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살아가는고전의힘
우리근대기문학에서입시나연구목적이아닌,무목적의읽기만으로즐거움과울림을주는작품은과연얼마나될까.흔히고전은직접읽기보다관련강연이나비평을경유해접하게되곤한다.서사와어휘의현재성이약해지면서능동적독서가아닌이론에기댄수동적학습이되기쉽기때문이다.하지만좋은고전은인간보편의모습과우리말의아름다움을담고있어여전히유효한감동을직관적으로전해준다.상허(尙虛)이태준(李泰俊,1904-?)의글이바로그러함을그의단편이나수필을읽어본이라면부정하기어려울것이다.‘상허이태준전집’을새롭게펴내게된동기역시,연구자들을위한일차문헌의확립목적도있었지만,독자개개인의경험들이저변에서부터축적되었으면하는바람이가장크게작용했다.그래야만작품은비로소진정한고전으로자리매김할수있기때문이다.책의외형은매우고전적인반면현대독자들에게필요한편집장치를다각도로갖추려애쓴까닭이여기에있다.
우리시대의근대문학출판
당대최고의단편소설과미문을남긴상허이태준은1925년등단해20여년동안활발히작업했고,1946년8월경월북해활동하다가1950년대중반숙청당한뒤행적이묘연해졌다.남한에서도1957년월북작가작품의교과서수록및출판판매금지조치가내려졌으니,1988년해금되기전까지30여년동안남과북양쪽모두에게외면당한셈이다.해금직후몇몇전집들이발행되었지만서둘러출판해야했던탓에오류와누락내용이적지않았고,이마저도이미오랜시간이흘러절판되거나새로나온전집은주요작품을선별한선집에가깝다.단행본으로는수없이많은판본들이나오고있으나,주로단편소설선,수필『무서록』,문장론『문장강화』,아동문학그림책에국한해중복출판되는실정이다.
상허가창작의전성기를누리던1930년대부터1950년대까지30년,출판금지와숙청으로남과북에서잊혀졌던1960년대부터1980년대까지30년,해금후그의복권을위한노력들이산발적으로이어진현재까지다시30여년이흘렀다.세대로치면대략삼대(三代)의시간인데,짧다면짧지만막상쉽게다가가기어려운간극이다.읽을수있는한글이라도세대간의어휘력과문해력에서차이가적지않다.따라서근대문학출판은‘원본성을존중한다’는원칙아래적어도한세대마다일종의업데이트된주해(注解)가필요하며,이전집은바로그러한시점에서기획되었다.우리다음세대가그시대에맞는갱신을해야할때이판본이하나의준거이자가교역할을했으면하는바람도있었다.
정본전집의필요성
상허는단편소설뿐만아니라중·장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수필,문장론,평론,번역등다양한방면의글을남겼는데,그것들은결코단순하지않다.상허는문학의순수성을추구하는동시에인간사회를반영하는데따르는통속성도긍정했으며,골동취미와우리말에대한감식안을지닌예술가적면모와,자본주의물질문명을향한비판,계몽성강한메시지를표출하는사회참여자로서의자세가공존한다.이는장르에따라달리구현되기도하고시기에따라변화하기도한다.격변의한국근대사를관통해남겨진이작품들을하나의그릇에담아오늘에다시읽는일은,그렇기에인간과역사와언어를다층적이자총체적으로이해하는일이다.그것은상허가글쓰기를통해실천하고자했던궁극의의도에다가가는첫걸음이기도하다.
이에열화당은상허의생질(여동생의아들)서울대김명열명예교수와함께‘상허이태준전집’을새롭게기획,발간한다.남한에상허의직계가족이전혀없게된상황에서김교수는문학과관련된직업을가졌던친연성으로인해상허의자손을대신해서그의문학을기리기위해무언가해야겠다는책무감을갖게되었다.상허작품의본문을확정하는것은곧작품을완성하는것이므로창작에버금가게중요한일이라는확신이들어,정년후2015년초부터본격적인원고정리작업에착수했다.상허의의도에부합하도록본문을확정하고,원본을존중하며,월북전상허의글은모두모은다는세가지원칙아래,본문과초벌주석원고를이년반동안작업,2017년중반원고의1차정리를마쳤다.이후출판을위한적임자를찾던중에‘근원김용준전집’,‘우현고유섭전집’등우리근대기문헌복간작업을여러차례완수했던열화당에연락을해오게된다.상허의작품들을일관된기준으로정리하는일이시급하다는데공감한열화당은이원고를기초로2020년부터전집구성,원문대조를다시하고,수차례의회의를거쳐본문과편자주를꼼꼼히손보았다.최신정보를반영한연보의작성,화보자료수집,디자인에도정성을기울였다.이러한몇년간의과정을거쳐드디어전집의일차분네권을선보이게된것이다.
