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사는 사람 - 삶창시선 73

시간을 사는 사람 - 삶창시선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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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중심이 아니다

송태규 시인의 시집 『시간을 사는 사람』은 일상 속에 은폐된 채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담담히 찾아가는 모습을 시종 보여준다. 감상을 배제한 채 시인 자신마저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담백함이 있어서 사태를 과장하거나 또는 숨기지 않는 장점이 있다. 「불알」이란 시를 보면, “북녘에선 불알이라 한다”는 ‘전구’를 통해 시인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반추하고 「보따리」에서는 “시골장 새벽으로 가는 버스” 안의 유일한 손님인 할머니의 보따리를 통해 삶의 “저무는 땅거미”를 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근원으로의 회귀가 허무를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때론 휘청, 흔들리며
저물어가는 몸으로 봄날이 지나간다

안간힘으로 계절을 건너온 몸
다저녁 바람에 풀꽃으로 피어
이제 다음 생을 귀 열고 들으시려는가
_「아버지의 등」 부분

위 시에서 보듯 송태규 시인의 ‘돌아봄’은 “다음 생”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문이다. 아직은 그 입구를 찾았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나온 삶에 대한 ‘돌아봄’이 없는 “다음 생”은 자칫 자기기만이기 쉽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지 않은 미덕이다. 「아버지의 등」이 “아버지의 등은 그저 누워만 계시는 것이다”로 끝나는 것은, “다음 생”을 맞이하기 위한 ‘일단 멈춤’에 해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퇴직」이란 시를 읽어보면 시집 전체에 흐르는 이 ‘돌아봄’과 ‘일단 멈춤’에 희미하나마 새로운 생기가 움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일 전화기가 울지 않는다는 건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을 아는 데
두어 달이면 족했다
_「퇴직」 부분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도리어 “내가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이 “다음 생”은 그 입을 천천히 벌려 줄 것이다. ‘일단 멈춤’은 절벽에 다름 아니지만 거기에서 하는 “날갯짓”을 통해 “세상으로 날아가면/ 그걸/ 삶이라고” 한다.(「절벽」)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런데 이 ‘일단 멈춤’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절벽에서 하는 “날갯짓”은 시적인 대오(大悟)라고 하기에는 낭만적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낭만’에 그쳐야 한다는 관념들은 따지고 보면 서구의 미학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시는 삶으로 더 나아가기를 촉구하는데, 「절벽」에서 그것을 일러주기만 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돌연 끝난다. 「절벽」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옳다. 그 이상을 다시 쓰는 것이 또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흔들림으로 대꾸하는
간당간당한 절벽에서

허공에 뿌리박은 채
목줄 젖힌 새끼가 어미를 받아먹고
솟구치던 그곳,

엉켜 한 식솔을 거두고
우듬지 집 한 채
별로 돋는다
_「까치집」 부분

「절벽」의 “독수리”가 「까치집」에서는 “까치”로 바뀌었지만 “절벽에서” “솟구치던” 행동 혹은 결단은 같은 의미다. 시인은 “절벽” 다음의 삶은 “별”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별”은 하늘에 또는 어두운 허공에서 빛나는 별일까? 송태규 시인은,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지상을 초월해서 꾸려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고작(?) “우듬지 집 한 채”로 빛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본래 한계에 대한 인식에는 ‘돌아봄’과 ‘일단 멈춤’도 포함되지만 “다음 생”에 대한 직관도 큰 역할을 한다. 도리어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 우리 삶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폭주밖에 없을 것이다. 송태규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눈뜨면 매 순간 자라는
심지어 꿈에서도 좇는
씨앗 같은 욕심

그 무게는 몇 근이고
얼마나 더 덜어내야
저울추 가벼워질까

단호하지 못하여
나를 배반하고
씨앗을 싹틔우는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_「욕심의 무게」 부분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놓지 않는 한 시는 영원할 것이다. 시는 결국 “오후 햇살처럼 일어나/ 허물어진 나를 다시 짓는 이른 봄날”(「봄의 시간」) 같은 삶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

송태규

전북익산에서태어났다.2019년『에세이문예』,2020년『시인정신』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말랑한벽』,수필집으로『마음의다리를놓다』,『다섯빛깔로빚은수채화』(공저)가있다.

목차


시인의말4

1부
보따리·12
말[言]·14
실눈뜨는길에서·16
아버지의등·18
절벽·20
지는것에대하여·21
비오는날에는대숲을·22
목이진·24
담쟁이의가르침·25
아비의하늘·26
씨앗·28
불알·30
붉음,그지지않는·32

2부
욕심의무게·36
소실점너머·38
촛불·40
바람의변주곡·42
꽃본죄·44
아무도모르게·45
영업비밀·46
까치집·48
봄의시간·50
동태탕을먹다가·52
꽃이꽃에게·54
낮술을하다·56

3부
퇴직·60
시간을사는사람·62
살아야겠다고·64
하노이·66
너스레·67
태초·68
시인의자격·70
일침·72
창조의역군·74
생각의차이·76
소신공양·78
너를생각한다·79
백지편지·80
내가내편·81

