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의 마을 - 걷는사람 소설집 12

도망자의 마을 - 걷는사람 소설집 12

$17.00
Description
존재하고 있음에도 결국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젖은 발로도 명랑하게 앞을 향해 걷는 존재들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정임의 두 번째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이 걷는사람 소설 열두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2016년 첫 작품집을 발간하면서 “동세대들의 삶을 씨방으로 삼고, 탄력 있고 쫄깃한 문장의 힘을 과육으로 삼”(강동수 소설가)고 있다는 평을 들었던 작가는 분명 존재하고 있으나 마치 무명(無名)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견디는 삶’을 강요하는 이 시대 캐치프레이즈를 향해 흠씬 하이킥을 날린다. 소설을 넘기면 손에 쥔 것은 쥐뿔도 없지만 세상이 짜 놓은 굴레에, 남들 시선 따위에 굴종하지는 않겠다는 단단한 자부심을 가진 인물들이 제각각의 형상을 한 구름처럼 유유하게, 자유분방하게 펼쳐진다. 자기 안의 진정한 사람다움을 신뢰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정임 작가는 마치 그 질문에 답하듯 오지랖 넓은 흰머리 할머니, 재칫국(재첩국)과 두부를 파는 상인, 참말과 거짓말을 버무려 쓰는 소설, 골목의 고양이들, 옥상에서 키우는 작물 등을 등장시키며 작은 숨구멍들이 여기 있으니 좀 보아 달라고 이야기한다.

보소! 아지매, 아침 좀 늦게 먹어도 안 죽는다! 야아? 영기 아지매! 어? 어? 있다가 가라. 보소! 쫌만 있다 가라니까? 가장 강력한 파장을 지닌 목소리 출현. 지나는 사람을 모두 불러 모을 기세다. 흰머리 할매다. (중략)
옆집 재봉틀이 돌아간다. 바깥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엮어서 재봉틀로 옷을 지어 입으면 무척이나 무겁겠지. 어깨에 쏟아지는 무게가 천근만근이라 다리를 옆으로 벌려 가며 겨우 걷겠지.
-「오르내리」 가운데

주변을 둘러보면 다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동시에 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중략) 나는 겉보기에 정상이므로, 아무도 이 일을 목격하지 않았으므로, 나쁜 일을 당했다는 어떤 증거도 내보일 수가 없어요. 어느 것 하나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결국 나는 나를 의심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아니면 다들 똑같이 당했는데 나만 이렇게 과하게 힘들어하며 사는 것 아닐까.
-「비로소, 사람」 가운데

『도망자의 마을』에서 작가는 열심히 살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불편하고 고단해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을 선보인다. 이들 모두가 우리 곁에 숨 쉬는 이웃이요 바로 나 자신 같다. 백수가 되어 가난한 산동네에 살면서 치매 걸린 엄마의 요양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나(「오르내리」), 부지기수로 사기를 당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버는 돈을 모두 빚을 갚는 데 써야 하는 수현(「도망자의 마을」), 과로와 스트레스로 각종 지병을 안고 있지만 직장에서 병가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점점 작아지는」), 신장 투석을 해야 하는 홀어머니와 사는 프리랜서 비혼주의자 수안(「뽑기의 달인」),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며 함께하는 무직 비혼주의자 고무와 호양(「벽, 난로」), 치매에 걸린 엄마가 나날이 변해 가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두려워하는 이선(「비로소, 사람」)이 그들이다.
해설을 쓴 장예원 평론가가 강조한 것처럼 이정임의 소설은 “모두가 〈달려라 하니〉의 하니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아도, 달리기 순위 안에 들지 않아도, 서로가 곁을 내주는 ‘작은’ 벗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잠시나마 ‘고독한 자아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있으면서도 없는 구름 같은 존재들일지라도” 말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에 다소 지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의 주체들은 고달픈 장면들을 응시하며 그 안에 가득한 고통을 들이마시면서도 비관에 빠져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정임의 소설에서는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특유의 명랑성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곧 암담한 현실을 적절한 경계와 한정으로 형식화하는 이정임만의 “예술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저자

이정임

저자:이정임

부산에서태어나살고있다.2007년부산일보신춘문예에단편소설「옷들이꾸는꿈」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손잡고허밍』,산문집『산타가쉬는집』을냈고부산소설문학상,부산작가상을수상했다.

