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최규승 시집)

끝 (최규승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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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최규승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끝』. 이번 시집에는 298개의 시 조각들이 ‘끝’이라는 제목 아래 몽타주의 기법으로 엮여 있는 한 편의 장시만을 수록하고 있다. 이로운 표현이나 의미심장한 함의 등 독자가 시를 읽을 때 기대하는 요소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시인도 “이 시에는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은 없다”(#71)고 말했다. 시인은 “격언도 떼어주고 깨달음도 베어주고 예찬도 돌려주고 찬양도 싸주고 은유도 나눠주고 제목도 버”(#46)렸다. “어떤 전위적인 조각으로도 비석의 상투를 넘어서지 못”(#19)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발표된 시는 시가 아니”(#2)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

최규승

저자최규승은경남진주에서태어났다.2000년《서정시학》신인상으로등단했다.시집으로『무중력스웨터』,『처음처럼』이있고,육필시집『시간도둑』이있다.

목차



해설
블랙홀의안쪽/함성호

출판사 서평

우주로확장하는언어의몽타주
문예중앙시선49호는2000년《서정시학》신인상을받으며등단한최규승시인의세번째시집『끝』이다.이번시집에는298개의시조각들이‘끝’이라는제목아래몽타주의기법으로엮여있는한편의장시만을수록하고있다.지난시집으로“시라고불리는제도적문법이후의시”를쓴다는평가를받은바있는시인이이번시집에서보여주는것은“말과말로이어지는허상”(#37)의세계다.언어는구체적인사물이든추상적인관념이든대상을전제로한다.하지만언어는그대상을있는그대로재현하지못하기에허상이다.최규승의시는언어란종지부가없는시작과끝사이에나타났다가사라지는허상임을잘포착하고있다.그런데그것이언어의문제에그치는것이아니라광대무변한우주의문제로확장된다.해설을쓴함성호시인은이허상들을블랙홀의외부에저장된2차원홀로그램같은것이라고했다.하지만시인은그것을말로설명하지않았다.언어의풍경으로보여주었을뿐이다.그것은언어를다루는자신의몸조차허상임을알기때문이다.함성호시인은허상의세계를허상으로보여준시인의태도를‘허깨비인것을허깨비인것대로사랑하고말겠다는안간힘’,‘슬프고아름다운포옹’,‘사랑’이라고평했다.

자가분열하는언어장치
이번시집에는경이로운표현이나의미심장한함의등독자가시를읽을때기대하는요소들을찾아보기는힘들다.시인도“이시에는여러분이기대하는것은없다”(#71)고말했다.시인은“격언도떼어주고깨달음도베어주고예찬도돌려주고찬양도싸주고은유도나눠주고제목도버”(#46)렸다.“어떤전위적인조각으로도비석의상투를넘어서지못”(#19)하기때문이다.그래서“지금까지발표된시는시가아니”(#2)라고했는지도모른다.

나무이름을몰라부끄러워하는
시인의붉어진얼굴
써도써도벗을수없는언어라는운명
내가쓰고싶은시는낭독할수없는시
한순간도가만있지않는문장이순서를바꿔뒤척이는시
시가시를낳는시
자가분열을하는시
읽는순간불타버리는시
시인것이없는시
시아닌시
세상의모든시
-#3

“써도써도벗을수없는언어라는운명”앞에서이제시인이쓰고싶은시는“낭독할수없는시”다.낭독할수없는시는한순간도가만있지않고뒤척이는시다.이세계역시한순간도가만있지않고움직이기때문이다.“나무는나무다흔들리거나흔들리지않아도바람은분다”(#212)라는말은,정지된것처럼보이는순간에도세계는움직이고있다는뜻으로새겨도좋을것이다.세계는계속움직이며순간의끝을지연시킨다.(아스팔트도로패인곳에물이고여있다하늘한자락이거기에담긴다자동차바퀴가튀긴물방울속에하늘이흩어진다생성은지속된다-#104)시인이바라는문장은,시는그런것이다.아니,원래문장은,시는그렇게뒤척이는것인지도모르겠다.이뒤척임이다시시를낳는다.자가분열을한다.이런시는읽는순간불타버리는것이맞다.움직이는것을어떻게읽을수있겠는가.움직이는것에어떻게격언과깨달음을담고예찬과찬양을보내고은유하고제목을붙일수있겠는가.그런행위들은움직임을인위적으로정지시킨뒤에할수있는행위들이다.끝난것처럼보이지만끝은끝나지않는다.머리끝에서시작해발끝으로이어지는고양이의끝과화자의손끝이만나듯이(#121)끝은끝나지않는다.끝과끝이계속이어져끝이끝나지않고움직인다.끝이끝을낳는시,스스로움직이는시가「끝」이다.

