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가는 길

결혼식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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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존버거

존버거(JohnBerger,1926-2017)는미술비평가,사진이론가,소설가,다큐멘터리작가,사회비평가로널리알려져있다.처음미술평론으로시작해점차관심과활동영역을넓혀예술과인문,사회전반에걸쳐깊고명쾌한관점을제시했다.중년이후프랑스동부의알프스산록에위치한시골농촌마을로옮겨가살면서생을마감할때까지농사일과글쓰기를함께했다.주요저서로『다른방식으로보기』『제7의인간』『행운아』『그리고사진처럼덧없는우리들의얼굴,내가슴』『벤투의스케치북』『우리가아는모든언어』등이있고,소설로『우리시대의화가』『G』,삼부작‘그들의노동에’『끈질긴땅』『한때유로파에서』『라일락과깃발』,『킹』『여기,우리가만나는곳』『A가X에게』등이있다.

출판사 서평

고리노로향하는순례길
아테네의성당근처시장에서타마〔tama,그리스정교에서기적이나도움을기원하며교회에바치는편액(扁額)〕를파는눈먼상인이있다.그는‘양치기’라는뜻의‘초바나코스’라불린다.어느날몸이‘전부다’아픈딸을위해타마를사려는장페레로가다가온다.아버지와여행중인딸니농도옆에있다.그둘은점차소리와냄새로속삭이더니,마치꿈속처럼모든것을들려준다.소설은그들을지켜본초바나코스가우리에게전하는이야기로구성된다.
프랑스쪽알프스산맥모단에서철도신호원으로일하는장페레로는이십여년전즈데나와결혼해딸니농을낳았다.프라하에서민주화운동을하던즈데나는‘프라하의봄’이듬해인1969년파리로망명했고,그르노블의이민자모임에서장을만났다.니농이여섯살되던해프라하시민들이인권과시민권을요구하는청원서를제출했다는소식을듣고고국으로떠나결국돌아오지않는다.성인이되어이탈리아모데나로거처를옮긴니농은베로나에서지노라는청년을만나사랑에빠진다.어느날입술에난상처가아물지않아찾아간병원에서에이즈라는선고를받고,몇해전하룻밤을보낸남자에게옮은것임을직감한다.그녀는자신의병을알리고지노와의만남을거부하지만,그는곁을떠나지않고오히려청혼을한다.장은모단에서오토바이를몰고,즈데나는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에서버스를타고딸의결혼식이열리는베네치아남쪽시골마을고리노로의긴여정에오른다.그여행길은우연한만남과대화,깊은연민과눈물로채워진다.그들과모든순간을함께하는눈먼타마장수는‘결혼식가는길’의종착지에서슬프지만행복한사람들의축제를밤새지켜본다.
이처럼줄거리는제목그대로단순하다.하지만존버거특유의화법이그렇듯,이야기는시간순으로흐르지않는다.화자인타마장수의시선으로등장인물들(주로장,즈데나,지노)의과거와현재가불규칙하게나열되고,중간중간니농의목소리가일인칭으로들려온다.어떤장소에선지나치는사람들의목소리가갑자기끼어들기도한다.또보통소설이결말을나중에보여주는것과달리시작부터니농의불운을드러내고,거창한서사도인물의복잡한심리묘사도없다.그저처해진운명을향해걸어가는인물들의상황과대화를있는그대로흩뿌려놓는다.마치말하고싶을때말하도록내버려둔것처럼,목소리가들려오면들리는대로귀기울인것처럼.

실패한역사의미래
소설의배경은냉전이끝나고정치적긴장감이완화된1993년쯤이다.유럽대륙양쪽에서각기국경을넘어목적지로향하는장과즈데나의여행길에서존버거는인물들의입을빌려세기말의암울한현실을드러낸다.브라티슬라바에서『1947년부터현재까지정치용어사전및용례』만들기에몰두하는즈데나는버스옆자리에앉은남자에게자신이믿었던역사의실패를비판한다.“공산주의는죽었다고사람들이말하지만,실은우리가자신이없었던거예요.두려워할게아무것도없지만,모든것을두려워하는거죠.”과거체제에서‘슬로바키아백과사전’의책임편집자였지만지금은택시기사로일하는남자는새로운미래로데려다줄고속도로라믿었던역사가지난이세기동안우리를절벽끝으로내몰았다고말한다.이제노예제도없고사람들은훨씬오래살고달까지가지만우리가얻고자했던미래는지금어떤모습인가.
반대편에서오토바이로이동하는장은포강(PoRiver)을따라이탈리아곳곳을경유하며여러사람들을만나고도시와자연을가까이들여다본다.토리노선착장의한여인은포강을가리키며‘너무더럽고오염되었다’고한탄하고,도로의거대한광고판글자들은제품이나서비스,즐거움을약속하며수킬로미터에걸쳐이어진다.강가에아지트를둔십대소년들은돈을벌기위해,‘이지구에서살아남기위해’컴퓨터해킹을한다며자랑인지변명인지모를말들을늘어놓는다.텔레비전에서는가난한소작농집안의아이가납치되어장기밀매업자에게신장을탈취당했다는뉴스가흘러나오고,식당의취객은고통받는사람은불량품이고고통을주는사람이주인이니,살아있으려면주인이되라고주절거린다.이십세기가저물어가는현대도시에서시골마을로의여정은니농의부모세대가꿈꿨던역사,그실패한미래의단편들을사진찍듯그대로보여준다.