목차

오르내리
도망자의마을
점점작아지는
뽑기의달인
벽,난로
비로소,사람
웃는게웃는게아니다

해설
뜬구름을잡고용기를감행하다
―장예원(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끈적이는방바닥에귀를바짝붙인다.고롱고로롱고로롱.물소리보다노랑이의배소리가더크게들린다.워터파크의기다란미끄럼틀을떠올린다.노랑이와내가이아래하천바닥을미끄럼틀삼아바다까지흘러가는장면.엄마가있는요양병원은원래바다가있던자리에지어졌다.그땅아래도바다라면이대로거기까지흘러가엄마를보고오면좋겠다.가능하다면이모도함께.이모도아직살아요양병원에입원했다치고.
―「오르내리」,28쪽

솨아아,갑자기생각난것처럼바람이분다.느티나무이파리가손을크게흔들자매미가운다.할매가준화분의깻잎이흔들리고내등도순간선득하다.이바람은곧계단과골목을따라구석구석웅크린집들을방문할것이다.올라가입시다,사람들의인사를들으며내려가다가엄마가있는병원창문에잠시기대겠지.그리고곧바다에닿는다.올라가자는인사를바다에남기며.
그러면바다는오래기다린것처럼바람을보낼것이다.산을향해오르는축축한짠바람을.올라가입시다.모두의인사에대한대답처럼.
―「오르내리」,39~40쪽

저,이래봬도구름감상협회회원입니다.2004년에영국에서만들어진구름옹호단체거든요.우리협회선언문에그런말이있어요.우리는구름이야말로대자연의시이며최고의평등주의자라생각한다.사람을가리지않고환상적인모습을보여주기때문이다.우리는파란하늘주의를만날때마다맞서싸울것을맹세한다….
종알종알,거짓말인지참말인지은주는꿈에젖어있는표정으로선언문을암송했다.수현은은주가가리킨구름을보며분명존재하는데도결국없는것이라면자신이쓰고있는소설도마찬가지아닌가싶었다.아,그래서뜬구름잡는소리라고하는건가?그렇다면나는뜬구름을잡고어디로가는것일까.
―「도망자의마을」,55~56쪽

휴가를오기전에는아침마다상상했다.‘출근하는사람들의한숨이깊어서지구는곧땅이꺼져멸망이다.’땅꺼짐은큰싱크홀로이어지고이깊은구덩이들은지구한가운데를관통하는구멍이된다.그구멍속으로세상나쁜것들이굴러떨어진다.살인,방화,전쟁,질병,마약,종교,국가,신념,믿음,희망,대출,야근…이것들은점이되어저멀리우주로둥둥흘러간다.
이땅꺼짐의시작은회사의내책상부터여야한다.
―「점점작아지는」,90~91쪽

수안은옥자가엄마지만불편했다.탁월한선택만하는옥자가뽑은유일한꽝이자기인것만같았다.그래서어릴땐인정받으려노력했고성인이되어서는흠잡히지않으려애썼다.수현이결혼할때옥자는살던집을줄여서돈을보탰고아이를낳았을때는병원소속약사인수현을대신해육아를해줬다.투석을받으러다닐때가되어서야옥자는모든일을쉬었다.
아픈사람이혼자살수는없다며가족과친지가등떠미는바람에수안은옥자와살기시작했다.어린아이둘을돌보려고일까지그만둔수현앞에서수안이내밀수있는거절카드는없었다.일에치여살다가평화를찾아부산에내려왔는데더큰전쟁이기다리고있었다.
―「뽑기의달인」,139쪽

고무야,나는가끔서울에서처음살았던고시원을떠올려.창문도없는좁은방의사방벽.그곳의방에서팔만뻗으면닿던그벽들은내울타리였지만동시에함부로만질수없는남의벽이었거든.아버지의집에서살때도내방이지만내방이아닌기분이자주들었는데고시원은다른차원에서내방이아니더라고.그래도그런벽이라도가지려면돈을벌어야하니까야근도하고주말알바도했던거거든.살아가야하니까.형편이나아져서원룸에살게되었어도그런상황은똑같더라.그런데여기로이사를오고나니그렇게고생스럽게일을했던게아득하다.누워있는이방의사방벽이내거라고생각하면,쫓겨날일이없을거라고생각하면,벌써마음이부자다.
―「벽,난로」,177쪽

