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을 읽는 방법
미술평론가, 시인,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영상원장 최민(崔旻, 1944-2018).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 몇몇 번역서와 시집 외에 제대로 된 저서 한 권 출간하지 못했다.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필력을 생각하면, 더구나 요즘처럼 책을 너무도 쉽게 내는 시대에서 보자면 꽤나 놀랍다.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려는 욕망이 없었던 그의 성정으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세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이미지 연구, 미술비평, 사진비평, 전시평, 작가론, 영화시론, 미술사, 문학평론, 서평, 단상 등 다양한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짧거나 긴 글들을 잡지나 일간지에 꾸준히 기고했는데, 그 분량과 주제의 폭, 내용의 깊이가 상당하다. 이번에 출간된 『글, 최민』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사십여 년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글을 모은 최민의 최초이자 유일한 저서로, 한국 문화예술 현대사의 단면이자 그 시대를 살아 간 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기록이다. 제목이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듯, 사십여 년에 걸쳐 이어지는 글들은 최민이라는 사람을, 그가 관통한 시대를 충실히 비춰 보여준다.
방대한 글을 만나기에 앞서 그를 따르며 가까이했던 전시기획자 이섭의 서문 「너르고 느린 경각(警覺)의 글밭에서」가 나온다. 그는 최민을 이해하는 몇 가지 방향과 그의 글을 읽는 의미를 짚어 주되,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독자들이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을 만큼만 안내한다. 그에 따르면, 최민의 글은 당대 현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거기엔 전문가적 지식과 ‘제대로 아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혀 가려는 끊임없는 성찰,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 분야와 소통하기 위한 열린 태도가 일관되게 담겨 있다고 한다.
본문에는 최민이 1976년부터 2018년까지 쓴 134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아주 짧은 잡문이나 상당 부분 중복되는 경우 외에는 가능한 한 모두 망라하려 했다. 글의 성격이나 주제에 따라 크게 8개 묶음으로 나누고 그 안에선 연도순으로 배열하되 연관 주제는 이어지도록 적절히 조정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과 직후 이어진 이미지 연구(‘이미지의 힘’)를 가장 먼저 배치하고, 미술비평(‘미술의 쓸모’), 전시평 및 작가론(‘전시장 안과 밖에서’), 사진비평(‘사진의 자리’), 영화시론(‘영화, 시대유감’), 서양미술사(‘서구미술의 정신’), 짧은 칼럼(‘생각의 조각’), 서평 외 산문(‘책과 사람들’) 순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방식일 뿐, 읽는 방법은 각자 찾아 나가도 좋다. 시대별이나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를 추출해서 몇 가지 타래를 만들어 가며 읽는 것도 가능하다.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
최민의 글쓰기는 자신의 학업 및 직책 변화와 시대적 여건에 따라 대략 네 시기로 나뉘는데, 석사 졸업 후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1972-1983), 파리 유학 시기 및 귀국 직후(1984-1994),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 및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1995-2010), 퇴임 이후부터 말년까지(2011-2018)이다. 물론 시기별로 명확하게 구획되는 양상은 아니지만 전체를 조망하며 읽어 나가는 데는 도움이 될 만한 구분이다.
첫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말, 대학원 미학과 졸업 후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학생중앙』에 유럽 미술의 거장들을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번역하는 등, 입문적 성격의 서양미술 관련 글을 쓰고 옮기는 작업을 한다. 이는 당시 국내에 미술애호가들이 생기고 미술사를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욕구가 일어나던 때였기에, 잡지나 단행본 출판 환경에서 여러모로 필요했던 글쓰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의 생각이 비교적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미술비평문들이다. 1970-1980년대 한국은 군사독재정권 아래 압축적 경제성장을 거치며 정치사회적으로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냈다. 혈기 넘치는 이삼십대였던 그에게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고민거리를 안겼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때의 글에는 예술지상주의, 미술 우상화, 속물주의, 절충주의, 환원주의를 경계하고, 서구미술과 전위예술을 향한 우리 예술가들의 열등의식, 비평가의 자세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는 1979년 시작된 진보적 미술운동 단체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이었던 그의 활동 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1977년에 쓴 「전위와 열등의식」에서 그는 서구의 전위미술이 한국 작가들의 현실에서 ‘겉치레만의 모방’이 되면서 보이는 기형적인 폐단을 비판하며, “전위는 그 논리상 그것을 전위일 수 있게 하는 시대적, 사회적 필연성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1982년에 처음 발표하고 1985년 개고해 『시각과 언어 2』에 수록한 「최소한의 윤리」에서는 “비평가의 작업은 작가들의 작업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시작”해야 하며, “비평의 참다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평가들 자신이 만인 앞에서 벌거벗고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자신을 포함한) 비평가들의 책무를 호되게 일깨운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전시평 및 작가론, 서평, 칼럼 등에도 공통되게 흐르는데,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미술과 생활’의 간극을 좁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예술가를 높이 평가한 민정기 작가론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2004)에서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다다적 반항이며 미술과 생활 사이의 거리를 없애 버리려는 급진적 기획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민정기를 주재환과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아니 해방 이후 지금까지 등장한 여러 화가들 가운데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최민은 예술과 현실과 사이에 서서 시대와 호흡하는 동시에 한발 떨어져 비판적이고 깨어 있는 눈을 유지했다.
