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거를이끈‘파쇠르’들
이책은크게두부분으로나뉜다.1부에는버거의사상을형성하고이끌어준이들에대한글을배치했다.존버거는유럽의파시즘을피해런던으로망명한난민들이만든전후하위문화의영향을받으며지적으로성장했는데,영국의경계를뛰어넘어베르톨트브레히트,막스라파엘,발터베냐민,에른스트피셔,가브리엘가르시아마르케스,롤랑바르트,프레데릭안탈,제임스조이스,로자룩셈부르크등과같은여러작가와사상가들의글을읽고사유했다.이들은대게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사상적공통점이있고,버거는이점에특별한경의를표한다.
하지만그가이런저명한사상가들의영향만받은것은아니다.첫번째글「크라쿠프」는자전적소설『여기,우리만나는곳』(2005)에실려있는단편으로,주인공존이어린시절다닌기숙학교교사였던켄(Ken)이살아돌아와대화를나눈다.그는실제로존버거에게최초의스승이자‘파쇠르(passeur,프랑스어로‘안내인’이라는뜻)’였고,이글이1부가장첫머리에등장하는이유다.「이야기꾼」에서는그가가까이지냈던이웃농부가보여준이야기하기방식을분석하는데,스스로‘나의대학’이라불렀던시골마을의삶이버거의인식을어떻게형성해주었는지짐작할수있다.이들은비록역사에이름을남기지않았지만동등한지성과영향력으로존버거의세계에존재한다.
사람은아니지만버거에게중요한또하나의안내자는바로드로잉이었다.「종이꺼내그리기」「모든그림과조각의기초는드로잉이다」에서그는드로잉이지닌의미를언어의시제에빗대어,또는직접드로잉하는순간을묘사하며분석한다.그는화가이길포기하고글을쓰기로결심한후에도드로잉만은손에서놓지않았는데,그의글쓰기가늘그림을동반하는듯이느껴지는이유다.
이장의마지막글인「이상적인비평가,싸우는비평가」는이러한영향들을체화하여앞으로비평가로서어떤글쓰기를할것인가에대한일종의선언이다.그가우리시대의미학적기준으로삼았던‘이작품은사람들이각자의사회적권리를인식하고요구하도록돕거나권장하는가’라는질문이바로이글에등장한다.
울타리와장막을걷어내는용기
1부의제목‘지도다시그리기’는원래제프다이어가했던“현존하는문학적명성의지도에버거의이름이더욱뚜렷하게인쇄되도록로비를벌이는것만으로는부족하다.버거의모범사례는우리에게근본적으로지도의모양을바꿀것을촉구한다”라는제안에서나왔다.이처럼1부가‘지도다시그리기’를위한안내서라면,2부는지도그리기의실제사례들을보여준다.결국이책은그가탐험했던영토로가는길을알려주는안내서와지도목록이라고할수있다.
버거의시「지형」에서제목을따온2부는,각글에서다루고있는시대의시간순으로배열되어있다.이글들은정확하게분류하기어려운,갈수록모호한풍경에대한‘예술적글쓰기’로이어진다.그러나그형식적모호함은존버거가지닌자유로움과폭넓음에서기인할뿐,말하고자하는내용은언제나명료하다.르네상스,낭만주의,빅토리아시대를거쳐‘큐비즘의한때’를과학발전에따른세계관의변화로요약하는부분에서이를엿볼수있다.“르네상스예술가는자연을모방했다.매너리즘,고전주의예술가는자연을초월하기위해자연의사례들을재구성했다.십구세기예술가는자연을경험했다.큐비즘예술가는자신의자연인식이자연의일부라는사실을깨달았다.”즉큐비즘을피카소와같은대표주자들의천재성으로설명할수없고,그저자연발생적인역사의일부라는것이다.이는1907-1914년사이에가장위대한큐비즘작품이탄생하고는더이상나오지못했다는점에서도확연하다.존버거가보기에큐비즘은양식적범주가아니라몇몇사람들이경험했던조금엉뚱한한때였고,아직만나지못한것에대한욕망을정의하는시작이었다.
