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사건

분명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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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오규원 시집 [분명한 사건]. 한국 현대 시사에서 시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시의 언어와 구조’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탐구했던 시인 오규원이 우리 곁을 떠나 강화도 전등사 소나무 아래에 잠든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10주기를 맞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의 열한번째 시집으로 다시 펴냈다. 초판이 발행된 지 46년 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 시집ㅇ 읽기는 오규원의 시적 존재가 여전한 현재형으로 살아 숨 쉬는 기억과 호명의 자리에서, 평생에 걸쳐 언어를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실존의 문제로 여겼던 시인의 언어 탐구의 발원지로 되짚어가는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저자

오규원

저자오규원은1941년경남밀양삼랑진에서출생하였고,부산사범학교를거쳐동아대법학과를졸업했다.1965년『현대문학』에「겨울나그네」가초회추천되고,1968년「몇개의현상」이추천완료되어등단하였다.시집으로『분명한사건』(1971),『순례』(1973),『왕자가아닌한아이에게』(1978),『이땅에씌어지는서정시』(1981),『가끔은주목받는생이고싶다』(1987),『사랑의감옥』(1991),『길,골목,호텔그리고강물소리』(1995),『토마토는붉다아니달콤하다』(1999),『새와나무와새똥그리고돌멩이』(2005),『두두』(2008,유고시집)가있다.이밖에시선집『한잎의여자』(1998),『오규원시전집』(전2권,2002),『오규원깊이읽기』(2002)와시론집『현실과극기』(1976),『언어와삶』(1983),『날이미지와시』(2005)그리고시창작이론집『현대시작법』(1990)을펴낸바있다.서울예술대학문예창작과교수를역임했으며현대문학상,연암문학상,이산문학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등을수상하였다.2007년2월2일에작고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서쪽숲의나무들

분명한사건
정든땅언덕위
현상실험(別章)
무서운사건
현황B
그마을의주소
그이튿날
꽃이웃는집
무서운계절
들판
맹물과김씨
육체의마을
사내와사과

2부
삼월
현상실험
밝은밤
서쪽마을
아침
대낮
사랑이야기
포도덩굴
인식의마을
루빈스타인의초상화
주인의얼굴
즉흥곡
몇개의현상
雨季의시
겨울나그네

발문|
오규원에게보내는뒤늦은감사와송구_김병익

출판사 서평

변함없는한국시의전위,오규원의첫시집,46년만에복간!
한국현대시사에서시적방법론에대한가장첨예한자의식을지닌시인가운데한사람으로서,‘시의언어와구조’의문제를누구보다치열하게탐구했던시인오규원(1941~2007).10권의시집과4권의시론집ㆍ시창작이론서를비롯한30여권의저서를통해언어로써세계의구조를갱신하고,죽음에이르는병마와싸우는내내시적언어가가닿을수있는최대치의투명성을보여주었던그가우리곁을떠나강화도전등사소나무아래에잠든지어느덧10년이되었다.
오규원은한국자본주의체제속시와언어의존재론에대한날카로운질문을누구보다앞서던지며,‘이념’과‘관념’,‘주관’과‘감상’에경사되어온한국현대시에대한비판적인식을본격적으로진행시킨장본인이다.전통적인시의문법을해체하고새로운시적경향을모색하는데전념했던그의첨예한시론은‘관념의구상화’-‘관념의해체/해방’-‘현상읽기’-‘날이미지’라는미학적입장으로나아가며그를한결같은한국현대시의전위로있게했다.그의‘시론’으로서의이론적가치뿐만아니라시창작교육의교본으로익숙한『현대시작법』(1990)은실제습작에대한사례분석과시적언술에대한실질적인분석으로개념적인시론의한계를돌파한것으로평가받기도한다.20여년간서울예술대학문예창작과에몸담으며유수의많은제자작가,시인들을길러낸훌륭한선생이기도했던그의10주기를맞아첫시집『분명한사건』을‘문학과지성시인선R’의열한번째시집으로다시펴낸다.초판이발행된지46년만에새옷으로갈아입은『분명한사건』읽기는오규원의시적존재가여전한현재형으로살아숨쉬는기억과호명의자리에서,평생에걸쳐언어를대상이나수단이아닌실존의문제로여겼던시인의언어탐구의발원지로되짚어가는귀한경험이될것이다.

