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신용목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신용목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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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일들이 있어서”

존재하던 것이 사라져버리는 필연적 운명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특별한 시간운용법
백석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노작문학상 수상 시인 신용목 신작 시집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신용목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이 문학동네시인선 158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소시집으로 묶은 다섯번째 시집 『나의 끝 거창』(현대문학, 2019)에 나고 자란 곳이자 떠나온 곳, 지키고 싶은 시절이자 지우고 싶은 시절을 품은 곳 ‘거창’을 전면에 드러낸 자전적 이야기가 담겼다면, 그 전후에 쓰인 시 53편이 일곱 개의 부로 나뉘어 이번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에 묶였다.
시인은 시간을 새로이 운용하는 자다. 지나버린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천착이 빚는 슬픈 아름다움이 시인을 그리 만들었다. 존재하던 것이 사라져버리는 필연적 운명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시인 특유의 시간운용법이 이 시집 전반에 드리워 있다. 있었던/있는 것을 끝까지 포착하기, 그것에 대해 말하기, 지켜내기. 시간을 멈추어서라도. 덕분에 우리는 이 간절한 지연의 세계 속에서 “하나의 빗방울과 다른 빗방울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서” “영혼의 핀셋을 나무의 긴 손가락에 쥐여주고, 계절의 톱니바퀴에 감긴 울음과 울음의 결들을 다 뽑아 한낮의 푸른 잎으로 달아놓을”(「시간은 취한 듯 느리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물 끓는 소리에서 피어나는 물방울처럼

창문 너머 공터에는 단독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책장으로 가 시집을 펼치고 ‘라일락’이라는 글자 속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는다
지금 사라지는 것이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사랑해요, 고백은 영원히 죽지 않아서 사람이라는 숙주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사랑해요, 지금쯤 저 배우는 퇴근했겠지
고백으로부터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수없이 지나간 일요일이 덩그렇게 남겨놓은 오후
아파트에 살면서 갖다놓은 화분
17층 공중의 작은 땅
_「생활사」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일들이 있어서”(「예술영화」) 시인은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비 오는 날, “가로등은 그대로 멈춰버린 거대한 빗방울 바닥에 부딪쳐 흩어지기 직전의 시간을 매달고 있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고 씀으로써 그 순간을 봉인하고자 한다. “그러면 보인다”. “내가 늘 끌고 다녔던 마음 아니/ 묶어놓았던” “개라는 빗방울”이(「유령 비」).
있었던/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집 곳곳에 무언가 ‘끓고’ 있다. 가령 주전자 속에서 물이 끓고 있다. 물이 졸아들고 주전자는 텅 비겠으나 그 수증기는 조용히 구름이 되고, “구름의 발”로써 지상에 닿는 비. 그렇게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오는/ 비”를 떠올려보자. 주전자 속 물은 사라져버린 것인가. 하늘과 땅을 잇고 스미는 비와 무관한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는 없고 “어떤 이별도 남아 있지 않은 인연에게/ 남은 것”(「구름 제조법」)이 더는 없다 단정할 수 없다. “‘형태 없는’ 가능성에 형식을 입히는 작업에 복무하는 사람, 그가 곧 시인인 셈이다. 이 시인 파수꾼은 단지 과거의 어느 영광된 시간을 지켜내는 데 관심을 두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존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가능성을 지켜내고자 성실하게 움직인다. (…) 신용목의 시는 몇몇 글자에 욱여넣을 수 없는 삶,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세상의 숱한 존재에 대해 ‘영영 모른다’고 고개 돌리지 않고 그 존재 자체가 여러 시간성을 복합적으로 품으면서 ‘있는’ 순간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는 그런 것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양경언, 해설에서)
1부 ‘비’를 시작으로 ‘배’ ‘밤’ ‘새’ ‘끝’ ‘꿈’ 그리고 다시 7부의 ‘비’로 이어지는 일곱 개의 부 나눔. 신중히 나뉜 각 부의 열쇳말인 듯, 진실이 응축된 결정적인 한 음절인 듯, 그것을 가만히 입안에 머금고 신용목 시인이 파수꾼처럼 지켜낸 세계를 가만히 거닐어보기를. 그러다 만난 이가 건넨 우산을 펼쳐 가만히 머리 위로 써보았을 때, 비로소 쏟아지는 비를, 그 비가 적시는 것을 새로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저자

