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황용건 지은이는 195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였다. 현재 문경시 점촌1동 주민센터에 근무하고 있으며 지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1999년 “오천리권농회 80년사”를 발굴 정리하고, 2002년 “항일독립투사 박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를 펴낸 바 있다. 안동대학교 대학원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2008년 “항일투쟁기 황옥의 양면적 행적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경지역 장수황씨 집안사람들의 일제 강점기의 활약상! 한말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일제에 의한 500년 조선왕조의 멸망은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수난이 예고되어 있었다. 비록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선각자들의 깨우침과 개화운동은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민지를 계발하고 식산을 장려하여 부국강병으로 국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일제에 의해 유린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개화파의 실력양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과, 금수만도 못한 왜놈들을 즉각 물리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구국 일념의 의병전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이는 개화와 보수라는 대립된 개념으로 일제의 무력 앞에 대처하는 방략이 달랐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문경 지역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문경지방은 운강의 강력한 위정척사 사상에 의한 의병정신이 지배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한말 일제침략기 한두리 장수황씨 문중의 시대변화에 대처하는 인식과 방략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 갔다. 이들은 1906년 봄 문경지방 최초의 신교육 기관인 사립도천소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한두리 도천학교출신들은 일제 초기 식민지지배체제에 순응하지만, 3?1운동을 시점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들 중심에는 늘 황옥이 함께하였다. 황옥은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기도 하였지만, 의열단 의거에서 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의문의 인물로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주변과 행적 전후를 모두 놓고 볼 때, 일제의 녹이나 받아먹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졸장부가 아니었다. 즉 민족 반역자, 일제 주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김시현과 김원봉이 평가하였던 강개 과단하고 담략이 큰 위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해체되는 집안이 많다.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집안이 어디 한두 집이었겠는가? 황옥의 宗孫子 황정하는 1983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몸 바친 열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비극적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3대에 걸친 안타까운 비운의 가족사가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이 글에 수록된 황옥 외 다섯 명의 독립운동가는 한두리 출신이거나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옥중 사망한 황직연(황옥의 제), 1921년 북경 제2회 보합단 국내지단 군사령부 설치를 주도하고 1928년 만주동포의 민족문제 해결에 앞장서다 일경에 총살당한 김희중(황옥의 재종매제), 김희중과 함께 북경 보합단 국내지단 군사령부설치에 가담하였던 황정연(황옥의 종제), 황옥과 內外從으로 의열단에 가담 평생을 민족운동에 몸 바친 김사용, 1943년 단파방송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의 외길을 걸었던 송남헌(황옥의 내외종질) 등이 있다. 이들 중 황직연?김희중?김사용은 일제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으며, 황정연은 불구가 된 몸으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강점하 이들이 바친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정신은, 일찍이 한두리 신교육 구국운동의 요람인 도천학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책은 질곡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한두리 출신 인물들을 추적하여 기록하였다.
문경 한두리의 재발견 (기억해야 하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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