‘분명한사건’,오규원의시의시원(始原)에닿는시간
오규원은1965년봄『현대문학』에「겨울나그네」로1회추천을받고,1967년「우계(雨季)의시」로2회추천을거쳐,1968년10월에「몇개의현상」으로3회완료추천을받아시단에데뷔했다.『분명한사건』(초판1971,한림출판사)은등단한해를전후로7년간(1964~1971)쓴시들에서30편을추려묶은그의첫시집이다.첫시집이나온그해는시인의연대기에서전기로기록될만한굵직한사건들이있었다.“불화와궁핍의근원”이었던부친의죽음과마주해야했고,법대졸업후다니던출판사편집부를떠나노골적인자본주의의대표적현장이랄수있는대기업홍보실로근무처를옮겼다.1970~71년에걸쳐계간지『문학과지성』에작품을재수록하면서김현ㆍ김병익등문지그룹과교우를맺기시작했고,쌍문동에서개봉동근처로거주지를옮기것도이무렵이었다.이에앞서부산사범학교를졸업한직후부산사상초등학교교사로부임한이듬해동아대법학과전공을시작한행보는(1961~1968)그에게“말의효용성,추상성,구속력등등”을체험하게한계기가되기도했다.
이렇듯삶의터전과내면의변전이한데일어나던무렵에나온『분명한사건』은이후장시「김씨의마을」이나「순례」연작을완성하기이전,등단초기부터계속된언어와세계의관계에대한시인의고민을오롯이담고있다.시인스스로,1968년가을에시작해이듬해봄에완성한시「현상실험」을예로들며언어또는표현의불명확성과애매성에관한문제의식을고백하고있다.

“언어는추억에/걸려있는/18세기형의모자다”“망명정부의청사처럼/텅빈/상상”이며“가끔울리는/퇴직한외교관댁의초인종”이라고작품에서말하고있듯,여기에서의언어들은낡았지만그래도아름다움과나름대로의권위를지닌존재들입니다.그러니까그때저는언어의힘과아름다움을믿으면서도현실의언어또는‘나’의언어는낡았음을오랫동안고민하고있었던것으로여실하게읽힙니다.언어의힘과아름다움을믿고있었다는흔적은‘모자’라든가‘정부’라든가‘외교관’이라든가하는것만보아도쉽게짐작할수있습니다.이런문제의연장선상에서장시「김씨의마을」이씌어졌으며,”―「대담|언어탐구의궤적:오규원/이광호」(『오규원깊이읽기』,문학과지성사,2002)

「몇개의현상」,「정든땅언덕위」,「분명한사건」,「현황B」등시집『분명한사건』에수록된시들과장시「김씨의마을」을쓰던이무렵의시쓰기를그는이상의입을빌려다음과같이스스로분석하기도한다.

“그가『분명한사건』을쓸무렵에는그의의식은비교적순수했어요.언어에대한믿음이깊었다고나할까,혹은시에대한인식이그랬다고나할까요.하나대상을명확히묘사하려고할때언어는항상대상의편이되어그로부터멀어져갔지요.결국그는자신이틈입할수있는글을모색하지않을수없었어요.『분명한사건』의언어는대상을객관적으로드러내는일에한해서는그의편이었지만,그자신의삶을표백시키고있었다는점에있어서는그를배반하고있었지요.”(『길밖의세상』,나남,1987,p.288;『오규원깊이읽기』p.50재인용)