신용목

1974년경남거창출생으로,고려대학교대학원국문과등에서현대문학을공부했다.2000년작가세계신인상에「성내동옷수선집유리문안쪽」외4편이당선되어등단하였다.시집으로는『그바람을다걸어야한다』,『바람의백만번째어금니』,『아무날의도시』,『누군가가누군가를부르면내가돌아보았다』,『나의끝거창』등이있다.시집『백만번째어금니』로제2회시작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비
오르골/구름제조법/책

2부배
생활사/모든시에는산문적인이유가있다/대부분의나/슈게이징/그림자역/삼색볼펜/밤/예술영화/독서의아름다움/다인실다인꿈/시간은취한듯느리고/나는알아차리게될까/나를깨우고갔다/밤과단하나의그림자

3부밤
유령비/도하

4부새
외계의기후/눈사람/취중농담/유령상자/겨울의미래/우리가/가양대교/아무도없을때/수중도시/활주로/비의숲/타버린숲/블랙아웃

5부끝
액체인간/국자/모르는겨울/슬픔의거인이왔다/이세계/종례/유기/속초/미래/중고가전수거차량처럼/누구여도좋은/헤링본

6부꿈
나뭇잎은칸칸이떨어집니다/꼭짓점/해변/대성당/눈사람의시체를찾아바다를헤매는자의/지느러미가/무턱대고걸어나온/유령들의물놀이처럼/좋았을

7부비
모든우산은비의것

해설_파수꾼,시
양경언(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지금여기서사라지는것이있다물끓는소리에서피어나는물방울처럼

창문너머공터에는단독주택이들어서고있다

책장으로가시집을펼치고‘라일락’이라는글자속에서라일락향기를찾는다
지금사라지는것이있다
텔레비전을켜면
사랑해요,고백은영원히죽지않아서사람이라는숙주를갈아타고갈아타고

사랑해요,지금쯤저배우는퇴근했겠지
고백으로부터

여기서사라지는것이있다수없이지나간일요일이덩그렇게남겨놓은오후
아파트에살면서갖다놓은화분
17층공중의작은땅
_「생활사」에서

“이렇게말하지않으면//사라지는일들이있어서”(「예술영화」)시인은말하기를포기하지않는다.어느비오는날,“가로등은그대로멈춰버린거대한빗방울바닥에부딪쳐흩어지기직전의시간을매달고있는단하나의순간”,이라고씀으로써그순간을봉인하고자한다.“그러면보인다”.“내가늘끌고다녔던마음아니/묶어놓았던”“개라는빗방울”이(「유령비」).
있었던/있는것을증명하기위해시집곳곳에무언가‘끓고’있다.가령주전자속에서물이끓고있다.물이졸아들고주전자는텅비겠으나그수증기는조용히구름이되고,“구름의발”로써지상에닿는비.그렇게“주전자를새까맣게태우며오는/비”를떠올려보자.주전자속물은사라져버린것인가.하늘과땅을잇고스미는비와무관한가.그렇지않다.그러므로“어떤일도일어나지않는하루”는없고“어떤이별도남아있지않은인연에게/남은것”(「구름제조법」)이더는없다단정할수없다.“‘형태없는’가능성에형식을입히는작업에복무하는사람,그가곧시인인셈이다.이시인파수꾼은단지과거의어느영광된시간을지켜내는데관심을두고가만히있는사람이아니라,많은존재가잃어버려서는안되는가능성을지켜내고자성실하게움직인다.(…)신용목의시는몇몇글자에욱여넣을수없는삶,그것을짊어지고있는세상의숱한존재에대해‘영영모른다’고고개돌리지않고그존재자체가여러시간성을복합적으로품으면서‘있는’순간을드러내고자한다.시는그런것이나타날때까지……기다린다.”(양경언,해설에서)
1부‘비’를시작으로‘배’‘밤’‘새’‘끝’‘꿈’그리고다시7부의‘비’로이어지는일곱개의부나눔.신중히나뉜각부의열쇳말인듯,진실이응축된결정적인한음절인듯,그것을가만히입안에머금고신용목시인이파수꾼처럼지켜낸세계를가만히거닐어보기를.그러다만난이가건넨우산을펼쳐가만히머리위로써보았을때,비로소쏟아지는비를,그비가적시는것을새로이마주하게될것이다.

