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키스

$12.00
Description
마력의 언어로 그려진 새로운 세계!
강정 시집『키스』.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강정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두 번째 시집을 펴낸 이후에 쓴 시들을 모은 이번 시집은 시인의 새로운 언어와 세계의 가능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오랜 시간 소년으로 살아오던 시인이 세계와의 '깊은 키스'를 통해 어른으로 올라서는 순간이며, 그의 언어가 마력의 언어로 탈바꿈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시인은 '오래전 시'의 끝을 알리고 '마지막 시'의 타오름을 선언한다. 인간의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쓰던 시인은 이제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며 새로운 시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이렇게 쓰인 시편들은 새로운 세계에 닿지만, 새로운 세계는 전혀 새롭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특유의 리듬이 잘 살아 있는 시를 통해 시인은 '내'가 기억하는 '당신'은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일 뿐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나'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 몸과 공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인의 '키스'는 타인을 확인하는 씁쓸한 언어가 아니라, 밖을 안으로 들어고 안을 밖으로 내어놓는 적극적인 언어이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키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 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 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저자

강정

1971년부산에서태어났으며추계예술대문예창작과를졸업했다.1992년『현대시세계』가을호에「항구」외5편의시를발표하면서시단에등장했다.시집으로『처형극장』이있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죽음몸에白夜가흐르고
死後의바람
죽음몸에白後가흐르고
키스
키스
번개를깨물고
안녕
자멸의사랑
사실,사랑은…
길위의구멍
급정거한바퀴에대한단상
노래
아픔
이사
몸안의음악
마술사의아이
오래된그림이있는텅빈식탁
영화
물빛이저세상의얼굴처럼환해질때
白沈
낯선짐승의시간
암소와의첫사랑
밤의동물원

제2부카메라,키메라
불탄방
불탄방
카메라,키메라
등에가시
풍경속의비명
그녀라는커다란숨구멍,혹은시선의감옥
아침의시작
고등어연인
나비떼가떠있는방
한낮,정사는푸르러
티브이시저caesar
달빛을받는체위
텔레비전
텔레비전
반지의전설
침입자
코끼라간다
무덤이떠올라별이되니세상은한참이나적막하더라
血便을보며
밤의확장
스무살
死後의바람

해설ㅣ애무의윤리ㆍ조연정

출판사 서평

원시의감정이아로새긴세계,마력의언어로터져나오는가슴벅찬노래

강정의새시집『키스』(문학과지성사,2008)가문학과지성시인선353번째시집으로출간되었다.1992년만21세라는나이로등단한지16년째가되는‘중견시인’이지만이제야세번째시집출간이다.첫시집『처형극장』과두번째시집『들려주려니말이라했건만,』사이간극이10년가까이된다는것은감안하자면,2년이라는매우짧은기간동안쓰인시들로꾸려진이번시집『키스』는그러나,강정의새로운언어와새로운세계의구성의가능성을집약적으로보여주는각별한시집이될것이다.

평론가조연정은해설에서“(첫시집)『처형극장』의강렬도를기억하는독자라면‘키스’라는세련되고도선정적인제목의시집앞에서당혹감을느낄지도모른다.”고말하며,그러나“나는나는여기서곱게미쳐죽을거랍니다.”(「處刑劇場」)라고외쳤던스무살의독기를“즐거워죽을수있도록”(「노래」)이라는말랑말랑한연애감정과뒤바꾸었다고보는것은곤란하다.”고강조한다.“『키스』의강정은『처형극장』의분방한에너지를그러모아숙성시켜애무의순간에몰두하고있”기때문이다.실제로강정은『처형극장』속에난무하던에너지를『들려주려니말이라했지만,』이라는과도기적여과를통과하여『키스』라는시집안에응집시키고있는것으로보인다.세계와의‘깊은키스’를통해오랜시간소년으로살아오던시인이단숨에어른으로올라서는순간이며매력의언어가마력의언어로탈바꿈하는‘새로운인식/시쓰기’가이루어지는순간이다.시인은「死後의바람」이라는동일한제목으로시집의시작과끝을장식하는시에서이를노래하고있다.

오래전한편의詩가끝나고바람이불었다
사람들이짐승의거죽을뒤집어쓴채민둥산의태양을끌어내렸다

불타는시간들은그대로숲이된다
인간이인간바깥으로떠돌아짐승의마음을허공에쓴다
─「死後의바람」전문

이오래된바람의내력엔서로피를나눠먹던종족의역사가흐른다
강물의붉은색은노을에닿아바다가되고
발끝에묻은파도의소금기가지문으로번질때
기필코사람은지느러미와날개를갖는다