4부
가장·84
그나마·85
고초·86
짜장면의뿌리·88
남편·90
매생이국앞에서·92
잎사귀·94
어쩌면·95
낭만하우스·96
동면·97
덤·98
어떤스승들·100
처음·103
그런날있었지·104
문제人·105
꽃이피네·106

해설
존재의비밀을드러내는소실점의윤리(문신)·109

출판사 서평

‘나’는중심이아니다

송태규시인의시집『시간을사는사람』은일상속에은폐된채숨어있는삶의진실을담담히찾아가는모습을시종보여준다.감상을배제한채시인자신마저그대상으로삼는다.그런데여기에는담백함이있어서사태를과장하거나또는숨기지않는장점이있다.「불알」이란시를보면,“북녘에선불알이라한다”는‘전구’를통해시인자신의생명의근원을반추하고「보따리」에서는“시골장새벽으로가는버스”안의유일한손님인할머니의보따리를통해삶의“저무는땅거미”를환기하기도한다.그렇다고해서이러한근원으로의회귀가허무를노래하는것은아니다.

어느날인가부터
때론휘청,흔들리며
저물어가는몸으로봄날이지나간다

안간힘으로계절을건너온몸
다저녁바람에풀꽃으로피어
이제다음생을귀열고들으시려는가
_「아버지의등」부분

위시에서보듯송태규시인의‘돌아봄’은“다음생”에대한조심스러운탐문이다.아직은그입구를찾았다고말할단계는아니지만지나온삶에대한‘돌아봄’이없는“다음생”은자칫자기기만이기쉽다는점에서이것은작지않은미덕이다.「아버지의등」이“아버지의등은그저누워만계시는것이다”로끝나는것은,“다음생”을맞이하기위한‘일단멈춤’에해당된다,이런관점에서「퇴직」이란시를읽어보면시집전체에흐르는이‘돌아봄’과‘일단멈춤’에희미하나마새로운생기가움트고있음을느낄수있다.

종일전화기가울지않는다는건
내가중심이아니었다는것

그것을아는데
두어달이면족했다
_「퇴직」부분

“내가중심이아니었다는것”을알게된것,도리어“내가가장자리에있다는것”을깨달았을때만이“다음생”은그입을천천히벌려줄것이다.‘일단멈춤’은절벽에다름아니지만거기에서하는“날갯짓”을통해“세상으로날아가면/그걸/삶이라고”한다.(「절벽」)

나는누구여야하는가

그런데이‘일단멈춤’에서시인이발견한것은무엇일까?아무래도절벽에서하는“날갯짓”은시적인대오(大悟)라고하기에는낭만적이다.시는어디까지나‘낭만’에그쳐야한다는관념들은따지고보면서구의미학주의에지나지않는다.동아시아에서시는삶으로더나아가기를촉구하는데,「절벽」에서그것을일러주기만할뿐,그이상에대해서는말하지않고돌연끝난다.「절벽」이그이상을말하지않는것은옳다.그이상을다시쓰는것이또시의일이기때문이다.

바람이문두드리면
흔들림으로대꾸하는
간당간당한절벽에서

허공에뿌리박은채
목줄젖힌새끼가어미를받아먹고
솟구치던그곳,

엉켜한식솔을거두고
우듬지집한채
별로돋는다
_「까치집」부분

「절벽」의“독수리”가「까치집」에서는“까치”로바뀌었지만“절벽에서”“솟구치던”행동혹은결단은같은의미다.시인은“절벽”다음의삶은“별”이현현하는순간이다.그런데그“별”은하늘에또는어두운허공에서빛나는별일까?송태규시인은,삶이라는것은그렇게지상을초월해서꾸려지는게아니라고말하고있는것같다.우리는고작(?)“우듬지집한채”로빛나는존재일지도모른다고하면서말이다.본래한계에대한인식에는‘돌아봄’과‘일단멈춤’도포함되지만“다음생”에대한직관도큰역할을한다.도리어한계를인식하지못하고살때우리삶이할수있는것은오로지폭주밖에없을것이다.송태규시인은그것을잘알고있는시인이다.

눈뜨면매순간자라는
심지어꿈에서도좇는
씨앗같은욕심

그무게는몇근이고
얼마나더덜어내야
저울추가벼워질까

단호하지못하여
나를배반하고
씨앗을싹틔우는
나는누구여야하는가
_「욕심의무게」부분

“나는누구여야하는가”.이런물음을놓지않는한시는영원할것이다.시는결국“오후햇살처럼일어나/허물어진나를다시짓는이른봄날”(「봄의시간」)같은삶에서만가능하기때문이다.

시인의말

시섬에갇혀지독히앓았다.
앓고나니모든것이새롭다.
새로워서낯설다.

어느새회갑을넘겼다.
육십넘어세상을바꾸기야하겠냐만
남은날들시에묻혀살수있다면
물정어둑하다는흉잡힐말일까.

나는이제내시간을팔아
당신의시간을사려한다.

2023년여름초입
용화산기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