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박규리,20년만의신작
박규리시인의두번째시집《사무치다》가나남시선97번으로출간되었다.첫시집《이환장할봄날에》(창비,2004)를낸지무려20년만이다.전작에수록된〈치자꽃설화〉,〈성자의집〉등으로많은사랑을받았던그가기나긴‘안거’(安居,불교수행자가오랜기간한공간에들어수행하는일)끝에돌아와,“외롭고황량한삶의비탈길”(〈안거,만장〉)에머무는존재의아픔을시로승화한다.“마음에도세상에도안과밖은없었다”(〈정말일까〉)고말하는시인에게피아(彼我)를나누는일이란무의미하다.박규리의시에서‘나’는‘너’고,‘너’는‘나’이므로타인이겪는고통은즉내가겪는고통이다.그리하여시집《사무치다》는이세상을살아가는모든존재의슬픔을‘적멸’(寂滅,불교에서이르는절대평화의경지)로승화시키려는“구도의몸부림이자고해서”(정희성시인의추천사중에서)와같다.
모든존재에건네는따뜻한위로
시인에게존재란곧가여운것이다.이러한시선은인간뿐아니라동물과식물,사물에까지닿는다.“가진것다잃고/절집아래빈토굴에”(〈달밤〉)들었음에도다시삶을각오하는남자,“무참한이별의상흔과한생의뜨거운열기”(〈늙은개〉)를품은채로목줄에매인개,“새하얀눈물환하게밝”(〈구절초〉)히며피어난한밤의구절초꽃,“출렁이는파도와한몸이듯”(〈조각배〉)격랑속에서의연한조각배에이르기까지.그는이모두에게서“환희와욕망,비탄과절망”(〈화산〉)을본다.시인박규리에게시란구름위에앉아부르는노래가아니다.그의눈은온전히이곳지상에머문다.오랜세월불가에서공양주로지낸이력이있는그에게세상은‘고해’(苦海,불교에서가리키는인간세계)와다름없다.“천하고속된것들다저버리고성스러운건없다”(〈성스러움에대하여〉)고쓴시인은그렇게고통의바다한가운데신음하는이들을위해노래한다.그러므로박규리에게시를쓰는행위란그모든존재를향한연민이자사랑,즉불교에서강조하는‘자비’(慈悲)를베푸는일이다.
세속과초월모두를끌어안는시선
그러나시인에게도삶은녹록하지않다.마음속꿈틀대는욕망으로인해좌절하고한탄한다.“이세상천형아닌것없”(〈저녁을지으며〉)다고단정하며이럴바에“다시는아주태어나지말”(〈안거,슬픈초인〉)기를바라기도한다.하지만시인은다시앉은자세를고쳐,고행자의눈으로삶을직시한다.뼈에사무칠때까지지상에넘실대는고통을멀리가늠하고깊이받아들인다.그리하여“만났다이별하고홀로남은사람들”(〈구절초〉)속에서“저것들다품고가는일이이지상에서내가나로살수있는쓸쓸한천형이요,하마아득하고도아름다운업”(〈천형〉)이라말한다.이러한시인의의지는세계를변화시킨다.박규리의시집속세계는봄비가“괜찮으냐고/괜찮으냐고”(〈안부〉)사람에게안부를묻고,늙은소나무가“괜찮다고/괜찮다고”(〈그렇게또사무쳐오르면된다고〉)사람을다독이는세계다.세속과초월모두를끌어안는자비로운시선이“너도나도/구분없는적멸의자리”(자서중에서)를끝내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