출렁”이고 “서로의 슬픔으로 언제나 다정”(「조용한 산책」)한 이 세계는 기어코 환하게 아름답다.
해설을 쓴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죽음과의 대면을 집요하게 시도”하려는 시인 박인하의 작법에 주목하며, “시인이 할 일은 우리가 신의 상실에 따른 빈곤 속에 있으며, 우리의 삶이 죽음과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죽은 것들을 태우는 것이 시의 불을 살려내는 일”이라고 말하며 “그 시의 불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짚어낸다.
“서로에게 다가가서 부러지던 빛”의 곁에는 언제나 “거기에서 다시 돋아나는 빛”(「부러지는 빛」)이 있듯이. 이 책을 펼친다면, 어둠을 곱씹고 더듬으며 더 환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한 편의 생에 흠뻑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박인하

저자:박인하

광주에서태어나2018년《서정시학》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1부놀라지마이건어차피놀이니까
테를지의밤
눈물
안녕,요요
아름다운루나
마스크팩
나만아는나의이름은
굿모닝
들어봐요
플레이
침대
겨울방학
주말의명화
오래된극장

2부서로의슬픔으로다정합니다
조용한산책
비둘기와장미와여자
블랭킷
검은식물
빛의방향
봄밤
달콤한손가락
저녁의새
다정한저녁
호우
체리를먹어요
일요일
건축
페이드아웃
리모델링

3부땀이배도록깍지를끼고더멀리
붉은욕조
첫번째수업
팔월
여덟개의별
검고푸른바닥
비누
물위의사제
체크아웃
무화과
맹목
소금기둥
보이지않는도시
수박

4부우린왜서로다른곳에있나요
나는아직처녀예요

백일홍편지
바이킹
별이빛나는밤
리플레이
개종
어둠속의식사
시뮬레이션
나는여기에있어요
써니사이드업
봄야유회
부러지는빛
스모킹룸

해설
시의불을지키기위한망자와의동행
―이성혁(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아직살아있구나늦지않았어너덜거리는자루가득장작을메고오가는밤의노역은불을지키는시간바람에넘어진것들차곡차곡주워다가추운밤부려놓으면뜨겁게솟아오르는불의제전나는불을지키는자,치장없이허름한옷가지로성별을감추었기에누구도쉽게나를호명하지못한다나는이름없이늙어가는가난한노파불을살피느라언몸을녹일수없다꺼져가는불씨를살려내고문밖으로나서면얼굴을찢는바람뿐어떤날은별도뜨지않아캄캄한숲을비틀거리며걷는다뜨겁고차가운것이이생의일인지도잘도자는구나장작이타는소리꿈속에서도들리는지재가되어가는소리다담요를걷어차고잠든걸보니오늘도나의불길은뜨거웠구나
―「테를지의밤」전문

다가버렸는데늘너만돌아와

꼭쥔손을떠나갈때의탄력은다시돌아오겠다는약속
그래서거침없이툭내던지는즐거운놀이놓쳐버린게아니어서다행이라생각했어어떤봄날은내내온몸이홑이불속에서이리저리바스락거렸거든형체도없이몸을누르는손목들그리고다시피어난꽃들

어떤날들은돌아오지말았어야해

다른얼굴로오면다른것인줄알고피식웃음이나네이제더노련한변장술이필요하지않겠니그럼모르는척조금속아주다네옆구리를쿡찔러줄게놀라지마이건어차피놀이니까즐거워야해눈물같은것없이도짜릿할수있지후후마음이란게자주변덕을부리니까하는얘긴데반칙같은걸써서먼저도망가지는마네몸에감긴줄이다닳아끊어질때까지멈추지않는놀이지루하지않게자꾸만다른이야기를들고돌아오는너라는시간
―「안녕,요요」전문