※신용목시인과의5문5답미니인터뷰

Q.어느덧여섯번째시집입니다.출간소회부터여쭙고싶어요.
어느날엔거짓말처럼바위같은마음을가질수있지않을까기대했는데,허사였어요.늘첫시집처럼서툰것같아요.바뀐게있다면,언제부턴가마지막시집을준비하는듯한절박함이종종찾아왔다는건데요.서투름도절박함도모두매순간의상실감때문이겠지요.
상실이라는게이상해서정면으로마주하지않으면손실이되고말잖아요.스스로를잃어버리지않으려고사라지는순간들앞에오래머물렀던기억이납니다.
그래서이시집에는첫시집을엮는듯한서투름과마지막시집을내는듯한절박함이이상하게뒤섞여있는느낌이들어요.만남과이별을동시에겪는자의마음같은것.

Q.시집제목이독특한데요,어떤연유로붙이신제목인지궁금합니다.실제로시집에'비'의이미지가제법등장하기도하여,이이미지에특별히집중한이유가있는지도궁금합니다.
일상의무심함을지나가다가문득비를만났을때,그무심함은깨지고말죠.비는‘온다’는사실자체만으로우리를깨우니까요.
또비는적시잖아요.지붕과담을,마음과몸을,밤과어떤시간을……깁잖아요.구름이라는헝겊을덧대비의긴실로하늘과땅을깁는것처럼,빗소리를덧대서는지나간것과지나가지않은것들을,기워내잖아요.
운명이뛰어드는적합한순간이따로있지는않을거예요.“비에도착하는사람들은모두제시간에온다”고말할때,비맞는‘나’는최소한이전의‘나’가아니거나비로소진짜‘나’겠지요.그순간의절대성이‘나’를어떤운명속으로이끄는게아닐까합니다.
그래서이시집을만나는사람들이모두각자의비를맞았으면좋겠다고생각했어요.

Q.7부로나뉘어시가엮여있습니다.다른시집에비해부나눔이많은편인데요,이번시집을엮으며특별히중요하게생각하신게있을까요?
그저낙하하는것처럼보이지만,비또한한방울한방울필사적인이유를거느리고떨어질거예요.그래서내게찾아온순간들에한칸씩자리를내주고싶었습니다.그러다보니시집의방이많아졌고요.방마다특별히대단한무언가가들어있다는말은아닙니다.도리어빗소리처럼지붕위를잔걸음으로지나가거나비냄새처럼눅눅하게머물다사라지고말것들이대부분이겠지요.아주평범한생활의단면들로이루어진것들말입니다.
다만,내가그순간속에놓여있었다는것을잊고싶지않은마음이었습니다.
우리에게주어진삶이운명이라면비록거부할수는없더라도,그운명을대하는태도를결정할수는있으니까요.시는어떤진리나혁명은아니지만,삶과사랑에관한태도일수는있으니까요.

Q.이번시집수록작중마음에특히오래남은시한편을골라소개해주신다면?
마지막시,「모든우산은비의것」입니다.가을비에관한이야기이고,그가을비속에숨어있는어떤눈망울에관한이야기입니다.
궁극적으로우리는모두비맞을운명이잖아요.그비가무엇이든간에……사랑과이별과죽음과운명을빌려쓰는모든것들이비처럼내릴테고,우리는젖겠지요.슬픔과쓸쓸함과고통같은것에……
그때,비너머에서자신을바라보고있는투명한눈망울하나를만나실수있기를바랍니다.

Q.시집을읽을독자분들께한말씀부탁드려요.
아주먼훗날새로운지적생명체가나타나인류를기념하는박물관을지었을때,거기전시되는것은핵폭탄이아니라인간의마음일것입니다.과학의이기가아무리발달한다해도,어느한순간삶의복판에천국과지옥을건설하는그마음의크기에비할바는못될테니까요.
어느외로운과학자가기계더미에파묻힌인간의육체에서기어이마음을발굴해내서는환한조명아래빗소리처럼세워놓을겁니다.무수히두드리던인간의창문과그인생을채웠던습도를그래프로그려놓겠지요.
네,하루하루의날씨속에서자주비에젖는바로그마음을말입니다.
이시집이그옆에우산처럼접혀있으면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