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없는 밀실과 밀실이 없는 광장-남과 북의 분단과 대결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이념적으로 접근한 현대 한국 문학의 고전. 주인공 이명준의 비극과 갈망은 우리 자신, 우리 민족의 바로 그것이다.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차츰 자리잡아온 가로쓰기의 관행에도 맞추고, 새로 나온 표기법에도 맞출 수 있게 된 이번 판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운 형식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판에서도 몇 군데 내용이 고쳐졌다. 언제나처럼 큰 흐름에는 영향이 없고 그 흐름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첫 발표로부터는 30년,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운명의 성격 탓으로 나는 이 주인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여전히 필자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준은 그가 살았던 고장의 모습이 40년 후에 이러리라고 생각하였을까-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당자가 아니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현실의 결과보다는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한국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유보 없는 꿈과 희망에 휩싸인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의 생전에 결국 그런 꿈과 희망이 쉽사리-적어도 그의 감각만큼은 그렇게 유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된 것이지만, 40년이 지난 다음에 지금 같은 상태라고는 다시금 짐작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무의식을 짐작해보는 일은 그렇다고 하고, 작가인 필자의 사정을 말해본다면,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필자 자신의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확실히 떠올릴 수 있어서가 아니고, 어렴풋이-지금 돌이켜 생각해봐서 그런 느낌이 든다. 주인공이 마주친 인생 문제도 상대적으로 시대와 더 관련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보지만 그 두 부분이 깨끗이 나누어진 모양으로 제출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문제’라는 표현은 다만 비유적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먼저 이렇게 저 문제는 다음에 저렇게, 하는 식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인생 ‘문제’의 성격이다. 그 성격에 비교적 어울리는 형식이 소설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자기와 만난다는 자기 인식으로 돌아온다.
이번 판에서 고친 부분에서도 그 무렵의 주인공의 능력과 자연스러움에 변화를 주는 일 없이 그 무렵의 그만한 젊은이의 생활과 생각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1989년 4월 30일, 최인훈
[전집판 서문]
이번 개정판에서 고친 것은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바꾼 일이다. 예술로서의 소설 문장의 본질은, 표기법에 따라서 높고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표기를 가지고 나타내고자 하는 심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례적 표현과 어떤 심상이 오래 결합되어 쓰이고 보면, 심상의 형성 과정-의식과 현실 사이의 싱싱한 갈등의 자죽이 관례적 표현으로서는 나타내기가 미흡해 보이는 때가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표현이 낡아진 것이 아닌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여럿 되겠지만, 그 한 가지는 의식이 보다 더 깊게 현실과 어울리는 힘을 가지게 될 때다.
『광장』은 이번으로 다섯번째 개정인데, 나는 이 여러 번의 개정이라는 과정을 거쳐, 적어도, 『광장』이라는 이름의 작중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 쓸 때보다 훨씬 익숙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개정에서는 보태야 할 데라든지, 빼야 할 데, 플롯에서 중요한 데를 바꾸고 새로 맞춰넣어야 할 데가 거의 저절로 떠올랐다.
다음에 고친 것이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고친 일이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 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과정을, 이미 만들어진 한자어에 밀어버리고도 그런 줄 모르게 될, 표기에서 오는 함정을 감추고 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반드시 비한자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즉 그 한자어를 문맥 속에서 더 꼼꼼하게 정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워진다.
이 판에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길을 골랐다. 그러나 관습에서 너무 멀어져야 할 때는 거기서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부피로 보면 그대로 둔 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 같은 표기상의 바꿈 말고도, 표현도 바꾸는 것이 좋다고 느낀 데는 눈에 띄는 대로 바꿨다. 작자의 사정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개정 내용들이, 나의 짐작으로는, 이명준의 사람됨과 그의 걸어간 길을 독자에게 좀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976년 7월, 저자
[일역판 서문]
이 땅 위에 사람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 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없어져버리거나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랑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지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머릿속에 있는 골이라는 기관을 짜본다든지, 몸을 놀려본다든지 한다. 그러나, 골을 짠다든지, 몸을 놀렸을 때 그들은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에 부딪히기가 일쑤다.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기나 하려 들면 대뜸 몸을 다치게 된다.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그 사람은, 산다는 일을 무언가 신비한 도깨비 놀음처럼 알게 된다. 무서운 낭떠러지 언저리 따위에는 얼씬도 않으려 들고, 눈익고, 발에 익은 골목만 골라 다니면서 하다못해 푸근한 인정이나마 놓치지 말자고 든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짐작이 들었노라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그들의 짐작이라는 것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짐작이다. 버린 것-그것은 무엇일까? 귀한 어떤 것이다. 버리기 어려운, 버려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그것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짐작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선뜻 몸과 마음을 내키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
이 얘기의 주인공도 그런 사람이다. 초목처럼 살기도 싫고, 그렇다고 계산이 다 되지도 않은 데를 잔인하게 잘라버리고 사는 데도 내키지 않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이라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힘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주인공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그리고 이 주인공과 시대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힘이 없다. 그래서 그가 한 자리 얘기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다. 되레 그렇지 못한 탓으로, 많건 적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표징으로서 이 소설 속에 나타난 것이다.
이 주인공이 만난 운명은 그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 힘에 부쳤다는 것-이런 까닭으로 이 주인공은 파멸로 휘말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 또한 주인공 한 사람의 생애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국토에 시대를 함께한 숱한 사람들이 만난 운명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란, 정말 사람보다는 얼마쯤 분명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이 주인공이 걸어간 길도 그 나름대로 상황을 밝혀내는 몫만은 해낸 셈이라 볼 수 없을는지.
남은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다.
그저 막연히, 산다고 절로 풀릴 숙제일 리 없지만, 어쨌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들어간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가 쓰러진 데서 한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일문판: 김소운 역, 『광장』(동수사, 1973)]
[1973년판 서문·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工房)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닷속에 내려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 가지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숨은 바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누가 잠수부를 내려보낼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도 주인공을 삶의 깊이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살아오는 경우 그의 입으로 바다 밑의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요-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그의 연락이 끊어진 데서 비롯하는, 그 밑의 깊이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이명준은 그 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