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 -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슬픔치약 거울크림 -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12.06
Description
살아 움직이는 시의 미학!
김혜순 시인의 열 번째 시집『슬픔치약 거울크림』. 제16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시집 <당신의 첫>이후 3년 만에 펴낸 저자의 이번 시집은 일 년여에 걸쳐 완성한 장시 ‘맨홀 인류’를 포함한 총 44편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 쓰는 과정 자체가 시가 되는 방식으로, 여성적 위치에서 발화 가능한 여성의 목소리로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시편들을 적어 내려가는 저자 특유의 비유와 날선 감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눈감은 채로, 걷는 채로 오롯이 치러내는 통증이자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슬픔’과 ‘거울’앞에서 근원적 열정을 들여다보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등 다양한 이미지가 담긴 ‘우가 울에게’, ‘구름의 놀스탤지어’, ‘인플루엔자’, ‘그녀의 레이스와 십자수에 대한 강박’, ‘검은 브래지어’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내 안의 소금 원피스

슬픔을 참으면 몸에서 소금이 난다
짜디짠 당신의 표정
일평생 바다의 격렬한 타격에 강타당한 외로운 섬
같은 짐승의 눈빛

짧은 속눈썹 울타리 사이
파랑주의보 높아 바닷물 들이치는 날도 있었지만
소금의 건축이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따가운 흐느낌처럼 손끝에서 피던 소금꽃

소금, 내 고꾸라진 그림자를 가루 내어 가로등 아래 뿌렸다
소금, 내 몸속에서 유전하는 바다의 건축

소금,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몸속에서 바다를 채집하려 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염전이 문을 열었다
나는 아침부터 바다의 건축이 올라오는 소리 듣는다

나는 몸속에 입었다
소금 원피스 한 벌
저자

김혜순

저자:김혜순
1978년<동아일보>신춘문예평론부문에입선했고1979년<문학과지성>에시를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1989년서울예술대학교문예창작과교수로임용되어2021년까지학생들을가르쳤다.시집『또다른별에서』『아버지가세운허수아비』『어느별의지옥』『우리들의음화』『나의우파니샤드,서울』『불쌍한사랑기계』『달력공장공장장님보세요』『한잔의붉은거울』『당신의첫』『슬픔치약거울크림』『피어라돼지』『죽음의자서전』『날개환상통』『지구가죽으면달은누굴돌지?』,시산문집『않아는이렇게말했다』,산문집『여자짐승아시아하기』,시론집『여성이글을쓴다는것은』『여성,시하다』등이있다.김수영문학상,현대시작품상,소월시문학상,미당문학상,대산문학상,캐나다그리핀시문학상,스웨덴시카다상,삼성호암상예술상등을수상했다.서울예술대학교문예학부명예교수이다.

목차

제1부
우가울에게
안경은말한다
지평선스크래치
유령학교
구름의노스탤지어
책속에서나왔다가다시돌아가지못하는여자처럼
어미곰이불개미떼드시는방법
상처의신발
타이핑과뜨개질
생일
내안의소금원피스
나의프리마켓
창문열린그시집
유리우리
열쇠
토성의수면제
배꼽을잡고반가사유
눈썹
달구슬목걸이
아침인사
높과깊

제2부
인플루엔자
토끼야?오리야?
우산
탑승객
나는불사도불생도모릅니다
나무들파티
하나님의십자수와레이스에대한강박,1
그녀의레이스와십자수에대한강박
피가피다
전세계의쥐들이여단결하라
별이
맨홀인류

제3부
에베레스트부인의아침식사
정작정작에
아주조그만잠속에
타조
그림자청소부
달뜨다
바다가왔다갔다
출석부
검은브래지어
아침
냉수한컵

발문|숨쉬는미로들_김경주(시인)

출판사 서평

우선표제속‘슬픔’과‘거울’은눈여겨볼만한단어이다.‘슬픔(/우울)’은주체할수없이덩그런몸뚱이에붙박인‘나’에게서자유롭지못한화자‘나’가눈감은채로,걷는채로오롯이치러내는통증이자세상을향해질문을던지게만드는이유이다.