오늘도그와걷습니다가만히귀를세우면발걸음에는냄새가있습니다신발을끄는소리에는기분도묻어있습니다귀로맡는냄새는쓸쓸합니다그는만질수없는것들을만집니다손을내밀면바람도그의손에서는몸을가집니다나의털들은그의손끝에서가지런해졌습니다그는말이없습니다내귀에도들리지않는혼잣말을가끔할뿐,나는말을배우고싶었습니다입을열면찬란하게쏟아지는나의말은어디에도닿지못하고흩어지고맙니다나는소리내지않기위해보고듣는일에몰두합니다소경이라는말에는무수한빛이담겨있어그는멀리있는빛속을출렁입니다오늘은어제보다꽃들의얼굴이커졌습니다킁킁거리는나의오후는잠시그에게서꽃들에게이동합니다나를부르는소리가들립니다나의두눈은그를위해먼곳을바라봅니다우리는서로의슬픔으로언제나다정합니다
―「조용한산책」전문

많이써버려서망가진마음아
차라리죽어버려라없어져버려라
검은안대를쓰고달려드는밤이계속되었다
두려움을잊기위해부르는노래는
갈라진소리를내며넝쿨처럼목을감아버렸다
누군가가만히노래를따라불렀다
―「검은식물」부분

우리도망가자

심장의고동은
살기위한것인지죽기위한것인지
모든것이너와나를잡으러다니는비밀경찰
지나치던바람도밀고자처럼수상하더라

모르는곳으로가자
누가우릴알아볼까
땀이배도록깍지를끼고더멀리
네가버린애인은울고있을까

세상에서가장나쁜죄를뒤집어쓰고
밤이흘리는유혈속에서우리는조금씩붉어졌네
함께울지못하고혼자훌쩍였네
우리는서로를모르는사이
나를물으면세번만부인해

네가버린나는많이울었던가
밤이길었다는기억
우리는아무에게도붙잡히지않았네
뒤를돌아다보았을뿐

그후로슬픔은오래녹지않는것이되었다
―「소금기둥」전문

이도시는정박한한척의배선장은오래전에죽어버렸다너무오래묶인탓에사람들은이곳이배라는걸잊어버렸거나그런사실조차모른다불만은품지만불안을느끼는사람은없다떠나온곳도돌아가야할곳도없는것처럼적막하게앉아있다너는지쳐가고네가지쳤으니마음에품은말들을참으면견딜수있나우리는가난때문에슬픈가,그것말고는없는가

항해의기억을잃어버린배,가려던곳이어디였는지도모르고어디에서왔는지도모른다다만이땅이우리를받아들여주지않을때비로소우리를느낀다너무가난해서신을잃어버리거나가난해서신을기억한다국적이없는나날들이지루하게흘러간다거대한뻘에박혀서
―「보이지않는도시」전문

나는지금질서정연한세계를
혼돈에빠트리는중이다

(중략)

아주오래전에사라져버린빛의파편속에서
어느날이곳으로배달되어온
파손되지않은처음의것
안전하다고믿어온세계를보고있다
―「시뮬레이션」부분

손을꼭잡고빛의뒤편으로사라져가던연인들

바람이분다
나무의가지끝흔들리는연분홍색으로
피어나는저것들빛을다들이마셨다
그곁에서조금씩휘어지는그늘의행간을
왔다갔다다시바람이분다
알지못하는어떤곳에서내게로왔던이여
봄을비유하는나의문장은언제나당신
서로에게다가가서부러지던빛
그리고거기에서다시돋아나는빛이있었다
―「부러지는빛」부분

시인의말
남의집옥상에서있었다
어디로가야하는지알수없어
마당으로도담장밖으로도
뛰어내릴수없는꿈
밤은넓고깊었다

나는어쩌다이곳에있을까
바람이차다
두꺼운당신을입어야겠다

2024년1월
박인하

추천사
이시집은안과바깥,이곳과저곳,그때와지금을이야기한다.그렇기때문에이시들을읽고있으면어디로가야하는지알수없이멍하니서있는듯한기분이든다.모든일이전생인지이생인지구분할수도없다.죽었다가살아나는밤이잠들었다가일어나는아침과이어지는것이다.나는이시집을시인의자서전이라생각한다.하나의인생이또다른하나의인생을들여다보았으므로어느잠에서우리는옷깃을스치며서로의곁을지나칠때가올거라믿는다.그순간다시는여름의한복판으로돌아오지못할거라는예감이들지도모른다.그래도괜찮다.칠월이가도팔월이올것이다.이시인은,시집은,시들은처음부터그러한미래를알고있다.젖은돌을긁는바람이있듯이.붉은꽃은다동백이라고읽는이가있듯이.
최백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