존버거의글은강경하고비판적이지만그안에는희망의빛이늘공존한다.이십세기초‘예술을앓는’도시가되어버린파리에서발견한‘판지태피스트리화가연합’의운동,일견진부하게보이는소비에트미학이진정한전통의기초를만들어가고있다는긍정,서구예술가들의병든판타지로채워진1958년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만난인도,스리랑카,멕시코,아랍예술가들의작품등….그는기존의울타리를허물고,역사와예술이조응하는진실된작품을끊임없이찾아내고알려주었다.
이어사유재산의수단이되어버린예술,사진의등장과초상화의죽음,미술관의역사적기능을비판하고분석한다.또자신의책『영원한빨강』(1960)의새로운서문(1968/1979)과노동삼부작‘그들의노동에’의서문(1979)에서는‘부르주아문화와사회에반대한다는의견을내려놓는일은없으리라’다시한번다짐한다.과거와단절시킴으로써모든상상력을미래에만집중하게하는자본주의존재방식에대한변함없는거부인데,그는이입장을죽을때까지고수했다.그러나1989년동유럽의공산정권을향한민중저항운동과1991년소련의붕괴를바라보며교조적으로변질된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에대한비판역시외면하지않는다.한때민중을동정하는마음에서시작되었던공산주의가오늘날사망판정을받은것은,일반화된법칙들이실제사람들의삶을가리면서결국악이군림하게되었기때문이라고진단한다.그는이처럼균형있는눈,장막에가려진것을걷어내고볼줄아는눈을지니고있었다.
이십일세기에들어가속화된,전세계를단일유동시장으로만드는‘세계화’현상속에서존버거는우리의지표를세우고장소에이름을붙이고시를읽을것을강권한다.이선집을마무리하는긴평론「이런와중에」에서동시대의풍경을다음과같이정의한다.“내가찾은지표는감옥이었다.그뿐이었다.이행성을통틀어,우리는모두감옥에서산다.”그리고여기에반응하는우리의분노,그러나그분노때문에끝내패배하지않는우리의인내심에다음희망을향한잰걸음이담겨있다고감지한다.
다시상상하기,다른방식으로보기로의초대장
우리가어떤작품을보고즐거움을느끼는이유는그것이우리에게내재된잠재력을깨닫게해주기때문이다.이는예술가가세상을보는방식이우리가보는방식과연결될때이루어진다.그연결이가능하려면어떻게해야할까.존버거는시대에따라‘예술작품의특정한의미가바뀐다는점을기억해야한다’고강조한다.그렇지않다면어떤작품도그시대를넘어살아남을수없기때문이다.그리고우리시대의기준은‘이작품이인간의사회적권리요구에도움이되는가’라고보았고(프로파간다로서의예술을말하는게아니라),그렇게바라본풍경을평생충실히그려나갔다.사람들이예술을제대로판단할수있게돕는것이자신의임무라고여겼기때문이다.
이처럼확고하면서도폭넓은시각은‘더는개별과보편간에본질적인단절이없는’놀랄만큼비옥했던역사의한시기를발견했던버거의예리한눈,그리고이러한생각을꾸준히끌고갔던글쓰기가있었기에지속가능했다.더이상한곳에서한사람의시각으로본모습을고정하여한인간의정체성을구축할수없고,어떤이야기도유일한이야기처럼얘기되는일은없다는통찰은그의여러글에서되풀이된다.이는그의글들이다시상상하기,다른방식으로보기로의초대장이라는톰오버턴의말과도연결된다.그의안내를따라우리는,감상적노스텔지어와구별되는,과거를불러내다시보고현재화하는노력을계속해야한다.
존버거가스스로설명한적은없지만,『풍경들』은간략한미술사스케치나『초상들』에실린개별글들의배경으로도읽힐수있다.이글들이씌어진시기나묘사하는시기를보아도그렇다.하지만단순히『초상들』의배경이나‘부산물’로여겨질책은아니다.오히려역사적시기마다남긴명백하고총론적인글들이예술을보는미학적자양분을계속해서공급해주었다고해석하는편이낫다.이처럼『초상들』과함께『풍경들』이완성한이독특한안내서는우리가세상을이해하기위해함께할꽤나믿음직한지도중하나가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