사람전으로,쑥과마늘을먹기전의곰으로돌아가고싶다.사람따위전혀모르는곰으로살다가곰으로죽는삶을살아야지.그렇게못한다면,나는만들어지기전으로,나라는것의씨앗이발생하기이전으로돌아가겠다.애초에없던사람아니,없던곰이되겠다.겨우겨우사람모양으로사람구실하고살게되었지만감당해야하는일들이벅차다.지긋지긋한하루에빗금을치며오늘,오늘을보낸다.이게무슨의미가있는가.돌아갈수있다면어떤것으로도태어나지않은상태,그시간으로돌아가겠다.
―「비로소,사람」,201쪽

우리동네여자들의도망치기,달리기역사는유구하다.남자가집을두고도망갔다는소문은들어본적없다.장기외박이존재할뿐이었다.여자들은곗돈을들고도망가고,불륜을저질렀다고도망가고,노름판에빠져서도망가고,지루박춤선생을초빙해춤을추다가들이닥친남편을피해도망갔다.대개는돈이무섭거나남편이무섭거나자기자신이무서워서도망가는경우였다.그렇게치면우리엄마또한유력한도망예정자다.아빠는하루가멀다하고노름판을쏘다니며빚을졌으니까.
―「웃는게웃는게아니다」,263쪽

작가의말

첫소설집을낼때까지,내생활은만남의연속이었다.만남은늘내게하나의세계를열어서보여줬다.등단후에소설세계,봉순이를키우면서고양이세계,결혼하니신혼의세계,엄마와함께투병의세계….내가지나는길의한쪽편엔막건설된세계가둥글게굴을지었다.하지만어찌된판인지책이나온이후로는이별의연속.친정집이있던동네는알아볼수없게변했고,엄마는병원으로갔고,고양이들은하나둘죽어서무지개다리를건너고….지나는길마다무너진세계라서발이푹푹빠진다.
두번째소설집『도망자의마을』은이별의세계에지어졌다.오직,도망가기위해지어진이마을은사람이있지만산다고말할수없다.그래도살아보려고젖은발로도앞을향해걷는사람이머무는마을.이미무너졌으니앞으로무너질일은없는마을이라안심되는마을.나는이마을을건설하면서자꾸만없는것을상상했다.아무도이별하지않은것처럼,누구도망가지거나도망가지않았다치며.그렇게거짓말로도망다녔다.쓸쓸하지만꽤명랑한마을이라자부한다.
(중략)
이책이나온뒤,내앞에는어떤세계가펼쳐질까.그세계의첫장면만큼은온전히즐기고싶다.
수정동산복도로에서

추천사
우는일이누군가를부르는일과같다면소설또한같을것이다.정말로이정임작가의소설은누군가를부르는낮은목소리같다.저물녘에들려오는기척같다.가끔그럴때가있지않은가?길을걷다가문득사람의기척이느껴져서주위를두리번거리는그런때말이다.무섭기는커녕이대로내갈길을가도되는지돌연망설여지는그런때말이다.
그래서일까.이정임작가의소설을읽는동안나는누군가의창문앞을지나가고있는듯한느낌에여러번사로잡혔다.‘있는데없고없는데있는’기척들로가득한길에서‘웃는게웃는게아닌’표정들을마주친다면,우리중누구라도같은마음이지않을까.이대로내갈길을가도되는지,잠시멈춰서야하는건아닌지.
이책을읽는동안줄곧그런마음이었다.일상의기척들이쌓이고쌓여만들어진이야기,그이야기들을웃지도울지도못하는마음으로읽어가면서나는이정임작가의소설이오랫동안누군가를부르는목소리로남길바랐다.
약속하건대,멀어졌다가가까워지는마음이오르내리는여정을따라가다보면,어느순간‘팟’하고반짝이는빛의순간을맞닥뜨리게될것이다.그러면나도모르게‘작아지면서멀어지고,사라지면서반짝이다가다시팟하는순간’을기다리게될텐데다행히나는다시한번그순간을목도할수있었다.그렇게팟,팟반짝이는여러순간들로채워진삶을기대할수있게되었다.그믿음이바로이책에있다.
―황현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