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집

정지용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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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 우리가 잘 아는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시집 - 106편 수록
정지용 시인은 1923년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졸업생 장학금을 받아 일본 교토의 동지사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시 〈향수〉를 썼다. 1923년 5월부터 1929년 6월까지 교토에서 유학하게 되는데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월 교토 유학생들의 학회지인 《학조》 창간호에 시조 9수, 동요 형식의 시 6편, 현대적 감각의 시 3편 등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하게 되었다. 지용은 이 시기에 다양한 문학 체험을 얻고 작품 발표의 기회도 얻어 시인으로서 이름을 세상에 알린 반면, 개인적으로는 혈육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겪었다. 이때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는데, 그의 딸아이를 잃은 데다가 아들 구관이 태어나자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입교했던 것 같다.
동지사대학을 졸업하고 1929년 9월 1일자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정규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실력 있는 영어교사였고 학생들의 선배였으며 무엇보다도 시인이라는 점이 학생들에게 어필했을 것이다.
저자

정지용

저자:정지용
鄭芝溶(1902~1950)|
시인.
1902년5월15일충청북도옥천군출생.
1910년옥천공립보통학교입학.
1918년휘문고등보통학교입학.이때부터《요람》지발행에참여하며박팔양,홍사용,김영랑,이선근,이태준등과교류함.
1929년도시샤대학〔同志社大?〕영문학과졸업.
1935년첫시집《정지용시집》(시문학사)간행.
1941년두번째시집《백록담》(문장사)간행.
1945년이화여자전문학교교수로부임,문과과장.
1946년박두진편집《지용시선》(을유문화사)간행.경향신문주간으로취임.
1950년피난길에오르지못해6·25전쟁중서울에남게됨.이후행적에대해여러의견이엇갈리지만폭격에휘말려사망했다는설이유력함.확실한건그가6·25때행방불명되었다는사실임.

목차

정지용鄭芝溶론·9

바다1·21
바다2·24
비로봉·26
홍역·28
비극·29
시계를죽임·30
아침·32
바람·34
유리창1·35
유리창2·36
난초·38
촉불과손·40
해협·42
다시해협·44
지도·46
귀로·47
오월소식·48
이른봄아침·50
압천·52
석류·54
발열·56
향수·57
갑판위·59
태극선·61
카페·프랑스·63
슬픈인상화·65
조약돌·67
피리·68
달리아·69
홍춘·71
저녁햇살·72
벚나무열매·73
엽서에쓴글·74
선취·75
봄·76
슬픈기차·77
황마차·81
새빨간기관차·84
밤·85
호수1·86
호수2·87
호면·88
겨울·89
달·90
절정·92
풍랑몽1·94
풍랑몽2·96
말1·97
말2·100
바다1·102
바다2·103
바다3·104
바다4·105
바다5·106
갈매기·108
해바라기씨·110
지는해·112
띠·113
산너머저쪽·114
홍시·115
무서운시계·116
삼월삼짇날·117
딸레·118
산소·119
종달새·120
병·121
할아버지·122
말·123
산에서온새·124
바람·125
별똥·126
기차·127
고향·128
산엣색시들녘사내·129
내맘에맞는이·131
무어래요·133
숨기내기·134
비둘기·135
불사조·136
나무·138
은혜·139
별·140
임종·141
갈릴레아바다·143
그의반·145
다른하늘·146
또하나다른태양·147
파충류동물·148
‘마음의일기’에서·150
옛이야기구절·153
우리나라여인들은·155
바다1·158
바다2·159
승리자김안드레아·160
천주당·166
도굴·167
창·168
이토·170
그대들돌아오시니·172
애국의노래·175
곡마단·177

사사조四四調오수五首
늙은범·181
네몸매·182
꽃분·183
산달·184
나비·185

작가연보·186
작품연보·193

출판사 서평

정지용론―청신한감각과순백의내면공간
(정지용의생애와작품세계)

