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지 못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최명식 회고록

끝내지 못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최명식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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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상하이 임시정부원 최명식의 끝내지 못한 독립운동 이야기
최명식 선생의 회고록은 본래 1970년 11월 긍허전기편찬위원회에서 『안악사건과 3·1운동과 나』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바 있었다. 1961년 9월 긍허 선생이 작고하기 전 김선량·김일병·허우성·최진무 등이 긍허 선생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구술 녹취하였다. 그런데 긍허 선생이 구술을 다 마치기 전에 생사를 달리하면서 중도에 그쳤다. 그 뒤 이를 정리하여 9년 만에 책으로 편찬되었다.
본 회고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전 안악사건,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과정,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교통부 활동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자료임에도 독립운동 연구자들도 잘 알지 못하기도 한다. 편자 역시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과정을 연구하던 차에 긍허 선생의 회고록을 알게 되었다.
그의 회고록에 역사적 사실이 매우 자세하게 담겨 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안타까운 마음에 역사로 출판사와 협의하여 이를 출판하기로 하였다. 이에 회고록을 한글로 활자화하고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수 있도록 어려운 한문 투의 용어를 현대문으로 고치거나 각주를 달았으며 등장인물을 간략히 정리하여 부록에 수록하여 참고토록 하였다. 특히 긍허 선생은 김구 선생과 같이 활동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14)의 내용도 일부 수록하였다.
저자

최명식

일제강점기상해임시정부에참여하여조직확대,군자금모집,선전공작등의활동을전개한독립운동가다.

목차

제1장
민족반일·개화운동의지역적첫봉화....................................................19

제2장
해외에서의웅비의꿈을안고(1)서간도의시찰여행(1909.10~1910.6)........43

제3장
‘안악사건’과나105인사건의불씨가된일명‘안명근사건’.....................67

제4장
해외에서의웅비의꿈을안고(2)
-만주경유,연해주지역의시찰여행(1918.5.~9)...................................107

제5장
삼일운동과내가이바지한것들-대한민국임시정부와나.......................115

제6장
당시상해임시정부종횡으로논평[縱橫談].............................................179

인물찾기..........................................................................................191

출판사 서평

독립운동의조연,최명식이
관찰자적시점에서바라본김구와안창호
긍허(兢虛)최명식은1880년1월15일(음)황해도안악군용순면장산리(長山
里)에서해주최씨최영락의차남으로태어났다.그는9세(1888)부터25세(1904)까지한학을배웠고1904년에예수교장로교회에입교해세례를받았다.1905년11월을사늑약이체결되자계몽운동을통한구국운동에동참하였다.특히그는1907년9월안창호·양기탁·전덕기·김구등이조직한신민회에가입해황해도안악지회의회원으로활동했다.당시안악은황해도지역의신문화운동을선도하던곳이었다.
최명식은고향사람인최광옥·김응제와더불어면학회(勉學會)를조직하고출판업,면학서포[서점],궐련공장,방직공장등을운영하며이를통해생긴이윤으로양산중학교를설립,운영하였다.여름이면양상중학교내에하기사범강습소를개설하여전국의교사들을모아놓고재교육을실시하였다.이외에도운동회를개최하는가하면김구등과뜻을함께하여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조직하여황해도일대의교육구국운동에진력하였다.무엇보다그는1909년에신민회의국외독립운동기지건설에누구보다앞장서처음으로서간도를사전답사하였다.
1910년서간도에서돌아온뒤새로운독립운동의방략으로김용진·김홍량·정달하등과함께중국과의무역업을추진하고자하였으나,안중근의이토처단이후김구등과함께일제가조작한‘안명근사건’으로체포되는바람에물거품이되고말았다.그뿐만아니라기존에운영하였던사업마저도문을닫게되면서계몽운동사업도큰지장을받았다.그는일제의경무청총감부에서3개월동안갖은고초를받은뒤경성재판소에서‘강도죄’로7년징역형을선고받아서대문형무소에서옥살이를시작하였다.그뒤감형되어4년6개월만에출소하여고향으로내려가김구와함께신천군산천면동산평농장에서추수감을맡았다.
그러던중1919년3·1운동이발발하자김구의뒤를이어상하이로망명하여대한민국임시정부에가담했다.이때이름을최일(崔日)로바꿨다.이후국내에연통제조직을만들고자애썼고,국내와상하이를오가며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조직하여군자금모집,임시정부기관지〈독립신문〉등의문서배포,독립사상고취등의활동을펼쳤다.1922년에안창호·김구등과함께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조직했으며임시정부가창조파와개조파둘로갈리고재정부족으로어려움을겪자새로운독립운동을꿈꾸며북간도로향했다.
1923년길림으로이주해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조직,재무를담당하였고,1927년에는안창호를맞아자신이경영하는정미공장대동공사(大東公司)에서연설회를개최하여일본경찰에붙잡혀몇달동안고초를겪었다.1931년9월만주사변이후일본경찰에의해강제귀국후거주제한조처를당하였다.
1943년다시만주로건너갔고1945년8월해방을맞자임시정부동북대표부(東北代表部)주석에임명되어교포들의권익옹호활동에매진하였다.1946년에는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東北韓國僑民會聯合會)를조직,부회장으로활동하였으며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동북특별당부의특별위원으로도활약하였다.
1948년중국내국공내전당시만주가중국공산당의수중에들어가자교포수천명을인솔하여톈진을거쳐남한으로귀국했다.1949년한국독립당중앙당부당원을활동하면서도김구·김규식등이추진하는남북협상에대해“김일성에게이용당할것이다”라며적극적으로반대하였다.1950년에는신익희가주도하던민주국민당에입당해중앙위원에피선되었으며,1955년9월자유당에맞서신익희등이창당한민주당의진해시당부고문으로서이승만정권의독재에맞서싸웠다.1961년9월26일진해에서병사했다.
1977년건국포장을추서(1990년건국훈장애국장)되었고,1992년그의유해는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묘역에안장됐다(독립유공자1묘역-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