우는산산이고,울은조각이고
우는풍비이고,울은박산이고
내살갗은겨우맞춰놓은직소퍼즐처럼금이갔네
우는옛날에하고,울은간날에울었네
우는비누를먹고,울은빨래가되었네
나는젖은빨래목도리를토성처럼둘렀네
우는얼음의혀를가졌고,울은얼음의눈알을가졌네
나는얼음을져나르느라어깨가아팠네
-「우가울에게」부분

걸어가면서잠자는거대한회색곰처럼
눈꺼풀위에너덜거리는거대한검은레이스구름처럼
기름질질싸고가는사막한가운데덤프트럭처럼
계단은썩고다락은먼지가한길이나쌓인집채처럼
덩그러니나말고아무도없다는거
거리에서쫓겨나고쫓겨나면서
점점커진다는거
내가세상의비명으로꽉차있다는거
그것밖엔아무것도없다는거
-「어미곰이불개미떼드시는방법」부분

내몸에서솟은“뾰족한초침들이안타깝다안타깝다나를찌르”(「생일」)기나하듯,심드렁하고퉁명스럽게툭툭내뱉는한마디에도결코경쾌함과탄력을빠뜨리지않는김혜순식‘분노’와‘비애’는그렇게드러난다.

눈뜨고그냥있다,난안경이니까.
결코무엇을보는법도없다,난그저안경이니까.
저화덕위의키조개가뭘보는것이아닌것처럼그냥있다.
더더구나나는눈을감을줄모르니까.
나는얼음을먹는시간과도같다.
먹고나면뭘먹었는지도모른다.
[……]
나한테오는사람은왼쪽하늘과오른쪽바다
두개로나뉘어서온다.
그러니안경에대고말하는건난센스다.
제귀에대고말하는거와같으니까.
-「안경은말한다」부분

당신머릿속빛나는오기처럼던져라똥!던져라공!뿌려라물!
안녕안녕안녕

모두작별해버리고싶은아침

[……]
내가내이름을지을수없는곳,안녕
내가내병명을지을수없는곳,안녕
내일아침은내침상에서새질병으로태어날거야
그질병에나를꽂을거야
그러니모두안녕
이제마이너스당신이된당신님도안녕
-「아침인사」부분

“외국어로가득찬몸”(「타조」)의미궁(/미로)속을하염없이걷고있는시인은‘거울’앞에서자신의근원적열정을들여다보고지우기를반복한다.애당초이‘거울’에비친세상이울퉁불퉁하고,미끌미끌하며,변덕이죽끓듯플러스마이너스를오가는터라,‘움직이는미로’의유동성처럼김혜순시의영토에자기반복이라곤찾아볼수없다.대신“박멸의기관.침묵의입술”인‘귀’로시인은말한다(혹은귀로세상을듣는다).그에따르면“귀로말하기는언어의뒤편,목소리와이름이사라진그뒷면의격류로말하기.마치외계인과만났을때처럼,성대없이통해야하는것처럼.거울속에수장된여자가귀로말한다.”하여시인은“단어들이품고있는이야기를지우며단어들에게서문장이밀려오려는밀착을전보다더힘껏”(김경주,시인)밀어내고있다.이때그누구의모방도불허하는김혜순의비유와날선감각이있어그‘귀로말하기’를가능하게만든다.

부신햇살에날아가는내어금니처럼노란것
바람의터럭같은것이두근두근날아간다

나는내영혼에서냄새가난다라고쓴다
나는두근거리는노랑을뱉고싶다라고쓴다
-「눈썹」부분

나는신성하게도방사능이타고있는벽난로속에
숯처럼까만영혼을던지고쉬기로했다
먼나라에왔으니기억을씻어야지생각했다
조금쉬다가슬픔치약을발라이를닦았다
[……]
영원히계속되는동화에서흘러나온
고양이가살며시지나가고
비품들이하나하나지워졌다
무쇠난로엔지우개가루들이쌓여갔다
하나님이굴뚝위로조용히타오르고있었다

빗이거울을부르고거울이빛을부르고빛이나를부르고
나는방에갇혀있는거울에갇혀있는나의슬픈눈동자에갇혀있는
나에게거울크림을바르고천천히지워져갔다
-「창문열린그시집」부분

마치“촘촘히빈틈으로그물이짜인방/그리하여입구도출구도없는방/거울속에서유령이시간맞춰나타나는방”(「창문열린그시집」)처럼다양한통로로가득한미로속화자는미증유의꿈을꾸고“내가나에게명복을”(「토성의수면제」)빌며눈감은채자신(의그림자)을들여다본다.

역광속에멀어지는당신뒷모습열쇠구멍이네
그구멍속이세상밖이네

어두운산능선은열쇠의굴곡처럼구불거리고
나는그능선을들어당신을열고싶네
-「열쇠」부분

내몸을태우고남은빛으로
윤곽을그린검은구멍아
감촉도죽고냄새도죽은마침표야
너에겐본드도붙지않는구나
한없이서늘한것!