정지용은1902년음력5월15일충청북도옥천군하계리에서장남으로태어났다.그의시〈향수〉에서나오는것처럼넓은벌에실개천이휘돌아나가고황소가게으른울음을우는전형적인농촌마을에서성장하였다.아홉살때인1910년4년제과정인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죽향초등학교)에입학하여1914년에졸업하였다.학교에재학중이던1913년에결혼을하였는데이때그의나이12세였고부인도그와동갑인12세였다.
보통학교를졸업한지용은그이듬해에서울로올라와처가의친척집에기숙하면서여러가지일을하다가1918년4월휘문고등보통학교에입학하였다.휘문에입학하자마자문재를발휘하여1학년때부터《요람》이라는등사판동인지를내는데참여하여작품을발표하였고선후배들이함께참여하는‘문우회’활동에동참하여문학에대한자극을얻었다.그는이러한문학적분위기를최대로흡수하면서시인으로서의자기성장을도모했다.
1923년에휘문고보를졸업하고졸업생장학금을받아일본경도의동지사대학으로입학하게되었다.이때그는우리가잘아는시〈향수〉를썼다.1923년5월부터1929년6월까지경도에서유학하게되는데영문학과에재학중이던1926년6월경도유학생들의학회지인《학조》창간호에시조9수,동요형식의시6편,현대적감각의시3편등많은작품을한꺼번에발표함으로써등단하게되었다.지용은이시기에다양한문학체험을얻고작품발표의기회도얻어시인으로서이름을세상에알린반면,개인적으로는혈육의죽음이라는불행을겪었다.이때가톨릭에입교하게되는데,그의딸아이를잃은데다가아들구관이태어나자마음의다짐을새롭게한다는의미에서입교했던것같다.
동지사대학을졸업하고1929년9월1일자모교인휘문고보의영어교사로부임하게되었는데,그의수업은학생들에게상당히인기가있었다고한다.정규대학영문학과를졸업한실력있는영어교사였고학생들의선배였으며무엇보다도시인이라는점이학생들에게어필했을것이다.
1930년이후정지용은국내문인들과교류하면서문단활동을본격적으로전개하였다.《시문학》동인들과도어울리고문학좌담회에도참석하면서그특유의재치있는언변을휘날렸다.160센티미터가안되는작은키에두터운안경을끼고약간앞니가버드러진입으로독설과야유를총알처럼날렸다.그의음성은가늘게떨리는듯한낭랑한음조로시낭송에적합하여그가시를읊으면좌중이모두매료되었다고한다.
1935년10월에는시문학사에서《정지용시집》이간행되었다.일찍이《시문학》에시를내준인연을소중히여긴박용철이정성을다하여호화로운한권의시집을엮어낸것이다.지용의시집이간행되자많은사람들의찬사가쏟아져나왔다.문단의시선은온통정지용에게집중되며정지용은명실공히30년대최고의시인으로부상하게된다.
1939년2월에는일제강점기에발간된잡지중가장격조높은문예지로평가되는《문장文章》이발간되는데,정지용은이잡지의시부문추천위원을맡게된다.그는될수있는한객관적인시각을유지하고공정하게신인을추천하였다.그의추천을받고나온박목월,조지훈,박두진,박남수등의시인들은해방후한국시단의중추적역할을했다.이것은시를보는지용의안목이정확했다는사실을반증한다.
일제말문학정신의마지막기둥노릇을했던《문장》은1941년4월총25호를종간호로내고폐간된다.그것은문학지를하나로통합하여일본어로만간행하겠다는총독부의압력에의한것이었다.폐간의아쉬움을시집간행으로메우려는듯그는1941년9월두번째시집《백록담》을간행하였다.시작품은25편밖에되지않아서시집한권의분량으로는조금부족했지만시간이더흐르면한글로작품을발표하는것이불가능하리라는예감때문에시집간행을서둘렀을것이다.
일제의강압에의해조선어사용이금지된이후그는단한편의글도일본어로쓰지않았고발표하지도않았다.글쓰는사람에게는절필이무엇보다도고통스러운일일터인데그는일제말암흑의3년을침묵으로견뎌냈다.1943년폭격에대비한서울소개령으로그는경기도부천군소사읍으로이주하게되었다.
해방이되자정지용은16년간근무하던휘문고보를떠나이화여자전문학교교수로부임하였는데여전히학생들에게인기가있었다고한다.좌파문학단체인조선문학가동맹에정지용의이름이아동문학분과위원장으로올라있었으나그는이단체가주관하는행사에참여하지않았다.그들단체의위상을높이기위해정지용의이름이필요했던것이다.
1946년10월정지용은가톨릭계열의신문사인경향신문의주간으로취임하게된다.천주교신자이고과거에《가톨릭청년》이나《경향잡지》의편집을맡은경력이있기때문에천거된것같다.주간으로있으면서그는사설난등에많은글을집필하였는데,그의사회현실에대한시각은좌파적이라기보다는평범한민족주의에바탕을둔것이었다.다만한민당에대해서는부정적시각을뚜렷이드러냈다.그가쓴논설문이극우계의가톨릭신자들에게반발을사게된것도한민당에대한부정적시각에기인한것이다.당시의경직된풍토는그의현실비판적태도를좌경적태도로오인케했고결국그는좌익이라는부당한투서를받게되었다.
이런문제때문에그는1947년8월경향신문사주간직을사임하고그이듬해에는집도돈암동에서녹번리의초당으로옮기게된다.겉으로는한가한전원생활을하는것같았지만그의내면은허탈감과번민에가득차있었다.윤동주의시집《하늘과바람과별과시》(1948.1)의서문에서그는‘재조도탕진하고용기도상실하고8·15이후에나는부당하게도늙어간다’고탄식하였다.일제강점기의친일도배일도하지않았던그는이시기에는우익도좌익도아닌중도파지식인으로서고뇌를거듭하고있었던것이다.
대한민국정부가수립되자좌익세력에대한전반적인조사가행해졌다.한때본의아니게조선문학가동맹에이름이등재된것,《경향신문》주간으로있을때한민당에대한비판적논설로좌경인물로몰린것,가까이지내던문인들이월북해버린것때문에그도몇차례의조사를받았고,좌익경력인사들의사상적선도를명분으로내세우고결성된‘국민보도연맹’에가입하지않을수없었다.이모두가민족의분단이라는모순된현실이빚어낸개인적진실의왜곡이며굴절인것이다.
6·25가발생하여서울이점령당했을때정지용은피난을가지못하고녹번리초당에머물고있었다.7월어느날안면있는젊은이몇명이찾아와대화를나누다가그들과함께나간후그는돌아오지못했다.그이후의행적에대해서는여러사람들의의견이어지럽게엇갈려있다.그러나그것들은실제로자신이목격한사실을말한것이아니라누군가에게들은내용을옮긴것들이어서신빙성이없다.
우리에게가장확실한것은그가6·25때행방불명되었다는사실이며더욱중요한것은행방불명의그순간까지우리시단에가장영향력있는시인으로남아있었다는사실이다.우리가이뛰어난시인을잃은것은말할것도없이민족분단의비극때문이다.따라서그의실종과희생은그시대를살았던우리민족모두의책임으로돌려야한다.우리는이엄연한사실앞에머리숙이고숙연해져야할것이다.민족비극의포연속에그의삶은실종되고말았지만그의시가주는감동은먼훗날까지유구하게전해질것이다.


