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시 (함기석 시집)

음시 (함기석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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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굴하지 않는다
색채를 지우는 눈보라 악보가 하늘에 펼쳐질지니”

세계를 하얗게 칠해 다시금 언어를 창발하는 시
파괴 뒤의 공허로부터 비로소 펼쳐지는 생의 지평
문학 언어라는 구획을 넘어서서 한국 현대시의 전위를 몸소 실현하는 함기석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음시』를 문학동네시인선 168번으로 출간한다. 이상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애지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익히 공인된 그의 실험 정신은 이번 『음시』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함수 그래프와 수학 기호가 무차별적으로 활용되고, 화자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시집은 낯설지만 직설적인 상상력의 총체 그 자체다. 『음시』는 익숙한 사고의 틀을 의문에 붙이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 자유롭게 깊어지는 언어로, 즉 언어의 가능성이 곧 삶의 가능성이 되는 무아지경으로 독자를 이끈다.
저자

함기석

1992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시집『국어선생은달팽이』『착란의돌』『뽈랑공원』『오렌지기하학』『힐베르트고양이제로』『디자인하우스센텐스』,동시집『숫자벌레』『아무래도수상해』『수능예언문제집』,시론집『고독한대화』,비평집『21세기한국시의지형도』등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공간U
오염된땅/포로기/붉은탑/검은꽃탄자니아/광화문/국립낱말과학수사원/에셔병원/당신/어휘공화국/어휘공화국/가출소동/남의침묵-개성공단폐쇄및UN결의뉴스를지켜보던어느풍산개의한숨/OK레스토랑의결투/전투적기계식물무궁화/귀뚜라미다비식/나르코테스트/한국병원/음시

공간W
서해에와서/()/쌍둥이유령로골로지와야골로지의대통령국회국정연설문교차낭독/자책한과부가부과한책자-전대미문의문미대전/연인-1차원여야의2차원나체침실,한여름밤의자장가또는체위연습/연인-분터골매장지유골분석함수,라인이된혼령들의라임/오공초등학교조회시간/게으름뱅이건축가/낱말전쟁/명제산/밀지/기호부대병사들야간작전일지/접속家의네마녀들/작전명,하늘을나는돼지-제2차세계대전오가사와라(小笠原)학살사건/독일가곡무대/유리창/흑백벽돌수용소-어둠속225人의유대인포로와가시철조망/R=kr/부조화연인-신인(神人)의생사,캉캉을추는말푸코와빙글빙글감시탑

공간R
1mm꿈/어떤소극장/눈의병실에서/이스파한/분양의계절/한지붕몇가족/싸락눈오던날/마스크/날개달린돌/심장잃은새이프/해조음

공간H
나나의인공정원셀(cell)/기이한끌개A/엠/중복/정오의정원-수직이등분된나무눈(noon)의좌측면/정오의정원-수직이등분된나무눈(noon)의우측면/플랫랜드/숫자族의습격/카운트다운해변에서의카운트다운/열개의입이달린숫자괴물크아크아/유령피아노/0차원숲/유령알레프영이사는아홉집수리마을/조기입학자/나는데카르트여객기실종사건을추적중인라디안/사라지는벽뒤로사라지는피사체들/기이한끌개B/부조화연인-유령시인시시포스(Sisyphos)와우주소녀서클(Circles)

공간T
수학자누(Nu)0/수학자누(Nu)1/수학자누(Nu)2/수학자누(Nu)3/수학자누(Nu)4/수학자누(Nu)5/수학자누(Nu)6/수학자누(Nu)7/수학자누(Nu)8/수학자누(Nu)9/수학자누(Nu)10/수학자누(Nu)11/수학자누(Nu)12/수학자누(Nu)13/수학자누(Nu)14/수학자누(Nu)15/수학자누(Nu)16/수학자누(Nu)17/수학자누(Nu)18