이것은끝이곳은끝태어날때이미끝세상은그날이후끝끝이계속되는끝나는끝너도끝시작도끝끝없이끝나지않는끝
-#297

우주의모습을보여주는타투
끝이끝나지않으니“끝은사라지고/글만남는다”(#298)는마지막조각의종언은자연스럽다.물론그글은끝이사라졌으므로끝이없는글이다.이번시집에는끝나지않는끝의모습을보여주는구절이몇개있다.“여자의몸엔상처가똬리를틀듯감겨있다”(#141)나“시계반대방향으로돌아들어배수구로사라지는비누거품보글보글섞인물내몸을흘러내린부슬부슬한시간들이빙글빙글사라지고있다(#231)”같은것들이그것이다.“똬리를튼상처”나“시계반대방향으로돌아들어배수구로사라지는비누거품”은나선의우주를연상시킨다.우주는계속팽창한다.끝이계속멀어지므로끝이없다.

돌아누운여자의몸에서나와가장가까운건엉덩이가장먼것은오른손끝잠시뒤척이자손끝보다더멀어진왼발끝멀어지는손끝발끝엇갈리는손끝발끝오른손끝과왼발끝이앞서거니뒤서거니멀어지고오른발끝과왼손끝이앞뒤로달아난다잠든여자의몸이내게서자꾸달아나는것은단지자세가식상하기때문어둠속에서도자꾸끝을바꾼다다시돌아누운여자는손끝과발끝을내게내민다-#160

#160은돌아누워잠든여자가뒤척이며화자에게서가장먼신체의끝을계속바꾸는모습을보여준다.화자는여자가끝을바꾸며자꾸달아나는것은단지자세가식상하기때문이라고했지만그것은멀어지는게세계의본질이라는말과크게다르지않다.우주는계속팽창하고있기때문이다.‘어둠속에서도자꾸끝을바꾼다’는표현이방증이다.우주는어둡지않은가.다시돌아누운여자가화자에게손끝과발끝을내민다.화자에게다가온것은멀어지는끝이다.끝나지않는끝이다.그러니그끝을향한사랑이아름답지만휘발성을지니는것은당연하다.

그녀의몸에휘발유를붓고내려다보는물기가득한눈빛에잠긴아스팔트에흘러내리는휘발유는온도가그리운차가운액체-#34

이시집에담긴298개의언어풍경들에는제목도없이#1,#2,#3가같이시나리오의신넘버를연상시키는번호만매겨져있다.각각의풍경들은서로연관된것들도있지만대부분아무관련이없다.“관계도없이이유가되고이유도없이관계가”(#135)되는모습이다.무수히많은별들이모여성단을이루고있지만역학적인관계를제외하면각각의삶을살아가는별들의모습과비슷하다.빛은광년의거리를달려와우리눈에보인다.빛의실체인별은지금이순간에는없을수도있는것이다.즉,별빛은별과우리사이에잠시나타난홀로그램인셈이다.거리와시간과움직임의문제다.만물은유동하기에저기별까지의거리가무한에가까워지는유한이라면,여기사람(사물)과의거리는유한으로보이는무한이다.그렇다면저별빛뿐만아니라우리주변에있는사람과사물도허상,홀로그램일수있다.그것이최규승시인이『끝』을통해펼쳐보인세계이다.시인은언어의모습이삶의모습이고삶의모습이우주의모습이라는걸인식하고있는것이분명하다.그길을따르는것이시인의진정성이지않고무엇이겠는가.
#1부터#298까지‘끝’이라는제목으로묶인시의조각들을한조각한조각따라가다보면우주의소리가들리는듯한느낌을받는순간이있다.하지만시인은아무말도하지않았다.다만지금여기의모습을언어의풍경으로보여주었을뿐이다.시인의바람대로시가자가분열하여스스로우주로확장한것이다.