너는나를태운불길들위에뿌려진물한동이
그리고그곳에남은물무늬
문득켜지는검은눈동자
네가본것은무엇이냐
시멘트바닥에쓸려다니느라피맺힌검은구멍아
버둥거리던사지는어디갔나
-「나는불사도불생도모릅니다」부분

이렇게“어떤육체를분방하게움직이게하는숨처럼,숨속에숨은몸을더듬듯이”(김경주,시인)끊임없이던지는질문으로이세계를새롭게구축해가던시인이발을들인곳은지상낙원도유토피아도아닌‘맨홀뚜껑’아래하수구속세상이다.바로“내몸의이행”으로열고닫히는‘구멍’이다.거리와광장에서생과죽음을오가는타인들과‘나’는별개일지모르나,발아래맨홀뚜껑을열고생기는구멍의안팎으로‘나’와‘당신’의몸을타고한연대기가흐른다.마치허공과섞어짜내려가는직물처럼,우주의공허와광활이머리위로이어지듯이.

또하나의맨홀인류가탄생하고있다.시간이아기의몸에구멍을뚫고있다.머리에맨홀뚜껑을얹고있다.

그아래식당에서식물,동물구별할것도없이
질투와고독과영혼을구별할것도없이
도마가득몸들올려놓고
두손으로난도질하고있는요리사의손동작!

내가내일아침저것을먹는것은구멍의껍질을먹는것인가?구멍의밖을먹는것인가?구멍의사슬을먹는것인가?내구멍의보존욕구여,쉼표로연구되는쉼없는음악이여,만만세여!
[……]
그누구의것도아닌나의잠은어디에있다가이제야오는가.
그누구의것도아닌나의사랑은어디에있다가이제야오는가.
그누구의것도아닌나의고통은어디에있다가이제야오는가.
[……]
‘나’,내가내몸속에유폐되어있는곳을부르는이름!
‘나’,몸속의구멍밖으로모습을드러내지않는자들을통칭하여부르는이름!
‘나’,혹은몸속에사시는분을알아보지못하는이분을모셔부르는이름!
-「맨홀인류」부분

무려35쪽에걸쳐폭발하는‘불꽃의춤’,형언할수없는‘리듬의만다라’가잦아들면다시(시인은)“나는곧잘히말라야정상에걸터앉아/저까마득한심해를내려다보며/아침을먹는다고상상한다”(「에베레스트부인의아침식사」).그리고,

그소녀에게서떠난시간들이줄지어그녀에게서빙하는아침
차가운수의,투명한얼굴,면도날처럼시린몸

할머니들대표로우리엄마가
여든살되어가지만자꾸만그녀가나온다고
나이들수록그녀가더자주나온다고
입가리고호호호내퀴즈에답하실때
[……]
아줌마!어디서살다가이제와요?묻는
이름없는소녀에게
나도낯설어내얼굴을몰라보는나에게
해뜨기전박명의시간,해보다먼저슬픔이솟아오를때
나는나의종이비행기맨앞좌석에앉은매정한그녀에게
신선한아침을서빙하네
-「아침」부분

발표하는시집마다기성의영토를점유하지않는방식으로,여성적포지션(여성적위치,자리,경험,상상그모든)에서발화가능한여성의목소리로,시쓰는과정자체가시가되는방식으로,매번당신을떠나새로운당신을만나듯매번저번과이별하고그이별/부재로서존재하는시들로우리의오감을동시다발적으로충격해온시인답게,김혜순은이번에도역시우리가아직도달하지못한언어의세계에거주지를마련해놓고우리를초대한다:“커튼을치고귀로말하는시들을읽는즐거움!침묵과비밀,그무궁한풍부속으로발을들여놓는즐거움!/내가이부재의비밀을당신에게투척하니흡입하시어부디궁핍하길.”

냉수한컵의간절한눈빛으로

몸을칼날처럼얇게벼리기
물어넣기
냄새나는입에서후하고뱉어지기
낙타의혹에갇혀흔들흔들눈감고가기
썩어가는몸에서떨어져고물거리는
영혼같은것이되기
가려고떠나가려고만하기
안떠나지는거못견뎌하기

몸을더듬는물빛으로

미지근한얼굴에서미끄러져내렸어요
손가락을적시고흘러내렸어요
담겨진냉수한컵의전생이그렇게쏟아졌어요

사람들은왜저마다몸에서나가고싶은눈빛들을가졌을까요

눈을감고컵을들어삼키기
캄캄한목구멍속으로들어가기
다시태어나길기다리는건아냐
하면서헤엄쳐들어가기
끄윽트림으로쫓겨나기
영혼인지열반인지에섞여떠오르기
이윽고구름의발가락에매달리기

테두리를아직구하지못한물이
눈동자처럼한컵

우리는모르는우리몸속을다알고있는물이한컵
-「냉수한컵」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