원본성과가독성을고려한편집원칙
작품이씌어진지어느새한세기가까이흐른지금,상허의글들은여전히낡지않은현재성을지닌다.하지만그이야기가활자화된우리말표기법이나용례는상당히차이가난다.작품의의미와표현을손상하지않으면서지금의독자에게‘읽힐수있게’복간하는일이그만큼어렵고조심스러울수밖에없는이유이다.
우선본문을확정하는세부원칙을세우는게중요했다.원본을존중한다는원칙아래저본원문과의꼼꼼한대조를선행하고,서술문과대화문모두현행표기법을따르되,대화문,편지글,인용문에서는방언이나당대의표현,인물의독특한입말은그대로살렸다.서술문에서도표기법에맞지는않지만예스러운분위기를전하는어휘는살렸다.오식,오자,탈자로의심되는부분은여러판본을참조하거나추정해수정했다.외래어나외국어는현행표기법을따랐으나,일본식외래어로굳어져사용되던말이나대화문에나오는것은그대로두고주석에풀이했다.
이전집에서가장많은시간과노력을들인요소는편자주인데,그적절함과정확성에서염려되는부분이기도하다.각권마다적게는500여개에서많게는1,400여개에이르는주석이각주형식으로들어가있으며,생소한옛어휘,외래어,일본어,한시,인물,장소,사건에풀이나간략정보를맨처음나오는곳에한번넣었다.의미가모호하여‘추정’이라밝히고풀이한곳도있고,정확한뜻을찾을수없어넘어간곳도있으며,젊은독자를고려하여난이도를약간낮춰달았다.그밖의자세한편집원칙들은책앞에실린「‘상허이태준전집’을펴내며」에밝혀져있다.
연보,문헌시각자료,전집디자인
작가연보는상허의출생부터현재까지를아우르기로하고,월북이전과이후의국내외제반자료를포괄해작성했다.기존에불확실하게전해지던사항들은반영하지않았고새로확인된사항들을추가했으며,사실확인이어려운월북이후의일에대해서는증언자이름을밝혔다.연보는전집완간까지지속적으로보완과확인을병행하며완성해갈계획이다.
끝으로최초발표지면과단행본표지를화보로덧붙여,김용준,정현웅,안석주,김규택,길진섭,노수현,이주홍,김환기,최영수같은화가들의장정(裝幀)및삽화뿐만아니라,표기법,활자,조판,편집등당대의출판환경을엿볼수있게했다.상허의사진및관련자료는전집이완간될시점까지모인것을종합하여작품목록및작가연보와함께마지막권에공개할예정이다.
방대한규모의전집디자인은각권의개별성과통일성을두루갖추어야하고오랜시간을견뎌존재해야하는어려움이있다.열화당은평소그러한조건에맞는정갈한디자인을추구해왔으며,이전집역시과거와현재를넘나들며오래두고보기에가장편안한모습으로디자인했다.재킷,권두삽지(flyleaf),화보용지를한국적질감으로선택해소장본의가치를높였으며,수록작품의발췌문장을넓은띠지위에세로짜기로흘려,한글활자와상허문장의아름다움그자체를디자인적요소로전면에부각시켰다.
상허문학의정수,단편소설-제1권『달밤:단편소설』
상허의문학중가장빼어난작품들은단연단편소설이다.그스스로“내생활에다소가치가있었다면그가치의화폐가곧이단편들이라해마땅할것이다”라고했을만큼그의가장순수한글쓰기의결실들이다.대부분은근대화와식민지현실에서자본과권력으로인해방황하는인간상을그리는동시에,그들의순박한성품과연민을담아낸다.「장마」「패강랭」「무연」등후기로갈수록무기력한지식인의자의식도드러난다.서정성과예술성이돋보이는것도장편소설과구별되는특징으로,“작가들의직업이아니라작가들의예술을보려면아직은단편을떠나구할데가없다”고강조했듯,그에게단편은연재물이지닌제약으로부터벗어나작가고유의미의식을온전히발현할수있는형식이었다.상허는특히인물,행동,배경의묘사에서탁월한경지를보여주는데,이는평소한인간이얽혀있는모든생활을세밀하게관찰해야만가능한일이었고,여기에작가의인생관과세계관이더해져친숙하면서도독창적인인물상들이탄생될수있었다.
