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편안한 삶 대신 총과 펜을 든 채
평생을 불의와 맞선 독립운동가 김학철의 치열한 삶
평생을 불의와 맞선 독립운동가 김학철의 치열한 삶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김학철
매년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떠올립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그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책과 영화 등을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그들의 활약이 재조명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있습니다. 김학철 역시 그중 한 명입니다.
김학철은 열아홉의 나이로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무작정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포를 만나 황포 군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그는 조선의용대 창립 단원이 되어 분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누비던 시절,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위험하고 고단한 하루하루였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요.
그날도 전투를 마친 부대원들은 잠시나마 승리의 기쁨에 취해 앞으로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의 기습이 있었습니다. 이때 학철은 다리에 총을 맞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투옥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총에 맞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향한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끝내 독립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살아남은 그는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이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보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다행히 김학철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이념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 역시 1938년 10월에 중국 국민당과 함께 투쟁했으나 이후 중국 공산당 산하 팔로군과 연대했고, 일제 패망 후 남은 이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건너가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한에서는 조선의용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도 이들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숙청되었고, 항일 역사에서 조선의용대는 지워졌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김학철은 조선의용대 대원으로서 싸웠던 이력과 광복 후 조선 독립 동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사상을 경계하던 남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월북’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남한에서 그의 이름은 잊혀졌습니다.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나 문화·예술인들은 월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거나 그들의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김학철의 소설 역시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남한에서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매년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떠올립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그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책과 영화 등을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그들의 활약이 재조명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있습니다. 김학철 역시 그중 한 명입니다.
김학철은 열아홉의 나이로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 무작정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포를 만나 황포 군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그는 조선의용대 창립 단원이 되어 분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누비던 시절,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위험하고 고단한 하루하루였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요.
그날도 전투를 마친 부대원들은 잠시나마 승리의 기쁨에 취해 앞으로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이튿날 새벽 일본군의 기습이 있었습니다. 이때 학철은 다리에 총을 맞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투옥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총에 맞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향한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끝내 독립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살아남은 그는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이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보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다행히 김학철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이념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 역시 1938년 10월에 중국 국민당과 함께 투쟁했으나 이후 중국 공산당 산하 팔로군과 연대했고, 일제 패망 후 남은 이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건너가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한에서는 조선의용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북한에서도 이들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숙청되었고, 항일 역사에서 조선의용대는 지워졌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김학철은 조선의용대 대원으로서 싸웠던 이력과 광복 후 조선 독립 동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사상을 경계하던 남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월북’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남한에서 그의 이름은 잊혀졌습니다.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나 문화·예술인들은 월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거나 그들의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김학철의 소설 역시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남한에서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초등 교과 연계★
교과연계 5-2 사회 2. 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오늘날의 우리
교과연계 5-2 사회 2. 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오늘날의 우리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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