두려움이만들어내는증오
타인을향한혐오와낙인찍기도커져갔다.사람들은에이즈환자인니농에게서슴없이욕설을퍼붓고경멸의눈초리를보낸다.그녀는절망한다.“누군가의모든걸사랑한다는말이있죠.그사람들은모든것을미워했어요.하나도남기지않고.”증오는두려움에서기인한다.두려움이연민을불러일으킬수도있지만그건진정한연민이아니다.에이즈환자에겐완전한실패와패배감에서오는고통이몸의고통보다더크다.이런고통은사람을고립시키고마비시킨다.
지노의아버지페데리코역시처음엔결혼을필사적으로말리고니농을살해하려는생각까지한다.하지만더이상의고통조차들어갈자리가없어보이는그녀의눈을마주하고체념해버린다.평생고물상으로일했던그는지노에게말문을연다.“사람들은모든걸섞어버리지.모든걸같은장소에던져버리잖아.그렇게쓰레기가쌓이는거지.쓰레기같은건없다.쓰레기는우리가물건들을버리면서만들어내는혼란일뿐이야.”어떤금속이존재하는이유를묻지않는것처럼,니농의존재,그녀를향한아들의사랑을부정할수없음을인정한다.“너는바이러스가아니라한여인과결혼하는거야.고철이곧쓰레기는아니다,지노.그아가씨랑결혼해.”
장은헤어지려는니농을배에태우고포강의물살을거슬러노를저으며단호히말한다.“우리가어떻게살아가면될지를보여주려는거야,자기랑내가.”그렇게니농은살아남기로,두번째삶을그와의결혼으로시작하기로마음먹는다.

패배를거부하는절망
존버거는세상은참을수없을만큼절망적이지만,그건세상자체가아니라삶이돌아가는방식때문이라고했다.그는잘못된방식을바로잡고,절망앞에서패배하지않는법을알려주기위해글을쓴다.즈데나와동석한택시운전수는이방법을비교적직설적으로말하는임무를작가에게서부여받은듯하다.딸의운명에눈물을흘리는즈데나를위로하며그는담담히말한다.“한때는누구나,나이든사람이든젊은사람이든,부자든가난한사람이든,그걸당연하게생각했어요.삶은고통스럽고위태로웠죠.…절망은익숙한거예요.…하지만희망이없는건아니에요.”그녀는낯선남자가자신의슬픔에다가오게하고안도감에미소짓는다.하지만이미니농은즈데나보다더강인인내심을타고났는지모른다.그녀는지노를만나기직전한전시장에서정면을응시하는이집트조각상을관찰하고이렇게확신한다.“그들은앞으로나아가는거예요.…이집트에서는뒤돌아서는일이없어요.떠나는일도,헤어지는일도없죠.”니농의눈은그런것들을알아볼줄알았다.
길위의사람들도목소리를보탠다.오염된포강을두고할수있는것만하는건충분하지않으니뭐라도계속해야한다는여인,사악함빼고는세상모든것은아름답다고하는소년해커까지,모든인물들은각자의이유로절망앞에놓이지만또나름의방식으로그에맞서는무기를품고있다.이런인내심은함께하는사람의마중물로끌어내지기도하고스스로의기도로커가기도한다.심장이새겨진양철타마,도로변의작은성모제단,지빠귀소리를내는피리,여왕처럼만들어주는향수,금도금을한거북이반지등,작은사물들마저인내와희망의부적이되어그들을지켜준다.

보이지않는목소리로만든타마
소설은이처럼절망과희망을오가며한편의순례기나서사시처럼흘러간다.그리스상인이전체이야기를끌고가는설정은고대그리스의서사시인호메로스나비극시인소포클레스를떠올리게하고,그가‘양치기’라불리고눈이멀었다는점에서그리스신화속예언자테레시아스를연상시킨다.존버거는언제나작가가아닌‘이야기꾼’으로불리길원했고,그가이런소설적장치를선택한이유도이와무관하지않을것이다.문장의시제역시과거,현재,미래가혼재되어있어화자의이야기가실제인지꿈인지상상인지예언인지명확히알수없다.“고리노에서의결혼식은아직열리지않았다.하지만이야기의미래는,소포클레스가알고있었듯이,늘현재에있다.”결혼식이실제로열렸는지,눈으로무엇을보았는지는여기서중요하지않다.눈먼초바나코스의이야기는존버거가평생시각적인것에몰두했던것과마찬가지로‘보이지않는것’에도귀기울였음을상징한다.어쩌면이책은존버거가세상의무수한목소리를듣고써내려간,절망에지지않는사람들을위한타마그자체일지모른다.작은목소리들이모여완성한이합창의타마를지금여기에서우리각자의목소리로계속이어나가길바라면서.

※편집자추기:이소설의배경인1990년대는에이즈치료제가지금처럼개발되기전이어서병의진전속도와증상이심각하게묘사되어있다.등장인물들의반응과공포역시그러하기에,내용소개도그시대상황을기준으로할수밖에없었음을밝혀둔다.이제는약을복용하면사실상만성질환정도로관리되고,일상생활에서는전염되지않는다고의학적으로밝혀져있다.안타깝게도일반인들의인식은삼십년전과크게달라지지않은것역시사실이다.이병에대한오래된선입견과막연한두려움으로환자들에게가해지는차별은여전히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