전집을여는첫번째권으로그의단편과장편(掌篇,콩트)모두를모은『달밤』을배정하고,1925년『시대일보』에발표한등단작「오몽녀」(단행본개작시‘오몽냬’로표기)와대표작인「달밤」을비롯해,최초공개되는「동심예찬」까지쉰다섯편의단편을수록했다.상허가월북전에출간한세단편집『달밤』(1934),『가마귀』(1937),『돌다리』(1943)에실린작품대로장을나눠구성하고(이중희곡「어머니」와「산사람들」은전집제2권에수록),이어서‘그밖의작품’을발표연도순으로배열해,작가생전의출간의도를최대한존중하려했다.단행본서문들과,크게개작된「오몽냬」의최초본「오몽녀」전문,「코스모스이야기」「꽃나무는심어놓고」최초본결말부분은책끝에부록으로실었다.
장르의경계를넘나드는글쓰기-제2권『해방전후(解放前後):중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
전집두번째권『해방전후』에는중편소설다섯편,희곡두편,시아홉편,아동문학서른다섯편,총쉰한편의작품이수록되어있다.단편이나장편에비해연구가소홀한장르들로,특히시와아동문학은최초로한자리에서소개된다.또한중편「법은그렇지만」에서누락된채전해지던연재회차를처음발굴해실었다.
1930년대잡지에연재된중편소설「법은그렇지만」「방물장수늙은이」「애욕의금렵구」「코스모스피는정원」은단편소설속몇몇인물상이확장전개되면서장편소설이지닌통속성과대중성도엿보인다.월북직전인1946년8월조선문학가동맹기관지『문학』창간호에발표한「해방전후」는‘한작가의수기’라는부제에서짐작할수있듯이해방공간의혼돈과자기반성을반영한자전적작품이다.단막극으로된두편의희곡에서도단편의소외된인물과연민의시선이이어진다.「어머니」는가난한지식인의나약하고이중적인모습에서비극적인간상을보여주고,「산사람들」은식민지시절화전민의고달픈삶과이들을구경거리삼는도시인을대비시킨다.
휘문고보시절인1922년『학생계』에발표한시「누나야달좀보렴」과「한강꿈」은상허의글이세상과처음만나는한순간을보여준다.이후휘문고보교지『휘문』에,일본유학시절도쿄의조선유학생학우회기관지『학지광』에시를싣는다.훗날해방을기뻐하는노래,부녀동맹동지들에게띄우는답장을시형식으로쓴데서도짐작할수있듯이,그에게시는슬픔,애도,환희,연대의감정을표현하기위한글쓰기였다.한편,1929년개벽사에입사했던상허는『학생』『어린이』같은잡지편집에관여하고소년물을발표하면서1930년대에어린이를위한많은글을남겼다.등단작인「오몽녀」(1925)보다앞서학창시절「물고기이야기」(1924)를썼으니,소설보다동화창작을먼저한셈이다.일찍부모를잃은자기어린시절의기억뿐만아니라작고연약한존재를향한애틋함과희망의메시지가담겨있으며,시,동화,콩트,희곡,산문,편지글등형식의다양한시도도나타난다.
대중문학의통속성과사회성-제3권『구원(久遠)의여상(女像)·화관(花冠):장편소설』
전집의세번째권『구원의여상·화관』은초기와중기장편소설각한편씩을모은것이다.1930년대에는잡지와신문의발간이붐을이루었고,그만큼독자를끌어들이기위한수단으로연재물이많이생겨났다.상허역시이시기가장활발한글쓰기를하며인기작가의반열에올랐다.단편에비해매체와독자의영향을받을수밖에없는장편연재물의한계를스스로인정하면서도,이장르만이가진서사스케일과대중성에힘입어사회적메시지를담은작품을완성해냈다.흔히저급한것으로해석되는대중문학의통속성에대해서도그는재인식을요구했다.“이통속성이란곧사회성이다.결코무시될수없는,개인과개인간의각각도로의유기성을의미하는것이다.통속성없이인류는아무런사회적행동도결성도가질수없는것이다.”