칸막이를 허물고 - 이미지 연구
1983년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으로 유학을 떠난 최민은 1984-1985년 박사학위 준비 논문으로 「자크 모노리 회화의 영화적 효과」를 제출, 1993년 「영화가 회화에 미치는 영향: 1960-1970년대 신구상회화의 경우」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아 십 년 만에 귀국한다. 논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특정 예술 분야에 머물지 않고, ‘이미지’라는 큰 개념 아래 예술 분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귀국 후 그의 글쓰기는 ‘이미지 연구’로 종합되며, 중요성을 고려해 이 글들을 본문 가장 처음에 배치했다. 넓은 시각에서 풀어내야 하다 보니 대부분 이 주제는 긴 호흡으로 씌어졌는데, 첫번째 글 「미술 속의 영화, 영화 속의 미술」(1994)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미지 문명’의 시대에 한 예술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필연적으로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직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러 예술 사이에 부단히 맺어지는 복잡다단한 중복적, 중층적 연계는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일체 무시한 채 한 예술만을 공략하여도 충분히 그 속성(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종래의 미학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다. (…) 모든 것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제 관계만이 문제될 뿐이다. 영화와 회화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그 둘과 그 밖의 다른 예술들, 그리고 예술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 시대유감’ 아래 포함된 「‘사진영상의 해’ 유감」(1998)에서는 이런 심경을 좀 더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로 피력한다. “소위 예술이라는 분야 안에서의 이러한 ‘칸막이 사고’란 시대착오적일 경우가 많다. 나는 문화나 예술이라는 것은 서로 다양한 인자들이 한데 뒤섞여야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일종의 잡종강세론이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사진하는 사람들은 사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문학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는 창의성이 나오기 힘들다.” 그가 1994년 영상원장으로 내정되었을 때 발표한 ‘한 종목에만 집착하는 칸막이 사고에서 벗어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쌓게 하겠다’는 교육방향 역시 이런 오랜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의 기운
한국을 떠나 있던 유학기에는 국내 매체에 기고할 기회가 없어, 논문 외에는 십 년 정도의 글쓰기 공백이 보인다. 귀국 후 쓰기 시작한 비평문이나 칼럼에서는 ‘세계화’ ‘국제화’ ‘민족주의’ ‘한국적인 것’ 등의 어휘들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한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 민주정치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소비사회로 진입하고, 디지털 혁명, 정보화, 세계화 등으로 인해 일상과 문화 전반에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운동 열기가 식자, 미술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영합하려는 움직임이 커졌지만, 반대로 ‘우리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 역시 동시에 존재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꼈고, 이런 말들을 성찰 없이 상투적으로 사용했다.
오랜 학업을 마치고 기성세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사오십대의 최민은, 이 문제에 대해 한층 유연하고 폭넓어진 시각에서 자신의 관점을 밝힌다.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분법으로는 오늘날의 복잡한 문화 상황이 설명되지 않으며, 문화나 예술 앞에 ‘민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관점을 좁혀 버리는 꼴이 된다고 보았다. 「국제화 시대와 민족문화」(1994)에서,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은 새로운 창안들이 생겨나게 하며, 다음 세대의 문화에 대해 앞선 세대가 무어라 지시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민족주의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민족의 이해관계를 보편적 시야에서 반성해 볼 줄 아는 ‘보편주의’가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국제미술’이라는 유령」(1999)에서 역시, 국제적 네트워크와 접속하되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미술시장 속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미술의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 기운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