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거는숨은천재다.잊지못할,살아숨쉬는초상화를그려내는것이그의작품을관통하는정신이다.”―『스코틀랜드온선데이』
“위대한소설가와위대한인물이모두그렇듯,존버거는자신이창조해낸인물과독자들을부드러운손길과삶에밀착된유머로이끌어간다.”―마이클온다치,소설가
픽션과에세이를넘나드는존버거의2005년신작
세월이흘러도희미해지지않고반대로점점더명료하고새롭게되살아나는기억이있다.지금은존재하지않는,이미세상을떠난이들의모습과목소리.그들은실제로만난사람일수도,책속에서알게된사람일수도있다.그리고어느순간그들로부터세상의모든복잡한문제의답을너무나간단하고명쾌하게얻게되기도한다.그럴수있는것은아마도깨닫지못하는사이그들의삶이우리삶속에깊숙이스며들어와있기때문일것이다.
올해로여든의나이가된우리시대대표적지성존버거(JohnBerger,1926-)는,2005년새롭게발표한소설『여기,우리가만나는곳』에서이같은평범하지만깨닫기힘든진리를잔잔하게들려준다.그는자신과동일한이름,나이,배경을지닌주인공을등장시킴으로써자전적인요소를가미하고있는데,픽션과에세이의경계를허물고자유로운허구성과실제삶이밀착된현실성모두를놓치지않는다.또한미술평론가,사진이론가,사회비평가,철학자,화가,시인,소설가등그의이름앞에붙는다양한명칭들에걸맞게,존버거는모든감각을끌어와자신의삶속에들어왔던무수히많은삶들을추억하는따뜻한한인물을섬세하게창조해냈다.부커상수상작인『G』와『우리시대의화가』『결혼을향하여』등과더불어인간에대한깊은이해와신념이담긴지적이고도아름다운이소설은,공간의경계와시간의한계를자유롭게넘나들면서명랑하고유머가넘치는이야기들을펼치는한편,읽는이의가슴을아리게할애잔한감수성을환기시킨다.
도시,강,그리고동굴을주유하며풀어놓는여덟개의이야기
주인공존은유럽의여러장소를다니면서누군가를떠올리고,만나고,대화를나눈다.그들은다름아닌죽은자들이고이미세상을떠났지만,존이발딛는곳마다어김없이나타나말을건넨다.돌아가신어머니와아버지,옛스승,친구와애인,그리고이름모를선사시대예술가까지,그들은과거에존과함께경험했던일들을추억하고,존이알지못했던것들을일깨워주는듯한충고를던지기도한다.한편이들이만나게되는각각의장소들은,마치그자체가또하나의등장인물처럼생생하게살아숨쉬며,존이기억의끈을놓치지않도록끊임없이자극한다.이책을이루고있는여덟개의단편중일곱개의글제목이바로이장소들을나타내고있으며,각각의이야기들은얼핏무관한듯하다가도어느새서로이어지고얽히고교차한다.
보이는세계와보이지않는세계가카드놀이를하는것만같은리스본에서는십오년전돌아가신어머니를만나고,딸카티아를찾아간제네바에서는그곳에서생을마감했던보르헤스를떠올리며,장사꾼들로붐비는크라쿠프의노비광장에서는유년시절그에게가장중요한존재였던켄과함께수프를먹는다.또한미술학교동창생을찾아간아일링턴에서는오래전서로를만지며새로운지평을열었던한여자를회상하고,아르데슈강물이조각해낸퐁다르크다리의쇼베동굴에서는수만년전어둠속에서벽화를그렸던크로마뇽인예술가를불러내기도한다.마드리드의한호텔라운지는녹색오두막학교시절타일러선생님의잔소리가다시들려오는곳이며,슘과칭은‘폴란드기수’를닮은친구미렉과전쟁의상처를안고살아간아버지를추억하는강이다.이렇게그들은마치그공간에영원토록서려있다가존의방문으로인해다시살아나는것처럼,되돌려진시간의흐름에이끌려장소와닮은자신의모습을드러낸다.
경계없는흐름,아름다운문장에담긴삶에대한철학적주제
작가자신이거나혹은가공의인물이거나,아니면작가가알고있는누군가일수도있는존이라는인물을따라여러곳을옮겨다니다보면,점점더과거와현재의경계가모호해지고,인용부호가사라진문장들에서는그와이야기나누는사람이실재하는것인지기억속에존재하는것인지의구분이희미해진다.이러한점은마지막이야기「슘과칭」에서가장극명하게나타난다.여기서화자는일차대전참전의상흔을집앞의작은강‘칭’을바라보며씻어냈던아버지와,불법이민자로파리에머물다가고향폴란드에정착하게되는미렉과단카부부의가난하지만생동감넘치는일상을병치시킨다.어린시절과현재,영국과폴란드라는동떨어진시간과공간을하나로묶어내는연결고리는,이두곳에작지만아름다운강이있다는사실,그리고지금여기의강‘슘’이내다보이는미렉의집에서그가족이돌아오길기다리는존자신이다.
그러나그모든구분을명확히하려는것은어리석은시도다.오히려이러한소설적기법은,아름답고명료한시적문장들과함께,계급과국적의경계를부정하는글쓰기를해온존버거의사상을미학적으로구현해내는효과를거둔다.바로이지점에서존버거가현존하는영국최고의작가로자리매김된다.즉,그는자신의모든작품을관통하고있는철학적주제―인간의소명과양심,용기와딜레마,문명과도시화에의한인간소외등―를결코과장되지않은,극도로일상적이고해학넘치는언어로풀어냄으로써,스며들듯천천히,그러나더깊고큰울림으로우리에게던져주는것이다.특히생의후반기에접어든노작가가이작품에서선택한‘죽은이’들의목소리는,세상을보고듣고생각하고추억하는‘또다른방법’이다.그것은결코환상적이거나낯설지않다.일견무질서해보이지만어느새고요한경외감을불러일으키며,허구의세계를떠나생명력을띠고현실에서아름답게구체화한다.
망자들이건네는가냘픈희망의메시지
이처럼존버거는지극히평범하고나지막한목소리를통해인간이공유해야할가장중요한가치를하나씩깨달아가자고역설한다.우리가던지는수많은질문들에대한해답은그리멀리있지않으며,아주가까이,바로‘여기,우리가만나는곳’에있다는암시가소설전반에흐르고있는것이다.존버거가한국의독자들에게전하는메시지에서“죽은이들은결코우리곁을떠나지않으며,그들이하는이야기를귀기울여듣는다면망자들은어떻게든우리를도와주려한다”고말하듯이,주변을맴돌다불쑥나타나말을건네는소설속인물들은,존에게혹은우리에게삶의구석구석을따뜻한손길로어루만지고가느다란희망을공유할수있게끔해준다.존버거의언어를빌린죽은자들의희망은곧우리의희망이되어,삶에대한긍정적인호소를받아들이고좀더나은세상을꿈꾸는것이결코헛되지않음을알려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