책속으로추가
#124
하늘을스캔한강물위에과일을실은배두척이하루의끝자락에떠있다배와배가맞닿은곳에서하늘이무너지기시작한다파장으로지워지는하늘과하늘사이에물이든다배위의열대과일이흔들린다선수와선미가똑같은배앞으로도나가지못하고뒤로도물러나지못한다강물이배끝을잡고하늘이뱃머리를막는다끝과시작은배의몸통을가운데두고팽팽하다언제나시작영원한끝

#131
강가의나무바람없어도흔들리는나뭇잎들나뭇잎에출렁이는햇빛일렁이는물결빛은바람의끝을타고와나무를태운다밝아질수록어두워지는나무이름을잃고어두워진다물결위로떨어지는어둠일렁이는하루다시빛이스며든다불나무는검고사위는탄다강가의나무바람을흔들어깨운다바람이몰아치고나무는잠든다

#142
여자는화분을들고있다화분에는손이자란다굵고튼튼한손흙속의양분을죽죽빨아들이는핏줄여자의턱밑까지자란손천천히오무렸다폈다를반복한다여자는화분을아래로한껏내린다여자의턱끝에손이닿는다여자의턱에수염이자란다손이수염을붙든다당긴다비명을지르며여자는화분을놓친다여자의수염을더욱꼭붙든손화분이허공에서흔들린다여자의비명이점점자란다

#157
네입술에앉고싶어뻥튀겨진네입술가시돋은네입술바늘꽂힌네입술끝이살짝올라간네입술약간벌어진네입술덧니가살짝보이는네입술침흘리는네입술온통붉은네입술피흘리는네입술배고픈네입술흔들리는네입술구석으로몰린네입술터질것같은네입술당당한네입술입술뿐인네입술엉덩이에서피가나도좋아앉고싶은네입술

#170
맑은여름밤야외극장의영화가끝나간다하나둘벌써자리를뜬관객들뜨는관객들빈자리가늘어난다영화는계속상영되고있다끝나야끝나는영화를흐지부지흩어지는관객들이보고있다몇몇의끝과하나둘사라지는흐지부지여름밤은깊어가고영화는끝나가고관객은흐지부지아직남았다

#180
어디서부터시작해야하나창밖에비온다바람분다바람이시작인가창이시작인가밖이시작인가비가시작인가문득창이있고밖이있고바람불고비온다내가한쪽눈을떴을때이미시작된지오래였다창이있고밖이있고바람불고비온다창안에내가있고안이시작인지나는모른다알수없으므로내가시작이다

#186
이제그만집에가자거리는
아름답지만죽음이
머물수없네삶은
흔들리므로거리의것이제집에
가야지천천히떠올라라천천히
기포도하나둘천천히처음에그랬듯이
다시사람의집에시집을안치해야한다
젖은시집퉁퉁불은말들
천천히아름다움이마르는동안에도
떠오른다죽음조차죽음으로

#232
샤워를하다느닷없이잊힌사람이떠올랐다흘러내리는물을따라내려다본다시계반대방향으로돌아들어배수구로사라지는비누거품보글보글섞인물내몸을흘러내린부슬부슬한시간들이빙글빙글사라지고있다의도된의태어가거슬리는지금시간은밤11시방금그친비는아직창에흘러내리는중산책하기에좋은밤내딛는발걸음이빗물로코팅된땅바닥에미끄러지듯흘러내린다생각이미끄러지는기분좋은밤

#271
나와세상은여전히끝없는끝시도끝없는끝별과별사이어둠이빛난다

#287
모른다그때나지금이나별빛은얼마나허망한가모든사람을속일수있는반짝이는저것최면은눈으로들어올때빠르다죽음에몸적셔본사람만이외로움의수위를안다어떤고통도죽음에이르는외로움만큼깊지않다하늘때문에죽은목숨이하늘로위안을받는다별빛떨어지는일말고는다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