또다른궤를그리며땅속에덮이는하늘
맨발로뛰쳐나가생의지도를다시찍으니
펄럭이는파도끝자락에마지막詩가불붙는다
─「死後의바람」전문

강정은위시들에서“오래전詩”의끝을알리고“마지막詩”의타오름을선언한다.“인간의바깥으로떠돌아짐승의마음”을쓰던시인은이제“맨발로뛰쳐나가생의지도를다시찍으”며새로운시의서막을알리는것이다.이기묘해보이는개인사적선언은선언에멈추는것이아니라“보이는것들은다보이지않는것이되”는한편지나간“한세상이저만치다른상처에닿”으며경험하는이러한한세계와의결별과다른세계와의조우의추동력으로작동한다.이렇게쓰인시편들은세계를무한히확장하며새로운세계에닿는다.그러나,이새로운세상이반드시새로운경험이되는것만은아니다.그는이미많은것을경험하였으며그러므로‘새로운세계’는‘전혀새롭지않은’모습으로찾아온다.

우스운일이지만,
나는카메라한대로모든시간을포획하려는꿈을아직버리지못한다
당신의얼굴을담으려다가
두개의망막을거쳐내심장에가설된집에는
당신이떠난자리만휑뎅그렁살아있는나보다
더크고살갑다
대개과장법이잘통하는나의카메라는
사람여자의몸에공룡머리를얹은모습으로
당신을기억한다
당신은내기억보다훨씬먼시간의지층아래
흙과나무의처소로
봄마다아름답게환생하지만

[……]

사람여자의몸을내던진당신이
살금살금뒷물흘리며봄의훈향을대륙의모래먼지로뒤바꾼다한들
어떤한계를넘어서려는듯
제속의사악한것을토하려는듯
낮게찰랑거리는허공에서
낯선풍경으로상영되는내마음의돌연한사건들이
지난한욕정의형식을試演하는걸막을순없다
봄이면귀환하는먼미래의악취속에서
나는이미
당신이찍어놓은과거의얼굴들이기때문이다
─「키메라,카메라」부분

강정특유의리듬이잘살아있는위시에서강정은‘내’가기억하는‘당신’은과장되고왜곡된모습일뿐결코새로운것이아니며,‘나’역시그러하다고말한다.“낮게찰랑거리는허공에서낯선풍경으로상영되는내마음의돌연한사건들”마저이미“찍어놓은과거의얼굴”에불과하기때문이다.그러나강정은이‘새롭지만새롭지않은세계’를대수롭지않게바라만보고있지않는다.세계에대한인식과사유이전에그는당신이라아로새긴‘새롭지만새롭지않은세계’를찢고,들여다보고,삼켜,자신속으로편입시킨다.이렇게삼켜진세계는‘차이와반복’이생기기전,언어를통해하나가되고,그러므로‘당신’은막막함의대상이아니게된다.다시말해‘새롭지만,새롭지않은세계’를들이마심으로써시인은,스스로‘완전히특별한세계’가된다.

방안에서문득꺼내본당신의얼굴이젖어있다
머뭇거리던당신의마음이한순간멎는다
불빛이죽은먼지처럼이글거린다
벽면을바라보던눈알이허공에포물선을그리며
금싸라기처럼만개한다
내몸과공간사이에경계가사라진다
나와당신사이에
나와당신과무관한
또다른인격이형성된다
사랑이란하나의소실점속에전생애를태워
한꺼번에사라지는일
이우주에더이상밀월은없다
─「불탄방」-너의사진전문

‘키스’의순간“몸과공간사이에경계가사라”지고당신과내가흡착되는순간“무관한또다른인격의새로운세계”가태어난다.그것은유일무이함으로“이우주에더이상의밀월은”존재할수없다.강정의키스는타인을확인하는씁쓸하고가슴아린몸부림의언어가아니라,‘밖을안으로들이고안을밖으로내어놓는’적극적이고집요한태도의언어이며,“세계와나를가로지르고있는”“살갗을벗겨내어”세계를들이마시는행위이다.여기서주목해야할점은시인이세계에편입되는것이아니라세계가시인에편입된다는것이다.‘나’로부터시작되는‘삼킴’행위는즉각적이며본능적이고,관능적이다.어떤판단이전의‘원시’의감정들이이시집의근간을이루고있으며강정은이넘치게흐르는감각을한꺼번에끌어안음으로써‘새롭지만새롭지않은세계’를단숨에전혀새로운세계로만들어버리는것이다.그러므로이번강정의시들은‘전혀새로운세계’에서채집한감각들이라할수있으며여기에강정만의서정성이더해져여태껏들어보지못했던새로운질서의노래로다시태어나는것이다.이것이강정의이번시집이가지고있는특별함이며우리가그의새시집을주목해야하는이유이다.강정의이번시집에는‘또다른의미로서의시’인그림들이포함되어있다.이혜승씨가그리고시인이직접고른이그림들은시의‘재해석’이아닌또‘다른형태의시’가되어서강정의시들의다른면모를볼수있는즐거움을선사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