해설|음시,비존재의집
박혜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나는굴하지않는다
색채를지우는눈보라악보가하늘에펼쳐질지니”

세계를하얗게칠해다시금언어를창발하는시
파괴뒤의공허로부터비로소펼쳐지는생의지평

문학언어라는구획을넘어서서한국현대시의전위를몸소실현하는함기석시인의일곱번째시집『음시』를문학동네시인선168번으로출간한다.이상시문학상,이형기문학상,애지문학상,박인환문학상등을수상하며익히공인된그의실험정신은이번『음시』에서더욱빛을발한다.함수그래프와수학기호가무차별적으로활용되고,화자가시공간을자유롭게넘나드는이시집은낯설지만직설적인상상력의총체그자체다.『음시』는익숙한사고의틀을의문에붙이고그로부터더나아가자유롭게깊어지는언어로,즉언어의가능성이곧삶의가능성이되는무아지경으로독자를이끈다.

누가우릴납치해이시의구와절,반복되는숨
운율과여백에가두어놓았을까
세계는심장없는시,허나쿵쿵심장소리천지사방울리니
어떻게이시속에서탈옥할것인가
_「전투적기계식물무궁화」에서

「흑백벽돌수용소-어둠속225人의유대인포로와가시철조망」은혀에대한진술들이모여‘말’이라는글자의형상을이룬다.시를통해,의미를내포한다는언어의규약이자한계를포괄하여외연마저도시가될수있다는것이밝혀진다.함기석은‘말’이라는‘전체’가가두고있는각각의포로-혀들을시각적으로드러내어이들에게가해지는폭력을고발한다.그가보기에“시에서유일한리얼리티는말그자체다.그러나말은안개고양파고그림자다.일종의유령이자환영이다.말은사방으로분산되면서동시에사방에서실종되고증발한다.시에서유일한리얼리티는말그자체에내재된무(無)와침묵이다.”(함기석시론집『고독한대화』에서)
함기석의이미지적인시들은의미를보다명징하게돌출시키는한편으로의미를후면깊숙이배치하여독자의상상력을건드리기도한다.「연인」연작은함수그래프만홀로존재하나,부제와각주들로시의뒷면을짐작하게한다.“1차원여야의2차원나체침실,한여름밤의자장가또는체위연습”이라는부제하에서서로교차하는그래프들은정치현실에대한비판적인태도를함축하고,“분터골매장지유골분석함수,라인이된혼령들의라임”속검은구역은그곳에묻힌희생자들의영혼을암시한다.

가슴에노란리본을단사람들이울고있었다
촛불이타는반도였다반도는
자책한과부가부과한거대한악의책자였고
또다른전쟁으로4부5부6부이후의
모든서사는불타있었다
_「자책한과부가부과한책자-전대미문의문미대전」에서

함기석에게시는실로전투다.시집에서는내내처절하고철저한전투가벌어진다.「자책한과부가부과한책자-전대미문의문미대전」은‘회문’을이용해언어유희를펼쳐나가지만,유희가겨냥하는것은데칼코마니처럼똑같은모양으로영원히반복되는현실의구조다.그러니전투의영토는시에만국한되지않는다.함기석에게시는현실과동떨어진언어놀이가아니라해방적인실천이기때문이다.화자는“이상한거리에촛불들이행진하자/이상한당국이이상한비를뿌”(「가출소동」)리는것을지켜보며,한용운의「님의침묵」을변용하여“개성공단폐쇄및UN결의뉴스를지켜보던어느풍산개의한숨”(「남의침묵」)을내뱉는다.“대통령국회국정연설문”속의‘존경하는국민여러분’을“졸려하는국물여러분!”(「쌍둥이유령로골로지와야골로지의대통령국회국정연설문교차낭독」)으로바꿔야유를가할때,울수도웃을수도없는이들의마음에는해방구가깃들것이다.

