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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나’는 중심이 아니다
송태규 시인의 시집 『시간을 사는 사람』은 일상 속에 은폐된 채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담담히 찾아가는 모습을 시종 보여준다. 감상을 배제한 채 시인 자신마저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담백함이 있어서 사태를 과장하거나 또는 숨기지 않는 장점이 있다. 「불알」이란 시를 보면, “북녘에선 불알이라 한다”는 ‘전구’를 통해 시인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반추하고 「보따리」에서는 “시골장 새벽으로 가는 버스” 안의 유일한 손님인 할머니의 보따리를 통해 삶의 “저무는 땅거미”를 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근원으로의 회귀가 허무를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때론 휘청, 흔들리며
저물어가는 몸으로 봄날이 지나간다
안간힘으로 계절을 건너온 몸
다저녁 바람에 풀꽃으로 피어
이제 다음 생을 귀 열고 들으시려는가
_「아버지의 등」 부분
위 시에서 보듯 송태규 시인의 ‘돌아봄’은 “다음 생”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문이다. 아직은 그 입구를 찾았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나온 삶에 대한 ‘돌아봄’이 없는 “다음 생”은 자칫 자기기만이기 쉽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지 않은 미덕이다. 「아버지의 등」이 “아버지의 등은 그저 누워만 계시는 것이다”로 끝나는 것은, “다음 생”을 맞이하기 위한 ‘일단 멈춤’에 해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퇴직」이란 시를 읽어보면 시집 전체에 흐르는 이 ‘돌아봄’과 ‘일단 멈춤’에 희미하나마 새로운 생기가 움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일 전화기가 울지 않는다는 건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을 아는 데
두어 달이면 족했다
_「퇴직」 부분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도리어 “내가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이 “다음 생”은 그 입을 천천히 벌려 줄 것이다. ‘일단 멈춤’은 절벽에 다름 아니지만 거기에서 하는 “날갯짓”을 통해 “세상으로 날아가면/ 그걸/ 삶이라고” 한다.(「절벽」)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런데 이 ‘일단 멈춤’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절벽에서 하는 “날갯짓”은 시적인 대오(大悟)라고 하기에는 낭만적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낭만’에 그쳐야 한다는 관념들은 따지고 보면 서구의 미학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시는 삶으로 더 나아가기를 촉구하는데, 「절벽」에서 그것을 일러주기만 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돌연 끝난다. 「절벽」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옳다. 그 이상을 다시 쓰는 것이 또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흔들림으로 대꾸하는
간당간당한 절벽에서
허공에 뿌리박은 채
목줄 젖힌 새끼가 어미를 받아먹고
솟구치던 그곳,
엉켜 한 식솔을 거두고
우듬지 집 한 채
별로 돋는다
_「까치집」 부분
「절벽」의 “독수리”가 「까치집」에서는 “까치”로 바뀌었지만 “절벽에서” “솟구치던” 행동 혹은 결단은 같은 의미다. 시인은 “절벽” 다음의 삶은 “별”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별”은 하늘에 또는 어두운 허공에서 빛나는 별일까? 송태규 시인은,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지상을 초월해서 꾸려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고작(?) “우듬지 집 한 채”로 빛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본래 한계에 대한 인식에는 ‘돌아봄’과 ‘일단 멈춤’도 포함되지만 “다음 생”에 대한 직관도 큰 역할을 한다. 도리어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 우리 삶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폭주밖에 없을 것이다. 송태규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눈뜨면 매 순간 자라는
심지어 꿈에서도 좇는
씨앗 같은 욕심
그 무게는 몇 근이고
얼마나 더 덜어내야
저울추 가벼워질까
단호하지 못하여
나를 배반하고
