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박미란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박미란 시집)

$12.00
Description
입을 잃은 자의 소리 없는 비명
차디찬 얼음으로 맺힌 마음의 고백
박미란의 두번째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시인은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지 20년 만에 첫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시인동네, 2014)를 출간한 바 있다.
누군가가 ‘입’을 가져가버린다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수많은 말들은 어떻게 될까. 터질 듯한 답답함에 가슴이 타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인 박미란은 모든 말을 차갑게 얼리기로 한다. 달라지지 않도록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도록 얼려버린 말들은 고이 쌓여 있다가 언젠가 그 말들이 별 볼 일 없게 느껴질 때쯤 조금씩 몸 밖으로 풀려 나온다. 이는 마치 등단에서 첫 시집까지 2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시로 발화되지 못했던 시인의 마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그간 쌓아두었던 말과 마음을 다시 한번 이 시집에 풀어놓았다.
저자

박미란

시인박미란은강원태백황지에서태어나계명대학교대학원문예창작학과를졸업했다.1995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시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그때는아무것도몰랐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어떤말은그대로몸속에머물렀다
목덜미/강둑에서/아침이오면그곳으로갈수있을까/아름다움에대하여/밤마다나는/그런날이계속되었다/동백/어느날저녁/여수여관/우리들의올드를위하여/문/사이/강/겨울/숟가락질하다/모자/저녁에서밤으로흘러들었다/수목원

2부정작너무흰것은마르지않는다
죽은별에게/외삼촌/흰벽/안녕/푸른집,그바람/가지를삶으며/물방울의여름/후회/창문/누가입을데리고갔다/담쟁이/기억은한동안/응달의눈/사랑/2월과3월/장례식/머루/북극성/공휴일

3부아름다운것을품으면모든게사라져도사람은남는다
저녁이면돌들이/키스/영혼이내게말했네/연못/동백,휘파람/바다/중앙/흰눈/흰돌/하늘/나중오는것들/그늘의저쪽/성산일출봉/그집앞나무/거리/숲속의작은불빛/노래/호양나무/그런날이계속되었다

해설
“붉은빛”에서“호양나무”까지·김영임

출판사 서평

인생의굽이굽이마다마주쳤던갈림길앞에서의망설임,불안그리고후회는잊힌것이아니라화자의몸안에“마음의얼음덩어리”(「저녁에서밤으로흘러들었다」)처럼뭉쳐져있다슬며시스미어나와시인의시가되었다.[……]그리고그아련한아픔과안타까움은화자의몸속에서함께세월을지내면서,삶을살아낸자만이가질수있는연륜과지혜로전이(轉移)되었다.누구든그렇게말하지못한것들을마음에얼린채로살아가는것이삶이다._김영임(문학평론가)

“어떤말은그대로몸속에머물렀다”
발화되지못한채흔적으로남은시간들

물살을거스르던청년들이강의이쪽과저쪽을건너는사이
우리는허물어지는것들에대해서도입을열지못했다

아무렇지않은듯
저쪽너머를바라보았지만
어떤말은그대로몸속에머물렀다

우리는다시흔들렸다물어도답할수없는풍경에가만히숨을내쉬며
―「강둑에서」부분

누군가는인생의갈림길앞에서선택을내리고앞으로나아가기도하며,종종후회하고다시돌아보기도한다.그런데또다른누군가는어떠한선택도내리지않은채현재의자리에그대로머문다.마치박미란의시적화자들처럼말이다.물살을거르며“강의이쪽과저쪽을건너는”청년들을우리는그저바라보고있다.“밤마다송충이들이짓무른몸으로기어가는것을”“임신한고양이가몰래집나가는것을”,산당화가“꽃잎붉게하려고손가락넣어토하는것을”나는밤마다바라보기만한다.변화/변태를선택한다른존재들앞에서나는“안간힘쓰며//제몸지키는일에”몰두할뿐이다(「밤마다나는」).
다른선택을내리지못한우리의마음엔어떤감정이남았을까.후회혹은미련?그리고언젠가‘그때선택을내렸어야한다고’한숨쉬며말할날이오는걸까.하지만박미란의화자들은그마저도행하지않는다.“맘속엔수많은총알의흔적”들이있지만,총알이스치면서만들어낸삶의흔적들을굳이꺼내놓고싶지않다(「우리들의올드를위하여」).“그대로몸속에”머무는말들.선택의길목에서어떤선택도할수없는자들은그저맘속에하지못한말들,그것이무엇이든,그말들을자기안으로함몰시킨다.

“끝까지버티었으니바싹타들어갈까해요”
마음속차디찬것들을녹여내는버팀의시간

당신을만나지않는게좋겠어요이렇게말하고후회한다는걸알아요어떤말은비참해서입술에서나가는순간얼음이되어요어느때부턴가차가움을사랑하게되었어요소음이심한냉장고의커다란얼음덩어리에힘들었던적있어요어떻게그걸안고살아왔는지몸속의종양덩어리를뱉어놓은듯냉장고는멈추었어요이제당신을만나지않는게좋겠어요차가운당신,당신이라는환상을,견디기싫어졌어요마음의얼음덩어리를들어내면또후회하겠지만녹는순간을지켜보던마지막천사처럼우리의느닷없는밤도흘러갔어요
―「저녁에서밤으로흘러들었다」부분

발화되지못하고몸에남은것들을화자는그대로얼린다.꼭꼭언“얼음덩어리”로만든다.마치“몸속의종양덩어리”처럼냉장고안에놓인거대한얼음덩어리.어떤미련도후회도새어나오지않도록영원히보존하려는듯마음을차갑게식힌다.하지만그자리를견디고있는화자에게도시간은흐르기마련이다.
“어떻게안고살아왔는지”알수조차없는얼음덩어리이자그때의그“환상”을‘나’는더이상견디고싶지않다.화자는차디찬덩어리를녹여밖으로흘려보낸다.마치영원할것같았던마음의짐을바깥으로내보내는과정은나에게후회를안겨줄수도있겠지만,화자는말한다.이러한“느닷없는밤도”흘러갈것이라고말이다.“사랑을잃어버린듯울부짖곤했지만”지나가는시간안에서그리애썼던마음은힘을잃고“시시한일”(「겨울」)이되는것이다.단순히세월에굴복해서가아니라시간이지나는동안스스로를단단히버티게해주었던힘,“부동(不動)의마음”(김영임)덕분이다.시인은말한다.말못한것들이마음에쌓여이도저도하지못한채이자리에머문다고해도,‘아무렴어떠냐’고.“너무애태우지”말라고.