이러한반성은이후의시들에삶의현장이적극적으로들어오게되는단서로읽힌다.1970년대관념성이짙던그의시세계는점차관념이구체적인사회적내용을갖추면서시의산문화경향으로이어지는등새로운한국시의해체를맞게된다.작품에거주지가구체적으로등장하는것도그한요인이다.“투명한심상의세계를다룬시들은세계는분명해지는데개인(시인)의삶이표백된다”는오규원의저반성은이후「순례」연작시들로나아가고,현실과사물의현상을주목하는시학적탐구를거치며(『사랑의감옥』),오랜관념과의싸움끝에‘날이미지시’라는극점에다다른다(『길,골목,호텔그리고강물소리』,『토마토는붉다아니달콤하다』,『두두』).

이번복간시집에는35년간그와문우로지낸문학평론가김병익의발문「오규원에게보내는뒤늦은감사와송구」가함께한다.군사정권의개발독재와유사자본주의가개인과사회모두를강압하던40년전으로기억을되감는이글에서김병익은,잡지간행이녹록지않던시절,당시태평양화학홍보실에서일하던오규원이경제적으로문지에도움을준사연을비롯해,40여년을이어오는문지시인선의디자인장정과조세희의『난장이가쏘아올린작은공』(1976),이청준의『당신들의천국』(1978)등의표지를오규원이직접맡게된일화와추억들을밝히고있다.그리고“사물에대한그의극도의정밀성을근접촬영수법으로획득하여나름의방식으로개념화한‘날이미지’의시들”에는,“오직투명한시선과거기에포착된사물의순수한형상과의직절한교호만이존재했다.그극도의객관성을통해역으로그는이세상의유정(有情)한공감을감염시키고있는것이었다”는비평적시선으로옮겨간다.생명의소진에다가선오규원과의영원한작별을돌아보는자리를“말없는우정”으로,다시“분명한사건”으로복원해내는글말미의소회는깊은감동을전한다.

1
언어는추억에
걸려있는
18세기형의모자다
늘방황하는기사
아이반호의
꿈많은말발굽쇠다
닳아빠진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청사처럼
텅빈
상상,언어는
가끔울리는
퇴직한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

2
빈하늘에걸려
클래식하게서걱서걱하는겨울.
음과절이뚝뚝끊어진
시간을
아이들은
공처럼굴린다.
언어는,겨울날
서울시가를흔들며가는
아내도타지않는전차다.
추상의
위험한가지에서
흔들리는,흔들리는사랑의
방울소리다.

3
언어는,의식의
먼강변에서
출렁이는물결소리로
차츰확대되는
공간이다.
출렁이는만큼설레는,
설레는강물이다.
신의
안방문고리를
쥐고흔드는
건방진나의폭력이다.
광장에는나무들이
외롭기알맞게떨어져
서있다.
-「현상실험」전문

인식의마을은회리바람이더라흔들리는언어들이더라
무장한나무들이더라
공장에선석탄들이결사적이더라
인식의마을은겨울이더라강설이더라
바람이동상에걸린가지를자르더라
싸늘한싸늘한적설기더라밤이더라
-「인식의마을」전문

1
그마을의주소는햇빛속이다
바람뿐인빈들을부둥켜안고
허우적거리다가
사지가비틀린햇빛의통증이
길마다널려있는
논밭사이다
반쯤타다가남은옷을걸치고
나무들이멍청히서서
눈만떴다감았다하는
언덕에서
뜨거운이마를두손으로움켜쥐고
소름끼치는,소름끼치는울음을우는
햇빛속이다

2
행정구역이개편된
그마을의주소는허공중이다
목마른잎사귀들의잔기침사이로
종일어수선한하늘속이다
갈곳없는목소리들은나뭇가지에
모여앉아
편애의그물을짜고그위에서나른한잠을즐기던유령들이
시나브로떨어져죽는
편입된하늘의일대다
-「그마을의주소」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