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보천교는 전라도에서 동학운동을 주도하던 차경석이 1907년에 강증산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24방주 또는 60방주라는 민중 조직을 통하여 새로운 정부나 국가를 수립하려는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보천교의 활동을 “국체를 부정하는 불온한 사상”으로,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규정하였다. 보천교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던 1918년 가을에 제주도 중문에서 보천교와 강증산 계통의 종교인으로 보이는 김연일이 항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른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다. 1920년대 보천교는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형평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이나 의열단, 불변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주의 정의부와 신민부, 김좌진 등에게 보천교는 인적·물적인 지원을 하였다. 1936년에 차경석이 죽자 일제는 ‘유사종교 단체 해산령’을 내렸고, 각지의 보천교 진정원이나 교회는 폐쇄되었다.
일제강점기 보천교와 보천교계 신종교들의 민족운동에서 구속, 기소된 자는 약 424명이다. 이 가운데 154명이 독립유공자이다(2021년 4월 26일 기준). 이는 종교사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사에 있어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보천교 연구는 주로 종교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역사학 범주로서 보천교를 연구한 사례는 근래의 일이다. 보천교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느 연구가 다 그러하듯이 문헌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곤 하였다. 당시 기록의 편견이나 주관성 때문이다. 따라서 관련 연구자들은 사료의 치밀한 비판과 함께 ‘구술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구술사는 국가폭력, 전쟁, 대규모 사건과 사고 등을 파헤칠 때 매우 유효하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픈 기억으로부터 피해자들을 위무하는 것에서부터 정당하고 올바른 역사 쓰기까지 구술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보천교는 동학농민군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조직이다.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반외세 성향도 뚜렷하다. 그리고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의 이상향인 ‘후천 개벽론’의 제시도 다르지 않다. 이제 그러한 기록이 갖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구술사가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작업이, 그리고 구술사가 역사에서 보천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일제강점기 보천교와 보천교계 신종교들의 민족운동에서 구속, 기소된 자는 약 424명이다. 이 가운데 154명이 독립유공자이다(2021년 4월 26일 기준). 이는 종교사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사에 있어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보천교 연구는 주로 종교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역사학 범주로서 보천교를 연구한 사례는 근래의 일이다. 보천교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느 연구가 다 그러하듯이 문헌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곤 하였다. 당시 기록의 편견이나 주관성 때문이다. 따라서 관련 연구자들은 사료의 치밀한 비판과 함께 ‘구술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구술사는 국가폭력, 전쟁, 대규모 사건과 사고 등을 파헤칠 때 매우 유효하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픈 기억으로부터 피해자들을 위무하는 것에서부터 정당하고 올바른 역사 쓰기까지 구술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보천교는 동학농민군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조직이다.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반외세 성향도 뚜렷하다. 그리고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의 이상향인 ‘후천 개벽론’의 제시도 다르지 않다. 이제 그러한 기록이 갖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구술사가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작업이, 그리고 구술사가 역사에서 보천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원군교를 감시한 어느 한국인 순사의 증언 (보천교 독립운동 구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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