씨앗을 싹틔우는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_「욕심의 무게」 부분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놓지 않는 한 시는 영원할 것이다. 시는 결국 “오후 햇살처럼 일어나/ 허물어진 나를 다시 짓는 이른 봄날”(「봄의 시간」) 같은 삶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송태규 시인의 시집 『시간을 사는 사람』은 일상 속에 은폐된 채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담담히 찾아가는 모습을 시종 보여준다. 감상을 배제한 채 시인 자신마저 그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담백함이 있어서 사태를 과장하거나 또는 숨기지 않는 장점이 있다. 「불알」이란 시를 보면, “북녘에선 불알이라 한다”는 ‘전구’를 통해 시인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반추하고 「보따리」에서는 “시골장 새벽으로 가는 버스” 안의 유일한 손님인 할머니의 보따리를 통해 삶의 “저무는 땅거미”를 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근원으로의 회귀가 허무를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때론 휘청, 흔들리며
저물어가는 몸으로 봄날이 지나간다
안간힘으로 계절을 건너온 몸
다저녁 바람에 풀꽃으로 피어
이제 다음 생을 귀 열고 들으시려는가
_「아버지의 등」 부분
위 시에서 보듯 송태규 시인의 ‘돌아봄’은 “다음 생”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문이다. 아직은 그 입구를 찾았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나온 삶에 대한 ‘돌아봄’이 없는 “다음 생”은 자칫 자기기만이기 쉽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지 않은 미덕이다. 「아버지의 등」이 “아버지의 등은 그저 누워만 계시는 것이다”로 끝나는 것은, “다음 생”을 맞이하기 위한 ‘일단 멈춤’에 해당된다, 이런 관점에서 「퇴직」이란 시를 읽어보면 시집 전체에 흐르는 이 ‘돌아봄’과 ‘일단 멈춤’에 희미하나마 새로운 생기가 움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일 전화기가 울지 않는다는 건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을 아는 데
두어 달이면 족했다
_「퇴직」 부분
“내가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도리어 “내가 가장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만이 “다음 생”은 그 입을 천천히 벌려 줄 것이다. ‘일단 멈춤’은 절벽에 다름 아니지만 거기에서 하는 “날갯짓”을 통해 “세상으로 날아가면/ 그걸/ 삶이라고” 한다.(「절벽」)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런데 이 ‘일단 멈춤’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절벽에서 하는 “날갯짓”은 시적인 대오(大悟)라고 하기에는 낭만적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낭만’에 그쳐야 한다는 관념들은 따지고 보면 서구의 미학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시는 삶으로 더 나아가기를 촉구하는데, 「절벽」에서 그것을 일러주기만 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돌연 끝난다. 「절벽」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옳다. 그 이상을 다시 쓰는 것이 또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문 두드리면
흔들림으로 대꾸하는
간당간당한 절벽에서
허공에 뿌리박은 채
목줄 젖힌 새끼가 어미를 받아먹고
솟구치던 그곳,
엉켜 한 식솔을 거두고
우듬지 집 한 채
별로 돋는다
_「까치집」 부분
「절벽」의 “독수리”가 「까치집」에서는 “까치”로 바뀌었지만 “절벽에서” “솟구치던” 행동 혹은 결단은 같은 의미다. 시인은 “절벽” 다음의 삶은 “별”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별”은 하늘에 또는 어두운 허공에서 빛나는 별일까? 송태규 시인은,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지상을 초월해서 꾸려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고작(?) “우듬지 집 한 채”로 빛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본래 한계에 대한 인식에는 ‘돌아봄’과 ‘일단 멈춤’도 포함되지만 “다음 생”에 대한 직관도 큰 역할을 한다. 도리어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 우리 삶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폭주밖에 없을 것이다. 송태규 시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눈뜨면 매 순간 자라는
심지어 꿈에서도 좇는
씨앗 같은 욕심
그 무게는 몇 근이고
얼마나 더 덜어내야
저울추 가벼워질까
단호하지 못하여
나를 배반하고
씨앗을 싹틔우는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_「욕심의 무게」 부분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놓지 않는 한 시는 영원할 것이다. 시는 결국 “오후 햇살처럼 일어나/ 허물어진 나를 다시 짓는 이른 봄날”(「봄의 시간」) 같은 삶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사는 사람 - 삶창시선 73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