함기석은음시를가리켜“이땅의모든죽은말을눈의벌판으로내쫓는/천년의난(亂)”(「밀지」)이자“삼독(三毒)의반도가거꾸로투영된/흑경(黑鏡)”(「해조음」)이며“우리의주검에핀살의현상”(「음시」)이라고썼다.죽은말을내쫓는살아있는말이자,있는것을반사할따름인수동적인기능을거부하는거울이며죽음의현장에서피어난미래의증거.음시는에포케를외치는중단된언어이자지연된언어이며기능하지않음으로써만기능하는역설적언어이지만,살아있는말이고죽어있기를거부하는말이며미래를가리키는말이다.음시의존재론은음의언어를통해서만설명할수있는음의세계가도래할것임을의미한다.
_박혜진해설,「음시,비존재의집」에서

음시란무엇인가.의미를밝혀줄어떤군더더기도없이열려있는의미들가운데서“우리는우리의주검에핀살의현상이고음시다”(「음시」)라는선언이두드러질때,‘우리’는어떤사람들인지묻는것으로가닥을잡을수있다.다시함기석에게우리는,“광음을간직한악보고바람이다”.즉우리가서있는“계급적착취와억압의성”이자“빛들이참수되고있”(「낱말전쟁」)는세계에서장렬히투쟁하는이들이우리이고,음시다.언어를무기로삶의경계를적극적으로넓혀가는이들의시(詩)이자시간이바로음시인것이다.

바닥은늘더낮은추락을위한유혹의쉼터였으니
더이상희망에속고싶지않은것이다

(……)

마지막한줌가슴뼈마저하늘에묻는날
우리새끼들사는이가난한골목가득
싸락눈대신훨훨날갯짓하는함박눈새떼나왔으면
_「싸락눈오던날」에서

『음시』에는생활인으로서의내밀한면모도담겨있다.투사와도같은겉모습의안쪽에자리한여리고약한모습이다.“폭염의거리”가내다보이는“얼음방”에서얼어버린가족들을간절히“1mm”(「1mm꿈」)씩녹이는화자는“밤마다사라져도다시내살곁에돌아와잠드는집”이자“나보다먼저잠을깨어내눈꺼풀을여는집”을“비유적가격20,000원”(「분양의계절」)에분양받는다.병실에서“어머니의삭은등”을바라보던화자가“유릿조각깔린잠속의걸음걸음이밤물결보다아파서/나는또내병조차미안”(「눈의병실에서」)해하는동안,화자의내면에서도함께벌어지는치열하고인간적인전투를느낄수있다.

하늘에서어린돌고래들이천천히지붕으로내려왔다폭설이폭설을폭설로지워나가는이생의기이한겨울밤,수억년전에사라진별빛들이죽지않은당신의눈처럼아름답게반짝이고있었다
_「수학자누(Nu)18」에서

부대신공간들-공간U,공간W,공간R,공간H,공간T-이덧붙여진『음시』의마지막공간엔「수학자누(Nu)」연작이수놓인다.고유명사‘누’에조사‘가’가붙는‘누가’가대명사‘누구’와의도적으로혼동될때,함기석은다중의임의성과개인의고유성간의관계를심문한다.‘누구’든‘누’가될수있는세계에서자명한진실들은그안의모순을폭로하고,이제‘누구’들은수학자의눈으로세계를새롭게발견하게될것이다.“(이항아리는엄마의유골함이다)”가매연에서무한히반복되며나아간결론에서화자는“나는마이너스우주,마이너스눈동자”(「수학자누(Nu)0」)라는깨달음에이른다.양의무한만을지향해왔던세계가아닌,음의무한에서함기석의세계는초현실주의회화풍으로세계를낯설게덧칠하여유격을밝혀낸다.이처럼시공간의제약을넘어서고,문학언어와일상언어의가름을넘어서서함기석이도달한전회의순간은낯선만큼지극히지금여기에요청되는가능성의지평을독자에게열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