초기시와시의식의형성
정지용의시작단계를시의식의형성과정과관련지어구분하면,1922년휘문고보재학시절부터일본유학시절까지를제1시기,1929년귀국이후1935년《정지용시집》을간행할때까지를제2시기,《정지용시집》간행이후를제3시기로나누어각각전기시,중기시,후기시로설정할수있다.
창작시점으로볼때가장최초의작품에해당하는〈풍랑몽〉은1922년3월에쓴것으로되어있다.이작품의실제적인발표는1927년7월《조선지광》을통해이루어졌다.같은지면에〈풍랑몽〉외에도〈발열〉과〈말〉이실려있다.
〈풍랑몽〉은졸업과새로운진급이교차하는3월의어느날마포하류의물가에서주체할길없는외로움을표현한작품이다.그로부터일년후에정지용은작품〈향수〉를썼다.이작품역시《조선지광》에발표되었다.이두편의작품에서우리는20대초반의젊은이의내면에자리잡고있는그리움과갈구의심정을충분히엿볼수있다.
일본유학을떠난후경도에서쓴첫작품은〈압천〉이다.이시는1927년6월《학조》에발표되었다.그후1930년3월,《시문학》창간호에〈경도압천〉이라는제목으로재발표되었으며,《정지용시집》에다시〈압천〉이라는제목으로수록되었다.이시의화자는압천십리벌에해가저무는장면을배경으로날마다님과이별하는여울물의모습을통하여자신의비애감과고독감을표현하고자했다.
이러한비애감을표현하면서오렌지라는익숙한영어대신에‘오랑쥬’라는불어를사용한데는경도유학생으로서의우월감과지용특유의이국정조가작용한것으로보인다.이러한이국정조도일본유학을하는식민지지식인으로서의고독감이나공백감에서나온것일공산이크다.요컨대이시에서조국을떠나만리타향낯선곳에서학업을꾸려가는스물두살젊은이의고독과우수,그내면에담겨있는지식인으로서의서구취향과이국정조를엿볼수있다.
다음단계의시는시인의자전적독백성을극복하고하나의작품으로서완성도를높이려는시도를보이고있다.말하자면시인으로서의자각을가지고창작에임하게된다.대상의감각적인식에의한시창작의첫단계를장식한작품은〈이른봄아침〉(《신민新民》,1927.2)이다.봄의연상작용을통하여봄의속성이더욱선명하게부각되고결과적으로이른봄이어떠한정취와의미를지닌것인지분명해진다.
1926년여름그는바다와관련된두편의시,〈갑판위〉(《문예시대1》,1927.1)와〈선취〉(《학조2》,1927.6)를썼다.이두편의작품은개인사를바탕으로하고있으면서도시적감각의객관적정조에의해긴장감이유지되어있다.〈선취〉가형식의정형성을고수하는듯한모습을보이는데비해〈갑판위〉는형식이나표현에있어자유로운면모를보이고있다.〈선취〉도그렇지만이당시바다를소재로한작품에는고독의감정이거의드러나지않는다.바다의탁트인공간성이시인의마음을드넓게넓혀줌으로써경도압천의웅크리고있던시인의자아가활력을얻은것인지도모른다.
〈발열發熱〉(《조선지광》,1927.7)과〈태극선太極扇에날리는꿈〉(《조선지광》,1927.8)은지용의개인사가시작의모티프로작용하고있다.〈발열〉은아이가병들어열이오르고‘애자지게보채는’모습을지켜보는아버지의안타까움을나타낸시다.개인사를드러내면서도정제된시형식으로압축적으로표현하여,〈유리창〉에버금가는절제의미학을보여준것이라고평가할수있다.