「구원의여상」은『신여성』(1931.1-1932.8)에연재된후1937년동명의창작집에수록되어나온상허의첫장편소설이다.여자전문학교동창인이인애와김명도,그리고인애의외삼촌집가정교사인고학생손영조사이에서벌어지는삼각관계를기본구조로한다.사회주의자인영조에동조하면서도그들이추구하는성의개방에관해서는전통적인여성상을지키는인애와,그에비해실리적이고자유분방한명도의태도가대조를이룬다.근대적연애관이확산되던시기,남녀간에벌어지는가치관의변화와충돌양상이등장인물들의심리묘사와대사를통해재현된다.「화관」은『조선일보』(1937.7.29-12.22)에연재된후1938년단행본으로출간된상허의중기장편이다.주인공임동옥은구시대적결혼관을거부하는신여성으로,사업가배일현을비롯한여러남성들의구애를거부하고개인보다는민족과사회를위해일해야한다고주장하는박인철을동경한다.하지만이상적사랑을꿈꾸었던인철과도결국이루어지지못하게되면서,한남자를위한화관이아닌민중과시대를위한화관을쓰기로결심한다.전문학교졸업후원산으로떠난동옥은지역교육활동에전념하며사회적자아를확립해간다.두작품모두1930년대여성지와신문연재소설의상업성때문에표면적으로는연애소설의구조를지니지만,계몽성과사회의식,진취적여성상등을동시에담고있다.
일간지첫장편연재소설-제4권『제이(第二)의운명(運命):장편소설』
상허의장편은단편에비해가치평가가그리높지않은데,이는1930년대상업화한신문연재소설이라는한계속에서이해할필요가있다.그는독자의관심을끄는흥행작가로서의임무를충실히수행하면서도나름대로시대의현안들을진지하게녹여내는성과를거두었다.이러한점에서상허의장편은일반적인연애소설,통속소설로만치부해서는안되며,무엇보다인물들의생동감있는대사와상황묘사에서상허특유의문장력이발휘되고있어이를발견하는의미도있다.
전집의네번째권『제이의운명』은상허의첫일간지장편연재소설로,『조선중앙일보』(1933.8.25-1934.3.23)에연재된후1937년단행본으로출간되었다.남녀의중첩된삼각관계속에서연애,돈,계급,교육,농촌운동같은당대의사회문제들이다양하게다루어지고있어,대중성과사회성을모두갖춘작품이다.연인사이인심천숙과고학생윤필재는재력가집안의박순구가천숙을흠모하며갈등이생기고,실연뒤여학교교사가된필재는동료교사남마리아와서로호감을나누지만강수환의모함으로학교를그만두게된다.이후강원도용담으로배경이바뀌면서필재와마리아가재정난에빠진관동의숙을재건하는상황이이어지는데,이는일제의수탈에대항하는1930년대농촌계몽운동의실상을반영한것이다.남성들은다소우유부단하거나세속적으로보이는반면여성들은자신의삶을스스로개척하는과감한인물로그려지고있다는점에서돋보이는작품이며,이는연재예고기사에적힌작가의말에서도드러난다.“제이의운명,그것은벌써운명의부정이겠습니다.(…)그런운명의개조자,그런억센의지의성격자하나를창작해보려는것이나의의도란것만미리말씀할수있습니다.”
‘상허읽기’의다채로운제안들
이전집은권별연구자책임감수방식이아니라전권에통일된편집원칙을강화해적용하는방식을취했다.작품해제를포함하지않은것도이와무관하지않은데,상허연구가이미방대하게이루어지고있는현실에서,유사또는특정시각의제시보다는기초문헌의완성에충실하고자했다.상대적으로연구가미비한생소한장르는선택적으로해제를싣는방법,전집을아우르는통합된시각의해제를마지막권이나다른지면을통해제공하는방법등은고민중이다.
그연장선에서열화당은근7년만에다시발간하는소식지『책과선택』33호를상허특집호로꾸며봄에발간할계획이다.여기에는상허당대에활동하던문인들이남긴글,후대문인들이쓴글을비롯해,지금의시각에서바라본작품론또는감상문,편집자의후기등을수록하려한다.상허읽기에도전하고싶은독자들을위해인물,공간,어휘등의테마로작품을해체또는종합해볼수있는코너도마련한다.『책과선택』은열화당홈페이지를통해구독신청을하면무료발송해드리며,주요서점과문화공간에배포될예정이다.
더불어2024갑진년새해출간된기념으로달력‘상허의계절’을한정판으로제작했다.1차분수록작에서계절에어울리는문장을발췌해한해동안가까이에서상허와함께할수있게했다.전집이완간될때까지‘상허읽기’를위한다채로운시도들을병행해나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