중기시와주제의식의심화
1929년6월동지사대학영문학과를졸업한지용은그해9월부터모교인휘문고보의영어교사로부임하게된다.옥천의가족도서울로이주하여본격적인서울생활을시작하면서문인들과도활발한접촉을갖는다.졸업과취업,가족을솔거한서울로의이사등분주한생활이어느정도정돈되고일년여의침묵끝에그가발표한작품이〈유리창〉이다.이시는시인이자식을폐렴으로잃은후그안타까운심정을노래한것으로알려져있다.〈유리창1〉과〈유리창2〉두편의작품은유리창을경계로외부와내면이단절된상태에서시적자아의외로움과괴로움을나타낸다는공통점이있다.
개인의비극에서비롯된이러한자아의괴로움은그로부터몇년후《가톨릭청년》(1935.3)에발표된〈홍역〉과〈비극〉에다시시의소재로등장한다.이렇게자신의개인적비극이투영된시작품을일부발표하면서지용은자신의장기인대상을감각적으로표현하는새로운스타일의시를계속발표하여한국시단에서독자적시인으로서의입지를굳혀갔다.《시문학》2호(1930.5)에발표한〈바다1〉은지용의청신한감각을잘보여준다.
이시외에도〈아침〉(《조선지광》,1930.8)〈절정〉(《학생》,1930.10.)등에는감각적특성이잘발휘되어있다.전기시와후기시의경계노릇을하면서지용의예민한감각의촉수를보여주는또하나의작품이〈난초〉(《신생》,1931.12)다.
변화의징후는〈비로봉〉(《가톨릭청년》,1933.6)에서더분명하게확인할수있다.〈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